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의염전이야기

최병관의 추억속의 염전(12 - 20 최종회)

by 형과니 2023. 3. 13.

최병관의 추억속의 염전(12 - 20 최종회)

인천의문화/최병관의 추억의 염전

2007-01-25 01:31:17


최병관의 추억속의 염전(12 - 20 최종회)

 어느 날 아랫집에 사는 달리기 잘하는 ‘병오’의 꾐에 넘어가 누런 닭 알 한 개를 슬쩍해서 엿을 바꿔 함께 맛있게 먹었다. 설령 아버지가 아시면, 한 마리가 병이 나서 알을 못 낳았다고 할 판이었다. 무사히 하루가 넘어가길 빌고 또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저녁상 앞에서 어느 놈이 알 하나를 먹어치웠느냐고 이실직고 하라는 것이었다.


매일매일 둥지에서 알 꺼내는 일은 내 몫이었기 때문에 화살이 나에게 올 것은 뻔한데 그 생각을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눈치를 챈 어머니가 옆에서 “오늘은 한 마리가 알을 낳지 않았는데 왜 그러우” 하셨다. 아버지는 곧바로 “닭은 거짓말을 안 해, 필경 병관이놈이 엿 바꿔먹은 것이 틀림없어.”


가뜩이나 아버지가 무서워 한여름 밤에도 휘파람조차 마음대로 불지 못하는 나로서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밤에 휘파람 부는 놈들은 상놈이나 하는 짓이라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아니라 차라리 호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낳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두 번 한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그 날은 어머니의 간곡한 말씀 덕에 어렵게 위기를 면했지만,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계속>

 1994년1월21일 作

 

 

최병관의 추억속의 염전(13)

  어린시절, 아버지가 염전에 다니는 집 애들의 점심 도시락은 새우젓을 살짝 넣고 찐 노르스름한 계란을 허구한 날 싸왔다. 그러나 나는 소풍 갈 때나 찐 계란 하나 겨우 맛볼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애들이 그토록 부러울 수가 없었다.
공부를 지지리 못해도 부잣집 아이들에게는 선생님들도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을 했다. 조금만 더 크면 염전에 꼭 취직을 하고야 말거라고.


한 아이는 아버지가 염전에서 번질번질하게 살이 오른 누런 황소로 소금을 운반하는 일을 했다. 그 애의 점심은 늘 쌀밥에 찐 계란이었다. 비록 그 아이는 수·우·미·양·가에서 양·가로 통지표를 채웠지만 늘 의기양양 했다. 아버지가 염전에 다니는 것과 황소를 자랑하며 뽐내는 것밖에 모르는 아이었지만, 아무도 그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을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때만해도 황소 1마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잣집으로 소문이 나는 시절이었기에, 아버지가 누런 황소로 염전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양·가로 통하는 그 아이로서는 공부 따위는 아랑곳없이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계속>

사진설명-1991년 6월20일 作

 

 

최병관의 추억속의 염전(14)

 아버지가 끔찍이도 애지중지 하던 누런 암탉 1마리를 잡아서 빗자루로 정성스럽게 쓸어내리시더니,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갖고 오신 빨간 비단 보자기에 닭을 싸아 안겨주시며 따라오라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궁금했지만 무조건 시키는 대로 닭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아버지 뒤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


해가 넘어가고 보름달이 집 울타리 감나무에 걸려서 환하게 초가집을 비추었다. 닭장에 들어가 1마리를 잡으려고 할 때 서로 잡히지 않으려고 푸드득 푸드득 꼬꼬댁 하며 도망 다니다가 결국 재수 없는 놈이 잡혀서 어디론가 끌려간다는 생각을 하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남아 있는 씨암탉 2마리와 수탉 1마리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면서 놀라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는 나를 빠끔히 쳐다보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왜 그토록 아끼던 씨암탉을 비단보자기에 정성스럽게 쌓아서 어디론가 가져가는지 얼마 후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남동염전에 다니는 김 감독님 네 집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염전에서 감독직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책이었다. 감독은 염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염부들을 관리하고 염전 일을 지도하는 직책이었다. <계속>
 
 1994년 4월28일 作

 

 

최병관의 추억속의 염전(15)

 아버지는 남동염전의 김 감독님을 안다는 것만으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셨다. 늘 그를 치켜세우며, 일년에 한두 번 명절에나 맛볼 수 있는 처마 밑에 걸어놓은 조기를 얼씬도 못하게 하시다가는 김 감독님의 생일은 어찌 그리 정확하게 아시는지 생일 선물로 드렸다. 그럴 때마다 그 심부름은 나의 몫이었다.


