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장의 매봉산지역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4 19:48:12
1. 매봉산 중심의 생활 터전
1883년 1월 1일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인천의 중심지가 제물포로 자리잡게 되자 그 때까지 천 여년 동안 인천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었던 인천읍(현 관교동)과 부평읍 지역(현 계산동)은 자연히 한적한 시골 변두리로 전락하고 제물포 지역은 새로운 항구도시로 급격한 발전을 거듭하여 여러 나라 외국 영사관이 설치되고 외국인 무역상이 자리잡으면서 수도의 관문이자 구한말 우리 나라 정치, 경제, 군사,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우리 나라 개화의 선구지가 된 고장이다.
1) 개항전의 제물포
이곳은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삼남지방의 세곡을 운반하던 중요한 해상 교통로가 되었고, 조선조 초기에는 남양부 화양만에 경기수영을 두고 경기만을 수비하기 위해 산하에 영종만호, 제물포량만호 등 여섯 개 진을 두었는데, 당시 인천에는 제물포량에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인조 7년 1629년 정묘호란이 생기자 강화 지역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경기수영이 남양에서 월곶진으로 옮겨 가고, 병자호란 후인 효종 4년 1653년에는 남양에 있던 영종만호가 인천 앞 자연도로 이전하게 되었으며, 효종 7년 1656년에는 성포창(제물포)에 주둔하던 인천 제물포량만호 마저 강화로 이전해 가게 되자 제물포는 한적한 어촌이 되고 말았다. 그 후 구한말에는 병인, 신미양요에 이어 왜인들의 개항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5년 1878년8월27일 이곳 제물포에 어영대장 신정회로 하여금 화도진을 설치하게하여 그 산하에 괭이부리포대, 제물포포대, 북성포대와 논현포대를 두어 연안 방위의 중심지로 다시 부상하기도 했으나 개항이 되면서 이곳 방위 시설물은 모두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으며 더욱 고종 31년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제가 개편되면서 화도진도 해체되고 말았다. 이처럼 제물포 항구는 구한말 이전까지는 인적이 매우 드문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2) 반도 지역 제물포
개항 당시에는 제물포 지역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반도를 이루고 있었다. 서쪽과 남쪽은 긴 해안으로 이어져 넓은 바다와 면해있고 특히, 북쪽 해안은 괭이부리로부터 인천교에 이르는 넓은 갯골이 있었다. 이 갯골은 현 주안산업단지인 옛 주안 염전이 있던 넓은 지역이 모두 바닷물이 드나드는 넓은 만을 이루고 이 만이 갯골로 이어져 동암역 남쪽 철로 굴다리 밑을 지나 약사사의 개울과 이어지고, 또 한 줄기는 주안역 뒤 도화동 한복판을 지나 제물포역 뒤 '도마다리'로 이어져 수봉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과 연결되고 있으니 이 갯골이 내륙에 깊숙이 이어져 제물포 지역은 지형상 하나의 반도를 이루었다.
3) 매봉산(응봉산)
오늘날 자유공원이라 불려지고 있는 매봉산(응봉산)은 예부터 제물포 지역의 주산이다. 이 산은 우리 나라 최초의 현대식 공원이 생긴 곳으로도 유명하여 개화기에는 외국인들이 살던 조계지역으로 인천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이 산에서 매일 정오를 알리는 대포를 쏘았기 때문에 오포산이라 불려지기도 했다. 6.25전까지만 해도 국립기상대가 있어 우리 나라 일기예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 제물포 지형을 살펴보면 제물포의 중심부를 이룬 매봉산(자유공원)은 별로 높지는 않지만(81.6m) 그 산줄기가 남북으로 펼쳐져 나지막한 여러 봉우리와 구릉을 이루고 있다.
북쪽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만석동, 화수동, 화평동, 송현동의 생활터전이 되고 ,동쪽으로 뻗은 줄기는 내동, 송월동, 싸리재 경동, 율목동을 거쳐 도원산에 이르고 도원동에서 다시 북으로 뻗어 쇠뿔고개에서 동쪽과 북쪽으로 갈라져 한 줄기는 도원동(옛 전도관이 있던 산)에서 선인학원(동산)을 거쳐 나지막한 능선을 이루면서 주안산업단지와 도화동을 남북으로 가르는 경계가 되었고, 다시 쇠뿔고개에서 또 한줄기가 북쪽으로 향해 금곡동, 송림동 만수산과 이어지면서 수도국산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제물포 지역은 매봉산을 주산으로 이어진 여러 산과 골짜기에 개항 이후 새로운 행활터전이 개척되었던 것이다.
