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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294

清舘 - 청관 清舘 - 청관 이 글이 나가게 될 25일은 바로 음력 설날이다. 요즘은설날이래야 별다른 감흥도 없이 넘어가는 평범한 명절이되고 말았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 맞던 설은 지금과는 딴판인 가슴이 설레는 큰 명절이었다. 때때옷을 입고 새 신을신는 날, 떡국과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 날, 어른을 뵙고 세배절을 올리고 예쁘다는 칭찬과 세뱃돈을 받는 날,아이들끼리 몰려다니며 실컷 노는 날. 일년에 한번 밖에 없는 꿈같은 날이었다. 어찌 기다려지지 않겠는가. 언제든지 필요할 때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요즘 어린이들에게는 상상조차 안되는 그러한 15일간이었다. 이뿐 아니라 仁川에서 자라던 어린이에게는 清舘의 설놀이라는 또 하나의 설잔치가 곁들여 있었다. 除夜놀이부터 시작해서 대보름날 元宵節에 끝나는 春節 15일간 淸.. 2024. 3. 11.
인천의 흘러간 옛 지명 이 글은 1982년1월4일부터 1983년 3월9일에 이르는동안 44회에 걸쳐 경인일보에 연재한 글을 모아 엮은 책 '인천 한세기'中 중의 하나이다. 흘러간 옛 지명 / 신 태범 - 인천 한세기中 요즘 텔레비죤에서 가끔 시청하게 되는 흘러간 옛 노래를본따서 흘러간 옛 지명이란 프로그램을 짜 보았다.지명은 사람이 모여 살면서부터 생겼을 것이고 세월과더불어 전승과 변화를 거듭했을 것이다. 농촌에서는 옛 지명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예가 많아도 도시에서는 완전히 잊혀졌거나 간혹 노인들 간에서나 쓰이고 있을 뿐이다. 인천에서도 文鶴,南洞,富平, 西串 등 36년과 40년에市域으로 편입된 新市內에는 아직도 옛부터 내려오는 자연부락이 남아 있으므로 옛 지명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것같다. 그러나 개항 후 1세기 밖에 .. 2024. 3. 11.
제물포개항의 현장을 바라 본 러시아인의 주관적,단편적 기록 러시아 장교 조선여행기 내가 본 조선조선인 中 조선의 현 상황에 대한 짧은기록 글쓴이 - 다데슈칼리안 공후 - 제물포는 황해로 흘러들어 가는 한강의 하구에서 멀지 않은 만의 해안에 위치해 있다. 1883년까지 이곳은 빈터였다. 거주하는 사람도 없었고 경작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일본인들이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인 서해안의 항구를 개항하라고 완강히 요구해 옴에 따라 조선의 조정은 한강 하구 근처에 크고 아름다운 항구가 들어서 있는 이 빈터를 그들에게 할당해 주었다. 일본인들은 서둘러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현재 제물포에는 80가호에 1,000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고을이 형성되었다. 최근에 개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물포는 무역 거래에서 부산을 능가하게 되었다. 가장 부유한 지방인 강원도 평.. 2024. 1. 15.
채미전거리 채미전거리 - 인천한세기 / 신태범 1982년 6월 5일자 京仁 7면에 '인천의 名所——開港이래 시장의 효시「참외전거리」가 없어진다’는 제목으로동인천역 ~숭의동간 1.9km 의 도로가 1985년까지에 30~35m 로 확장된다는 지사가 실려 있었다. 6·25 동란 후 참외 시장이 사라진 이래 그래도 남아 있던 참외전거리라는 이름마저 이제 없어지게 된 모양이다. 이 거리는 동인천역에서 배다리 철로문을 통해 金谷洞 昌榮洞 松林洞으로, 청과회사 쪽으로 뚫린 샛길을 통해 龍洞 京洞 栗木洞 柳洞 그리고 배다리를 지나 桃源洞 崇義洞에 이르는 중요한 간선도로다. 1900 년에 京仁철도가 개통한 후 한국인 거주지역에서 杻峴역 (현 동인천)을 왕래하기 위해 생긴 길이었다. 당시 철로 양편은 논과 미나리밭이었다고 한다. 많.. 2024. 1. 6.
흘러간 옛 지명 흘러간 옛 지명 / 신태범 - 인천 한세기 요즘 텔레비죤에서 가끔 시청하게 되는 흘러간 옛 노래를 본따서 흘러간 옛 지명이란 프로그램을 짜 보았다. 지명은 사람이 모여 살면서부터 생겼을 것이고 세월과 더불어 전승과 변화를 거듭했을 것이다. 농촌에서는 옛 지명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예가 많아도 도시에서는 완전히 잊혔거나 간혹 노인들 간에서나 쓰이고 있을 뿐이다. 인천에서도 文鶴,南洞,富平, 西串 등 36년과 40년에 市域으로 편입된 新市內에는 아직도 예부터 내려오는 자연부락이 남아 있으므로 옛 지명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개항 후 1세기 밖에 안되면서도 변동이 대단한 구시내에서는 우리 선대들이 즐겨 사용하던 지명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거나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다. 지명의 기원이 되었던 .. 2023. 11. 23.
성채같은 전도관 성채같은 전도관 숭의동하면 자연스럽게 ‘109번지’가 따라 붙는다. 그 동네는 한때 거칠기로 유명했다. 사람은 밟고 있는 땅을 닮는다고 했던가. 쇠뿔고개, 황골고개라는 거친 옛 이름을 가진 이 동네는 지형만큼이나 거칠기로 소문났었다. 창영동 등 아랫동네 아이들은 그곳에 가기를꺼렸다. 109번지는 흔히 옛 전도관 구역을 말한다. 전도관은 한때 인천의 랜드마크였다. 산꼭대기에 성채처럼 우뚝 솟아 있어 인천의 웬만한 곳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의 주인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맨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알렌이다. 선교사이자 의사로서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그는 1890년 고종황제의 땅 옆에 여름 별장을 지었다. 둥근 타워의 돔을 곁들인 2층 별장이었다. 1907년 알렌은 미국으로 귀국했고 그.. 2023.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