어느 날인가 담배 가루를 신문종이에 말아서 연기를 내뿜으시며, “둘째 놈이 중학교만 마치면 염전에 취직을 시켜야지” 하시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김 감독님 네 집 대문 앞에서 헛기침을 두 번 하시더니 “감독님 계십니까? 저 왔소이다.”
 평시에는 그토록 무서운 아버지이건만 나이도 아래인 김 감독님 앞에서는 늘 존댓말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당장이라도 염전에 염부로 취직을 해서 감독이 되고 싶었다. 오른쪽 팔에 ‘감독’이라고 쓴 완장을 차고 염전을 한 바퀴 돌면 곳곳에서 염부들과 잡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조아리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 완장이 차고 싶어서 한 살 아래인 김 감독님 셋째 아들에게 온갖 감언이설로 꾀어 아버지 완장을 한 번만 차 보자고 했지만 매 번 헛수고를 할 뿐이었다. <계속>
 
 사진-1993년 3월23일 作

 

 

최병관의 추억속의 염전(16)

 비단보자기를 풀어서 아버지는 씨암탉 한 마리를 김 감독님에게 건네 주셨다. 마침 그 날이 김 감독님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가 지난 뒤에 “감독님 이제 우리 둘째 놈이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서 염전에 조수라도 취직을 시킬까 해서요?”


 김 감독님은 아무 대답이 없이 한참 무었을 생각하는 듯 하다가는 “아드님은 아직 어리고, 또 잘 아시겠지만 워낙 힘겨운 일이어서 체격 좋은 장사만 뽑아 염부로 채용하는데….”


 이미 작정을 하고 온 아버지가 그 말에 물러설 리가 없었다. 나는 방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 볼 뿐이었다. 아버지는 큰 기침을 한 번 하시고는 “우리 둘째 놈은 성품도 착할 뿐만 아니라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웬만한 장사만큼 힘이 세서 염전일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철없는 나는 제발 형이 염전에 취직이 되길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형 이름을 빌어서 뽐내고 싶을 뿐만 아니라 쌀밥도 먹을 수가 있으며, 형이 감독이 되면 그토록 차고 싶어 하던 ‘완장’을 차고, 통지표에 양·가만 수두룩 해도, 아버지가 누런 황소로 염전에서 일한다는 것만으로 뽐내는 아이에게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생각으로 가슴이 마구 뛰었다. <계속>
 
 사진설명-1996년 8월26일 作

 

최병관의 추억속의 염전(17)

김 감독님은 결국 아버지의 끈질긴 성화에 둘째 형님을 염부 조수로 채용 할 것을 승낙 했다. 아버지는 그때서야 허리춤에 차고 계시던 파이프를 잎에 무시고는 담배 연기를 뿜어 대셨다.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불러서 염전에 취직이 되었으니 열심히 일하면 ‘염부장’으로 진급도 시켜 줄 것이고, 또 월급을 받아서 저축을 하면 필히 부자가 뒬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형님은 눈물을 글썽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날 밤 어머니는 잠을 못 주무시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새벽녘에 닭이 울고 나서야 부엌으로 나가셨다. 그러나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 밤중에 부엌문을 열고 계셨다.


아침 밥상 앞에서 어머니는 “저 어린 것을 어쩌자고 그 힘든 염전에 취직을 시켰단 말입니까. 김 감독님에게 없었던 일로 다시 말씀 하세요.” 어머니가 아버지 말씀에 반기를 든 것은 처음이기에 모두 긴장이 되었다. 아버지 말씀은 명령이요 실천이며 누구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호령이 떨어졌다. “사내놈 그 나이면 천하를 움켜쥘 수 있는 기백이 있거늘 어찌 나이가 어리다고 한단 말이오.” 지붕이 날아갈 것 같은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계속>

 

최병관의 추억속의 염전(18)

 형님은 어린나이에 ‘남동염전,’ 염부의 조수로 취직을 했다. ‘소래역’에서 수인선 철길을 따라 40여 분을 걸어가면 광활하게 펼쳐진 반듯반듯한 염전에는 보석처럼 눈부신 하얀 소금더미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형님이 염전으로 출근을 하는 날부터 어머니는 명절 때나 맛볼 수 있는 하얀 쌀밥을 찌그러진 양은 도시락 두 개에 꾹꾹 눌러서 검은 광목보자기에 싸주시면서 “부지런히 걸어가 형에게 전해주고 오너라!”고 하셨다. 

 

필자는 신명이 났다. 단숨에 염전으로 달려가 형님이 염부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염전에서 제일 나이 어린 형님이 수차에 올라가 바닷물을 퍼 올릴 때는 곡예단에 온 듯 착각에 빠졌다. 형님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쉼 없이 흘러내리지만, 윈지 그런 형님이 멋지고 자랑스러웠다.