4) 수문통 갯골
이 지역은 해안을 삼면으로 끼고 있어 갯골이 산골짜기 깊숙이 이어진 곳이 많다. 그중에도 송현동 수문통 갯골은 인천 시가지의 중심부 깊숙이 이어져 이곳 향토 생활에 끼친 영향이 참으로 컸다. 괭이부리로부터 대우중공업, 동국제강, 인천제철 지역은 원래 바다를 매립하여 생긴 땅이다. 이 지역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넓은 갯벌과 갈대밭 저지대로써 갯골이 길게 이어져 동인천 역 뒤를 지나 창영동 파출소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이 갯골은 배가 드나들 수 있어서 밀물 때에는 해산물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물건을 실은 작은 배들이 배다리 철로문 앞까지 드나들었기 때문에 '배다리'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 갯골에서 밀물을 기다리는 작은 배를 볼 수 있었다.
1892년 고종 29년 서울에 있던 '전의국'인 조폐창이 인천 현 인천여고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역시 동전을 찍어내는 무거운 주조기를 비롯한 많은 시설을 운반할 수 있는 육로 교통이 없어서 배를 이용했다고 한다. 한강을 거쳐 강화수로를 통해 이곳 송현동 갯골로 운반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배가 많이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다.
개항후 일본인들이 송현동 갯벌 저지대를 매립하여 택지를 조성하고 수로를 만들어 이 갯골은 수문통 수로라 불려지기도 했다. 이 수로를 주위에 집이 들어서고 상점이 자리잡으면서 송현동에서 송림동, 배다리로 이어지는 긴 수로변은 야시장(1930년대) 거리로 번창하기도 했다.(동인천역 뒷편 현 자유시장) 이 곳을 송림동, 화수동, 창영동, 화평동, 율목동, 송현동으로 둘러 싸인 옛 한인촌의중심이자 배가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에 자연 발생적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해방 후에는 상가가 더욱 번창하였고 6.25에도 인천 상가의 중심지로 자리 잡으면서 1960년대 후반에는 이 배다리 수로를 복개하고 현대식 상가를 세워 자유시장으로 더욱 발전하고 있다. 이처럼 배다리 시장으로 불려져 온 자유시장은 인천 시민의 애정이 담긴 역사의 뿌리가 깊은 시장으로 인천 시민이 가꾸고 키워온 생활터전이 되었다.
5) 행정구역
구한말 인천부는 산하에 10개면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매봉산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 제물포 지역은 인천부 다소면(多所面)에 속했다. 원래 다소면은현 중구, 동구, 남구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으나 제물포지역은 다소면의 선창리, 고잔리, 송림리에 장천리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선창리 : 현 중구(중앙, 신포, 내동, 신흥, 인현, 율목동)
고잔리 : 송월, 만석, 화수, 화평동
송림리 : 송림, 송현, 창영, 금곡동
1903년 8월 광무 7년 인천 제물포 지역만 관리하는 부내면이 새로 생겨 율목동에 부내면 사무소가 개설되었다. 또한, 개항 당시부터 외국인들의 영사관을 설치하고 외국인들만 모여 살던 조계지역이 따로 있어 그들의 자치구가 운영되기도 했다.
1895년 고종32년 갑오개혁으로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개항장인 제물포는 인천부가 되고 제물포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모두 부천군이 되기도 했다.
그 후 1914년 인천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부천군이 되자 인천부는 개항장인 현 중구와 동구 지역으로 축소되었고, 그후 시세가 커지고 발전하게 되자 인천부는 계속 주변 지역을 편입시켜 다음과 같이 시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1914. 9. 1 부천군 영종면에 속했던 월미도 편입
1936. 10. 1 부천군 다주면, 문학면 편입
1940. 4. 1 문학 남동 서곶 지역 편입
1943. 1. 1 작약도 인천 편입
6) 개항과 감리서
인천이 개항된 것은 고종 20년 1883년 1월 1일이었으나 실질적으로 개항이 이루어진 것은 6월경이라고 한다. 인적이 드물고 한적했던 포구에 일본인을 선두로 외국인의 왕래가 시작되고 상품이 들어오게 되자 인천항의 통상 업무를 취급할 새로운 관청이 생기게 되었다.
