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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考

아동문학가 모임 <꽃별회> 창립 멤버 박동석

by 형과니 2023. 5. 16.

아동문학가 모임 <꽃별회> 창립 멤버 박동석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문화예술인

2008-11-05 21:08:21

 

아동문학가 모임 <꽃별회> 창립 멤버 박동석

김윤식 / 시인·인천문협 회장

 

 

1102 꽃별회 1928,1.22 박동석

 

1927 1 19일자 동아일보에 “이달에 아동문학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꽃별회가 경성에서 창립되었는 바 동회원은 유도순(劉道順)(강서), 박동석(朴東石), 김도인(金道仁), 한형택(韓亨澤), 진종혁(秦宗爀)(이상 인천), 최병화(崔秉和), 안준식(安俊植) 강병국(姜炳國), 노수현(盧壽鉉), 주요한(朱耀翰), 양재응(梁在應), 염근수(廉根守)(이상 경성) 등이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이 모임의 전말은 자세하지 않으나, 인천 문인의 이름이 들어 있어 흥미롭다.

 

특히 김도인이나 진종혁은 인천 문학계에서의 활동이나 행적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어 친숙한데, 박동석과 한형택은 다소 낯선 감이 든다. 그 중에도 한형택은 당시 인천에서 극 연구와 공연을 목적으로 했던 연극 단체 <칠면구락부>의 한 멤버로, 같이 활동했던 고일(高逸)이 그의 저서 인천석금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박동석은 어느 기록에도 이름이 없다.

 

1927년 무렵이면 <칠면구락부>의 멤버들이 아주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고, 더군다나 그들과 함께 동인 활동을 그에 대한 어떤 내용이라도 한두 줄 남아 있을 법한데,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전혀 이름이 거명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인천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활동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대표적인 인천 이야기책의 하나인 인천석금과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그리고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조차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인천시사에도 역시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무슨 이유일까.

 

박동석1922. 2.3 박동석내리교회 강연

 

고일 선생이나 신 박사 같은 분들의 실수, 혹은 착각에 의한 누락일까. 오랫동안 거명이 금기됐던 월북자였을까. 아니면 너무 일찍 단명한 까닭에 그의 행적을 망각했던 것일까. 이 중 어떤 요인이 근래에 쓰인 시사에 그대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리고 말없이 산일(散逸)돼 간 자료 역시도 이런 암흑의 결말을 부추겼을 것이다.

 

아무튼 박동석은 아동문학 작품 몇편 우리 문단에, 우리 인천 문학계에 남기지 못했다. 아니, 분명 그의 행문 몇편은 어느 낡고 허름한 책갈피 속에 묻혀 아직도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사막 가운데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일이라 해도 박동석의 문학 업적을 발굴해 내는 일이 오늘 우리의 책무라는 생각이 든다.

 

박동석의 인천에서의 활약상은 아주 단편적으로 드러나 있다. 위에 말한 <꽃별회> 창립에 5년 앞서 그는 1922년 초 인천 내리교회 <의법청년회(懿法靑年會)>에서 활동한 기록이 보인다. 이 단체의 명칭은 <엡웟청년회>로 더널리 불렸는데, 그는 여기 토론회 연사로 첫 등장하는 것이다. 아마 그는 독실한 기독교 청년으로 사회 계몽운동에 적극 참가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인천의법토론회라는 제목이 붙은 이 청년회 토론 기사가 흥미로워 당시 신문 내용을 옮겨 본다.

 

인천 내리(內里) 야소교(耶蘇敎) 내 의법청년회에서는 해회(該會) 문학부 주최로 24일 오후 7시 내리 예배당에서 토론회를 개최한다는데 그 문제(問題)와 연사는 좌()와 같다더라.”는 기사 좌측에다 문제(問題) 즉 연제를 썼는데, 내용인즉 인류 향상에는 과학이냐 종교이냐이다. 그리고는 가편(可便) 연사에 박동석, 이상룡(李相龍), 부편(否便) 연사에 임영균(林榮均), 예종호(芮鍾昊)의 이름을 밝혀 놓았다. 주제 발표와 반대 토론을 했던 모양으로 가편, 부편이라고 해서 연사 이름을 밝힌 것이 재미있다.

 

1925.3.13신춘문예선외가작

 

이후 박동석에 관련한 기사로는 192412<내리의법청년회> 임원 개선 내용이 있다. 이때 박동석은 이 청년회 세 명의 서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는데, 문학부에서 서기부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싶다. 앞서 토론회의 기록은 내리100년사에 제목만 덩그러니 나와 있으나, 그나마 청년회 새 임원 명단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 계몽 활동과 더불어 박동석이 본격적으로 문학에 뛰어든 것은 1925,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요 이 선외가작으로 뽑히면서부터인 듯 하다. 이후 정식으로 다시 당선이 됐다거나 다른 관문을 통과했다거나 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이를 계기로 진우촌, 김도인 등과 문학적 교류를 트고 동인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은 그의 유일한 선외가작 입선 작품을 소개한다.

 

설이 왔다 설이 왔다

꼬까 입을 설이 왔다

꼬까 입고 새신 신고

앞집으로 세배 가니

절값으로 돈을 주데

 

저자거리 나와 보니

일본여자 풍선 팔고

호기야가 딱총 팔데

풍선 화닥 딱총 호득

절값 모두 까먹었네 , 1925

 

이 밖에는 1928년 여름 인천 출신으로 지난날 자유당 시절 공보처장을 지낸 갈홍기(葛弘基), 그리고 조대벽(趙大闢), 이달남(李達男) 등과 화도진교회 여름성경학교 교사로 활동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3년 뒤인 1931년 박동석은 인천의 부족한 보통학교 입학 정원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동구 화수동에 여명학원(黎明學院)을 설립하는데, 이로써 평소 그가 지니고 있던 사회 계몽가적, 교육자적 성향을 볼 수 있다.

 

925.3.13신춘문예선외가작

 

한편 서두에서 언급한 아동문학 모임인 <꽃별회>여류 명사들과 함께 1928<소녀시대사>라는 단체를 창립하기도 한다. ‘순전히 소녀에 관한 잡지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녀 전문지소녀시대의 발간을 계획했는데, 창간호가 나왔는지 또한 분명하지가 않다.

 

여기까지가 일부 언론에 드러난 박동석의 간단한 행적들이다. 그의 출생이나 몰년, 생장지, 수학(修學) 정도, 가계, 후손 등 어느 것에 대해서도 지금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이렇게 몇 가지 활동 기록은 보이나 유독 그의 이름만은 적막에 싸여 있는 것이다. 분명한 인천 사람 박동석의 이 깊은 어둠을 밝힐 길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