 점심시간이 되어 하얀 쌀밥 보자기를 풀자마자, 형님은 아무 말 없이 도시락 하나를 필자에게 건네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철없는 필자는 날름 받아서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넌 집에 와서 점심을 먹도록 해라. 하나는 점심이고 하나는 새참이니까···.” 빈 도시락 두 개를 들고 오면서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염전일은 노동 중에도 제일 힘겨운 노동이기에 장정들도 하루에 새참을 세 번씩 먹으면서 일을 했다. 

 

필자가 도시락 하나를 먹어치워서 형님이 굶는다는 것을 며칠이 지난 뒤에야 알 수가 있었다. 그 이후로 눈만 뜨면 형님이 첫 월급을 타는 날 ‘검정운동화’, ‘하모니카’를 사주기로 했던 약속을 꼭 지켜야한다는 말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계속)

 

하모니카 감동 마음속에 새겨
최병관의 추억 속의 염전-19

1986년 8월 17일作
  형님이 염전에 취직을 해서 한 달 월급을 받기도 전에 결국 필자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장사들도 힘겨운 60키로나 되는 소금가마니를 어깨에 메고 괴조차(가시롱차)에 쌓는 일을 하다가는 갯골에 떨어져서 병원으로 실려 간 것이다. 병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어머니는 차창 쪽을 바라보시면서 하얀 광목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계속 훔치고 계셨다.


  병원에 도착한 필자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형님의 부상정도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감독완장’을 차본다는 꿈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형님의 새참을 단숨에 먹어치운 지난날들이 후회스러웠다. 철없는 동생에게 말없이 도시락을 건네준 고마움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필자는 병원 계단에 앉아 처음으로 형님을 위해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병원에서 빨리 퇴원을 해서 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형님이 염전에 취직이 되던 날 그토록 좋아했던 것이 모두 잘못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이 생각보다는 회복이 빨라서 건강하게 퇴원하는 날 , 형님은 느닷없이 집 뒤 오봉산으로 올라가자고 제의 했다. 절룩거리며 형님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 정상 위에서 고향마을을 바라보이는 쪽으로 앉았다. 형님은 주머니에서 번득거리는 하모니카를 꺼내더니 멋지게 한 곡 불고는 “이건 네 꺼야” 했다. 그 순간 꿈을 꾼 듯 몽롱했다. 찢어지게 가난했기에 새 하모니카는 고사하고, 이빨 빠진 고물 하모니카만이라도 갖고 싶은 것이 필자의 소망이었다. 번득이는 새 하모니카를 형님에게서 받아들고 얼마나 많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때의 격한 감동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있다.(계속)

 

 

소래염전 생태공원으로 되길
최병관의 추억속의 염전(20)

2003년 11월 20일作


 고향사람들의 추억과 애환이 가득했던 인천의 염전이 하나 둘 사라지고 난 후, ‘소래염전’만이 잡초에 묻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소금으로 가득 했던 ‘검은목조창고’는 썩어가고 있다. 그나마 다행히 남동구에서 염전의 일부를 생태공원으로 복원, 교육용으로 소량의 천일염을 생산하고 있다. 그곳에는 끊임없이 학생들이 견학을 와서 진지한 모습으로 소금생산 과정을 교육 받고 간다. 또한 자연 체험을 통하여 아이들의 심성을 올곧게 지도하는데도 큰 성과가 있다고 한다. 마땅히 갈 곳 없는 인천의 유일한 휴식처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동구에서 ‘소래염전’을 어렵게 ‘생태공원’으로 조성을 해나가는 마당에 ‘건교부’에서 느닷없이 임대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결정은 지역주민의 한결같은 소망을 져버린 잘못 된 결과이다. ‘소래염전’에 임대아파트를 건설해서 주택난을 해소하겠다고 하지만, 현재 건설하고 있거나 예정인 아파트가 완공되면 인천의 주택보급률은 128%가 넘는다. 또한 ‘논현지구’, ‘도림지구’의 임대아파트가 몇 년째 분양이 되지 않는 마당에 그 지역에 또다시 임대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발상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어렵다.


 자연은 한 번 훼손하면 복구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인천의 도시 녹지공간은 전국에서 꼴찌요, 이젠 마음 놓고 숨도 쉴 수 없는 공해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건교부’의 계획이 합리적이고 지역주민의 의견을 반영해서 인천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드는 계획이라면 구태여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박수를 보낼 일이다. 가뜩이나 삭막해가는 도심 속에서 그나마 ‘소래염전’을 또다시 콘크리트 숲으로 덮어버리는 우매한 ‘건교부’가 되어선 안된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쉼터를 빼앗아 간다면 삶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이나 다를바 없다. ‘소래염전’을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생태공원’으로 만들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끝)
 --------------------
 사진-2003년 1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