1883년 8월 19일 감리인천항 통상사무에 조병직이 임명되었으며, 내동(옛 법원자리)에 감리서가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인천항의 통상 업무를 주로 다루었으나, 1884년 4월 1일 제2대 감리 홍순학이 부임하면서 1885년 5월 29일 관교동에 있던 인천 부사는 폐지되고 인천감리가 부사 업무를 겸직하게 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감리서가 잠시 폐지되기도 했으나 1896년 1월 18일 다시 부활되면서 인천부윤이 모든 행정을 관장하고 인천관내 각국조계를 비롯하여 항내 통상 업무는 물론 새로 생긴 경부서(경찰서)와 인천재판소를 모두 그 산하에 두게 되었다.
2. 도서 지역의 생활 터전
1) 월미도와 소월미도
월미도는 인천항 남쪽 해상 약 1km 지점에 위치한 섬이고, 소월미도는 월미도 남동 끝에서 약 600m 지점에 있던 섬이다. 그러나 현재 이 두 섬지역은 모두 그 중간 지점이 매립되어 육지로 되었으며 그 한 가운데에 '도크' 내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설치되어 있다.
월미도란 이름은 이 섬이 마치 반달 꼬리 모양으로 가늘게 휘어 졌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월미도는 구한말 수도의 관문인 서해를 방위하는 매우 중요한 섬으로 부상되었고, 인천이 개항된 후에는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고종 16년(1878)에는 외국의 군함이 자주 나타나는 인천 앞바다와 강화 수로에 이르는 해로를 지키기 위해 화도진을 설치하고 그 지휘하에 논현포대, 월미포대, 북성포대, 괭이포대를 두어 방위를 튼튼히 하였다. 이때 월미포대는 월미산 정상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1) 월미행궁
숙종 초에(1680) 인천부사 '윤격'이 월미도에 비밀리 행궁을 지었다. 행궁이란 임금님이 나들이 할 때 잠시 머무는 객관과 같은 용도로 사용된 곳으로써, 월미도에 행궁을 세우게 된 것은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임금이 비밀리 강화도로 피신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열기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강화로 피신하려다 호군이 강화로 가는 길을 미리알고 길을 막아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인조 임금이 무릎을 끓는 치욕적인 일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김포-강화 이외의 비밀로를 인천 월미행궁에서 배로 강화에 이르는 길을 마련하게 된 것이라 한다. 실지로 활용된 적은 없고 월미행궁은 고종때 폐쇄되었다고 한다.
위치 : 오림포스호텔 맞은 편 월미산 정상 바로 아래라 한다. 일설에 의하면 옛 '임해사' 절터가 있던 곳이라고도 한다.
규모 : 목조 기와집으로 정절 8간을 비록해 7동 28간이었다고 한다.
(2) 월미도 예포
월미도 정상에 포대를 설치하고 인천항에 들어오거나 나가는 각국 선박을 위해 예포를 쏘아 우의를 다지기도 했다.
1902년 8월 14일 월미도 정상에 야포 두 대를 설치 9월 15일부터 예포를 운영 약 4년간 9월 15일부터 예포를 운영 약 4년간 실시하였다.
1906년 8월 1일 폐지하였다.
(3) 여러 나라의 연료 저탄장
개항 이후 월미도는 외국인들이 몰려 들어 석탄, 석유와 같은 연료 저장고로 이용하게 되었다. 맨 먼저 청국이 1890년 월미도남쪽 해안에 석탄 저장고를 설치하여 인천항에 출입하는 선박의연료를 공급하여 사업이 번창하자, 1906년에는 러시아가 월미도에 1만 여평의 땅을 차지 석탄을 저장하고 1891년에는 일본 해군의 석탄 저장 시설을 하는가 하면 1896년에는 미국의 '스탠다드'석유회사가 월미도 북쪽 해안에 석유창고를 설치 경인 지역은물론 전국에 석유를 판매하게 되었다.
(4) 일본의 군사 기지
고종 31년(1894) 6월 황해 '동도' 앞바다에서 청나라와 일본 군함이 충돌하여, 일본군에 의해 청나라 군함이 격침되는 사건이 청일전쟁으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광무 8년(1904) 2월 9일 또다시 월미도 앞바다에서 러시아와 일본 군함이 해전을 벌여, 러시아 군함 두 척이 침몰 일본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군은 월미도에 있던 청*러 두 나라의 저탄장을 접수하고, 또한 월미도를 일본군의 군사 기지화하였다.
