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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

‘인천 아리랑’을 부르던 부두

by 형과니 2023. 5. 22.

인천 아리랑을 부르던 부두

仁川愛/인천이야기

2009-03-18 21:01:15

 

갯바람 물씬 풍기던 부둣가

 

인천항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다. 근대적 의미의 항구라고 할 수는 없어도 지금의 연수구 동춘동에 있던 능허대는 그 옛날의 대중국 무역항이요, 영종도의 경원정은 보기 드문 객관(客館)으로서 당당히 존재했던 것이니 만만치 않은 역사다.

 

·조우성 (시인ㆍ인천시 시사편찬위원)

 

 

인천 아리랑을 부르던 부두

 

개항 이후 인천에는 동·서양인 물론 전국 팔도 사람들과 물화(物貨)들이 밀려들었고 그에 따라 일자리도 크게 늘었다. 전체 인구의 9할이 농사에 종사했지만 호구지책이 난망했던 시절, 인천에는 일자리가 하루가 멀게 생겼던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된 인천 러쉬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인천 인구 유입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전국 팔도에서 너도 나도 새로운 땅 인천으로 이주해 왔으니 이 나라의 고질적 토착병 같았던 지방색(地方色)’이 인천에서만은 있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인천은 비류 이래 제 삶을 새로 살기 위해 전국 각처에서 이주해 온 개척자들의 땅이 되었고 그 같은 진취성과 지방색을 초월한 포용성이 인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크게 작용해 왔던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일자리가 무한정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당수의 이주자들은 항구 도시라는 특성상 바다에 연관해 삶을 꾸려가지 않으면 안 됐다. 들고나는 물화는 한정돼 있으나 목도꾼은 넘쳐나 생존 경쟁이 가속화됐던 것인데, 설상가상 일본인들의 조선인 착취도 날이 갈수록 간교하고 심화돼 갔다.

 

그 시절, 그 같은 애환을 반영한 민요에 인천 아리랑이 있다. 이 노래는 인천 출신의 국문학자인 허경진 교수(연세대)가 미 하버드 대 옌칭 도서관에서 찾아내 국내에 소개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천 제물포 모두 살기 좋아도/왜인(倭人) 위세에 난 못 살겠네 흥//에구 대구 흥/단 둘이만 사자나/에구 대구 흥 성하로다 흥//아리랑 아라랑 아라리오/아라랑 알션 아라리아//산도 싫고 물도 싫고/누굴 바라고 여기 왔나//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아라랑 알션 아라리라//

 

그 무렵 부둣가의 정서를 소박하게 드러낸 인천 아리랑의 채록 연대가 1894년으로 돼 있는 것을 보면 선대들이 칠통마당이라 불렀던 곳이 배경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일본인들의 위세에 눌려 칠통마당이라 했던 부두는 일반적으로 선창(船艙)’이라 불렸었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인천에서는 묘하게도 우리말 부두(埠頭)와 왜식 용어인 선창(船艙)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미군이 사용하던 군사용 부두는 줄곧 찰리 부두등으로 일컬었던 데 반해 지금의 인천역 뒤의 배다리와 어시장(魚市場) 일대는 누구나 선창이라 불렀던 것이다.

 

60년대 선창은 풍물화

 

선창은 한 마디로 60년대적 풍물화였다. 양산을 받쳐 들고 모처럼 어시장 나들이를 한 것 같은 부인네들, 생선짝을 힘겹게 지고 가는 지게꾼, 낮잠에 빠진 리어카 꾼, 조기, 갈치, 고등어 몇 손이 전부인 좌판 아주머니들, 배를 허옇게 드러내놓고 있는 크고 작은 어선들이 어우러진 것이 그 무렵 선창의 풍광이었다.

