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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전망차

제물포의 사교클럽

by 형과니 2023. 4. 11.

제물포의 사교클럽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7-06-26 16:10:36


제물포의 사교클럽


제물포는 인천해안의 옛 이름이다. 중구 항동 일대 포구를 제물포라고 했다. 이 이름은 조선초부터 이곳에 있던 수군 기지 제물량에서 비롯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그곳을 인천군 서쪽 15리에 있다고 했다.

제물이란 뜻을 혹 향토학자들은 ‘제수’ 곧 ‘물을 다스린다’로 해석하면서 조수의 차이가 심하여 때맞춰 배를 대기가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포구였던 만큼 ‘물을 건넌다’는 뜻으로 濟(제)는 ‘건넌다’요 物(물)은 바닷물의 물을 소리나는 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제물포는 지금 경인전철 한 역의 이름으로 남아있지만 개항 당시 외국인들에게 인천은 제물포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몇년 전만 해도 인천 근교의 노인들은 인천을 제밀이라고 했었다. 일제의 굴레에서 해방되던 직후에도 한때 인천을 제물포시라고 했었다.

그러면 당시 우리나라를 찾아온 서양인들은 제물포를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우선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은인 허버트는 ‘대한제국멸망사’에서 외국인촌의 가파른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 경치가 매력 있다고 했다. 코리언스케치를 쓴 게일 선교사도 만국기가 펄럭이는 외국인촌이 평화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고종 황제의 고문관을 지낸 미국인 샌즈는 그의 ‘조선의 마지막날’에서 나라의 관문 치고는 별 매력이 없는 곳이라고 쓰고 있다. 해안에 돌출한 헐벗은 구릉에는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1907년 우리나라를 취재한 런던 데일리메일의 맥캔지도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급수문제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썼다.

그 시절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 장소로 사용된 건물이 오늘날 송학동 1가 11번지 자유공원 경내의 중구문화원 건물 바로 그곳이다. 1901년 건물을 낙성하고 제물포구락부회관이라고 했는데 제물포구락부란 인천에 거주하던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인 등으로 발족한 사교클럽이었다.

회관 내부에는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 등이 있었고 별도의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고 한다. 지난 19일 역사적 건물이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새단장 개관했다고 한다.

#중구 #제물포구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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