병참기지를 설치하고 병원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광무 6년(1902)에는 월미도 정상에 해군 무선국을 설치하였다.
소월미도에는 일본군용 측후소도 설치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월미도에 거주하는 월미도 주민을 몰아내는 말썽을 피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1903년 6월 소월미도에 동대가 설치되었다.
(5) 향만검역소
1887년 월미도 남쪽에 검역소가 설치되어 외국인들의 출입으로 여러 가지 예상되는 전염병 예방에 힘썼다. 1911년 3월 17일에는 월미도 해안으로 인천검역소를 새로 이전 설치 인천항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검역을 실시하였다.
(6) 월미도 다리
월미도가 석탄 석유와 같은 연료와 군사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철도가 필요하여 육지쪽(구 세관앞)에서 월미도까지 1km의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는(1904) 교각을 세워 주로 목재를 이용한 다리였다고 한다. 1922년에는 기존의 다리를 철거하고 석축으로 연육교를 새로 만들었다.
대한제분 정문 앞쪽에서 월미도까지 차가 다닐 수 있게 가운데 차선을 두고 양 옆으로 인도가 있는 비교적 젋은 다리로 만조시에 바닷물이 출렁이는 연육교를 걸어보면 마치 바다속을 걷는 것 같은 멋진 낭만의 산책길이 되어 시민들에게 많이 애용되었으며, 특히 달밤에 걷는 연육교는 더욱 더 환상적이었다고 한다.
(7) 월미도 공원
월미도를 한바퀴 도는 도로가 조성되고 월미산 정상에 오르는 나선형 도로가 만들어졌다. 식물원, 사슴 사육장이 설치되고 1937년 호텔, 해수욕장, 월미조탕, 용궁각 등이 새로 들어서면서 월미도는 유원지로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2) 영종(영종도)
영종은 원래 인천도호부에 속한 '자연도'라 불렀는데 1653(효종 4년) 영종진이 되면서 영종도가 되었다. 1895년 영종진이 폐지되었고 1914년 3월 1일부터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영종면은 중산리, 운북리, 운남리, 운서리 4개 리로 개편되어 오다가 1973년 7월 1일 웅진군이 되었고, 1989년 1월 1일에는 인천광역시에 편입되면서 영종면은 없어지고 4개 동으로 되었다.
(1) 자연도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쓴 '고려도경'이란 책에 의하면 자연도란 '경원정' 동편 작은 언덕에 많은 제비가 날아드는 데서 생긴 이름이라고 했다.
자연도에 사람이 정착해 살게 된 시기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주변 여러 도서지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개 신석기시대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된 것 같다.
(2) 주민의 이주
고려 고종 18년(1231) 8월 몽고군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이곳 자연도는 '창주' 고을 주민들의 집단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또한 서주 방영이 자연도에 이주하여 왔다가 원종 2년(1262)에 되돌아간 기록이 있다.
(3) 경원정
자연도는 고려 중기 송나라로 가는 남로 항로의 중간 기착지로 송나라 사신들이 쉬어가는 객관인 경원정이 있었다고 한다. 남로 항로는 고려 문종 때(1073) 개경에서 예성강 자연도, 마도(해미 서쪽해안), 고군산도, 흑산도, 강남의 명주로 이어지는 해로를개설하고, 각 기착지마다 객관을 설치 운영하였다고 한다.
경원정은 대평암 즉 구읍 동쪽 해안에 세었다고 전하는데 아깝게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최근 가천문화재단이 경원정 터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영종도 중산 1리 29의 5일대에서 도자기 조각과 기와 조각을 발견함으로써 경원정의 옛터를 확인한 바 있다.
(4) 국영 목장
조선조 세종 18년(1436) 8월 국영목장이 설치되어 고종 21년까지 약 400여년 동안 이곳에 목장이 운영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자연도와 삼목도에 국영 목장이 세워져 358필의 말을 방목하였다고 한다. 당시 자연도는 말을 돌보는 목부, 수군, 염부 등 30호 정도가 있었다고 하며 세종 20년(1438)부터 자연도 감목관은 인천부사가 겸직하였다고 한다.
