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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 스케치’ 전시회 인천시가 21일부터 중구 신포로(송학동 1가)에 있는 ‘인천시민애집’에서 개항장 풍경을 담은 ‘찰칵! 스케치’ 전시회를 개최한다.시는 이번 전시회에서 대상의 모습을 현장에서 빠르게 스케치하는 어반 스케치 기법으로 개항장 풍경을 표현한 시민 작품 40점을 선보인다고 18일 밝혔다.‘찰칵! 스케치’는 1883개항살롱(개항장·내항 현장지원센터)이 진행한 시민참여 사업이다. 참가자 20여명은 역사문화해설사와 함께 개항장 일대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은 뒤, 10주간 개항장의 현재 모습을 어반 스케치로 표현했다.또한 지난해 ‘개항장을 회상하다(수묵화)’에 이은 두 번째 사업인 ‘찰칵! 스케치’는 개항장·내항에 대한 시민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1883개항살롱의 사업이기도 하다. 10월엔 초등생을 대상으로 내항 1·8부.. 2024. 7. 29.
신포 신흥동 파노라마 2018.3.3 신흥동 동원캐슬에서 본 신포 신흥동 파노라마- 출처 - 중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카페- 촬영 - 고 박영주님 2024. 7. 19.
고유섭과 인천 / 김병종의 화첩기행 52 김병종의 화첩紀行 / 고유섭과 인천朝鮮의 아름다움에 바친 영혼일제강점기 살면서 우리 美術史 연구학계에 연구인력 씨앗뿌린 주인공40여세 짧은 생애동안 名著 다수 남겨나는 지금 인천 자유공원 아래 중국인 동네인 청관(淸館)에 서 있다.서른해 전 우리는 이 근처 선린동의한 적산가옥에 살았다.여러 세대가함께 산 그‘마당 깊은 집’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문 앞에까지 짙은 해무(海霧)가 밀려와 있곤 했다.간혹 집을 흔들어놓는 무적(霧笛)에 놀라 아침잠을 깨기도 했다.그 기역자집 문간방에는 내 또래의 딸 하나를 데리고 중국인 남자가 살았는데 식당에나가던 그 사내는 가끔씩 냄비에 자장면을 담아와 우리짐에 건네 주곤했다.딸의 이름이 연화(蓮花)였는데기분이 좋은면“니예에엔”하고 연자를 중국음으로 길게 뽑아 부르다가도화가 .. 2024. 7. 5.
1882년에 맞은 한독수교조약 때의 사진 쇄국(鎻国)을 뚫은지 백년(百年)‥개화백경(開化百景)겨레의 애환(哀歓)을 엮는 특별연재(特別連載)5286년전(年前) 한복(韓服)과 양복(洋服)의 악수(握手)‥‥처음으로 공개(公開)되는 한말(韓末)의 공식외교사진(公式外交写真)두번째로 비공개(非公開)된 희귀사진을 입수,개화백경(開化百景)의 일경(一景)으로 삼는다.최초의 외교사진,대원군과 순종의평복차림의 사진등 공개된적이없는 사진들이다.이사진들은 육군사관학교박물관관장 이강칠중령(李康七中領)이 사료(史料)취재하러 일본에 갔다가연고기관및 연고인들이 간직하 고있는것을 수집,그 가운데서 비공개사진을 골라 고증(考証)한것이다.월미도(月尾島)가 보이는 둔덕에1882년에 맞은 한독수교조약때의 사진이 발견되었다.이 사진은한국에서 찍은 최초의 외교사진이며 1871년 미국의 .. 2024. 7. 5.
이름에 대하여.. 개화백경 51 이름 쇄국(鎖国)을 뚫은 지 백 년(百年)‥ / 개화백경(開化百景) / 겨레의 애환(哀歡)을 엮는 특별연재(特別連載) 51"여자(女子)이름 때문에 약(弱)해진 나라"한국(韓國)창씨(創氏)로 얼룩지면서도 고유사상(固有思想)은‥「꼬치미」라는 예쁘면서도 가난한 여명(女名)황제(皇帝)이름 본땄다 옥(獄)살이창씨(創氏) 1호‥‥송병준(宋秉畯)→야전평차랑(野田平次郎)◎감수(監修)해주시는 분들◇박종화(朴鍾和) ◇유봉영(劉鳳榮)◇이서구(李瑞求) ◇이은상(李殷相)◇함석헌(咸錫憲) 한국판(韓国版)오델로 박(朴)똥칠개수피아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할머니를 알고있다.사변후 경인여객 차속에서 구걸하던 거지할머니다. 예배당에서 지어준 이름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동네 숲 속에 버려진 불의의 사생아였다. 숲에서 주웠다고 하여「숲 .. 2024. 7. 5.
안경(眼鏡) / 「애체덕」본 목참판(穆参判) 안경(眼鏡) / 「애체덕」본 목참판(穆参判)잦았던 안경화(眼鏡禍)…왕외숙(王外叔)이 자살(自殺)도안경(眼鏡)이 빚은 한(韓)—일분규(日紛糾)1891년(고종26년)일본전권공사 대석정기(大石正己)가 고종을 알현하고자궁중에 들어왔다.궁중에서는 조그마한 소동이 벌어졌다.왜냐면 대석(大石)공사가 안경을 쓰고있기 때문이었다.연상의 어른을 뵙는데는 안경을 벗는게 예도인데 하물며 왕을뵙는데 안경을낀다는 것은 불손하기 이를데없기 때문이다.내시들은당시 통변인 현영운(玄暎運)을 통해 안경을 벗을것을 요구했지만 무슨뱃심인지 막무가내고 왕을 알현했다.고종도 여간 불쾌해하지 않았으나 외국사신에게는 비위를 거슬리게해서는 안된다는 왕의 모토에따라 아무일없이 알현은 마쳤다.한데 조정에서는 이를 문제삼지 않을수없어 일본정부에 나라를 얕.. 2024.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