 

그런가 하면 냄새와 소리도 강렬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옷에 속속들이 밸 것만 같은 생선 썩은 내,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길, 짭조름한 바닷물이 늘 홍건이 고여 있던 어시장 등과 높다란 양철지붕 제빙공장에서 흘러나오는 둔탁한 기계음, “생산 사려!”를 외치는 행상들의 쉰 목소리, 한염(韓鹽) 해운의 기다란 소금 컨베어 벨트 소리, 하루 종일 지친 기색도 없이 공중무(空中舞)를 추고 있는 갈매기 떼의 울음소리도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지금까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알이 통통 밴 조기, 한 길 가까이 되는 민어, 엄지가위를 쩍쩍 벌리며 위협하던 왕꽃게, 양철 도라이에서 펄떡펄떡 튀어 오르던 숭어가 지천으로 널리고 그를 팔고 사며 에누리하던 인정들의 환한 모습들이다.

 

추억속으로 사라진 선창

 

선창이 우리 곁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30여 년 전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군용 부두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던 게 선창이었다. 한여름 밤 선창에 정박 중인 어선과 어선 사이를 누비며 뱀장어 낚시를 하던 게 예사였는데, 안보(安保)를 이유로 선창 일대에 담장을 둘러 바다와 시민을 격리시키더니 급기야는 배다리와 어시장, 공판장 등을 폐쇄하고 말았다.

 

하인천 선창은 그렇게 어느 날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선창뿐만이 아니라 내항 전면 독(Dock)화 사업으로 선창에 정박하던 고깃배들도 선수를 새 매립지에 조성한 연안부두로 돌려야 했고, 어시장도 연안부두 허허벌판에 새로 만들었었다. 그 후 삶의 애환이 서려있던 선창일대는 일반인은 얼씬도 못하는 금단의 지역으로 남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경제 논리를 앞세워 시민들에게서 부두(바다)를 앗아간 사건이었다.

 

그것이 시민들의 정서적 삶이나 실생활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끼쳤느냐를 조사 연구한 논문은 한 편도 없는 실정이지만 부두의 상실이 궁극적으로 인천사람들의 정체성 형성에 좋지 않은 기제로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바다를 가로막아 올린 경제적 수익이 그간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아아, 굉이부리, 소래포구, 북성포구

 

그로부터 인천사람들은 항구 도시에 살면서도 옛 부둣가의 정취, 너른 바다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삭막한 현실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항구도시 특유의 정서는 잊혀질 리 없었고, 그리하여 사람들은 아직 갈매기 울음소리가 추억처럼 머리 위를 맴도는 만석동 굉이부리, 북성포구와 소래포구 등지를 찾아 발걸음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굉이부리나 북성포구는 개발의 바람이 닿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여서 아는 이들끼리 소리 소문 없이 찾아들었고, 관광지로 발돋움한 소래포구는 높다란 협궤 철교와 등허리를 드러내는 갯골들, 싱싱한 해물들과 고깃배들, 가을철의 젓갈류 등을 찾는 남녀노소의 나들이길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인천 최초의 부두였던 선창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설상가상으로 도시공동화현상까지 가속화돼 항구 도시로서의 면모를 느끼고 생활화할 수 있는 친수공간은커녕 우리 고장이 항구도시라는 정체적 관념까지 희박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인천항은 태풍도 피해 가는, 우리나라에서 가강 안전한 항구이자 국토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 관문항이요, 위치상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동북아의 허브(Hub) 항인 것이다. 그렇듯 바다를 빼고는 존재 가치조차 말할 수 없는 항구도시인 것이다.

 

바다를 살리고, 그 특유의 정서를 되살려 우리의 삶 속에 부활시키는 일이야말로 인천적 정서와 정체성을 찾는 길이다. 동서의 미래학자들이 지적한 바처럼 세계의 중심이 동북아로 옮겨지고 있는 21세기 벽두다. 우리는 바다와 친수공간으로서의 부두를 부활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세계인들이 모여들고 물화(物貨)가 넘치는 흥성스러운 동북아의 허브, 세계의 허브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