(5) 영종진
인천에 있던제물진이 강화로 옮기고 화성 남양에 주둔하던 영종진이 자연도로 이전하여 자리를 잡게 되면서 섬 이름도 영종도라 불려졌다. 영종진은 효종 4년에(1653) 설치되었으며, 효종 9년(1659)에는 방어영으로 승격되어 근 200 여년 이어져 내려오다 고종 32년(1895) 폐쇄되었다. 영종진은 숙종 31년(1705) 교동 수영에 속했으나 영조 34년(1758)어영청 소속 방어사를 두면서 독립된 청이 되었다.
고종5년(1868) 4월 25일 독일 '그레타'함이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의 보복 구실로, 아산만의 대원군 부친의 묘를 도굴하다 실패 한 후 영종도에 상륙한 사건이 있엇다. 이때 영종첨사'신효철'이 이들을 물리쳐 공을 세웠다. 고종 12년(1875) 8월 일본 군함 운양호의 영종진 포격으로, 영종진이 파괴되고 기능이 마비되자 영종진은 인천 방어영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구한말 수도의 관문인 영종도는 군사상 그 중요성이 날로 증가되어, 고종 14년(1877) 새로 부임한 '양주성'첨사는 영종진을재복구하여 방어영 본관 동헌, 내아, 객사, 창고 중영 등 14개 건물들이 새로 지어졌다.(현 운남동 중*고등학교 학교부지 터)
(6) 만세교
지금의 영종포구는 고려시대 경원정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영종진이 있던 섬으로, 자연도인 본섬과 갯골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두 섬이 분리되어 있어서 여러 가지로 불편함이 많았는데 300 여년 전 두 섬을 연결하는 연육교를 놓기 위해 두 차례 공사가 있었다. 1649년 1차 공사 때는 주민들이 육교를 만들었으나 바닷물로 부서졌고, 다시 현종 4년(1663)에 영종만호인'남득하'와 용궁사의 주지 '해명'스님이 경기도 관내 승병을 동원 석축을 쌓아 연육교를 완성하였으니 이 다리를 만세교라 한다.
(7) 금광
영종도는 금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1919년 영종의 '김성근'은 금맥을 발견 80만평의 광산권을 얻어 금을 캐어 갑부가 되니 여러 일본인들까지 몰려와 금광을 개발하여 거금을 벌었다고 전한다. 통광리는 금광이 맨 처음 생긴 곳이며 금골이라 불려지고 있다.
(8) 우리 나라 최초의 우유 목장
구한말 일본인들이 몰려와서 영종에 우유 목장을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허가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곳에 사는 황석원, 이치명과 손을 잡고 영종도에 10만여평의 땅을 매입 젖소와 양돈, 양계를 할 수 있는 근대적인 목장을 우리 나라 최초로 세웠다. 그러나 크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고 한다.
3) 용유도(용유동)
용유도는원래 인천도호부에 속해 있었으나 1653년 영종진이 설치되면서 영종진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영종진이 폐지되면서 다시 인천부가 되었고 1914년 3월 1일에는 '부천군'용우면이 되었으나 1973년 7월 1일에는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1일부터는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이 되었다. 용유동은 주도인 용유도와 대무의도, 소무의도, 팔미도 4개섬과 실미도, 안도, 사렴도, 잠진도, 대매도랑도, 소매도랑도, 해녀도등 7개의 무인도로 되어 있다.
(1) 희종의 유배
고려 희종 7년(1211) 무인정치 최충헌이 정건을 잡게 되자 희종을 폐위하여 유배시킨 곳이 용유도라고 한다. 최충헌은 '희종'을 처음에는 강화도로 보냈다가 자연도에 살게 하였으나 최충헌이 죽자 그 아들 '최우'가 '희종'을 불러 개경에 살게 하였는데, 고종 14년(1227) 희종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터져서 다시 강화 교동으로 유배되었고, 그 후 용유에서 살다가 고종 24년 8월 용유'법천정사'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2) 조천대
조천대는 용유 왕산 포구(을왕리)에 있었다고 한다. 신라, 고려시대에 조천대는 중국을 왕래하던 길목으로 중극으로 가는 사신들이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조천대란 천자에게 조공을 바치러 가는 관청이랑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3) 이동휘 투사의 은신
이동휘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초대 군무총장, 국무총리를 역임한 애국자요, 앙일토쟁에 몸 바쳐온 독립투사다. 구한말 무관학교를 나와 참령을 지낸 이동휘는 광무 6년(1902) 이준, 민영환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하여 개화운동을 하였으며, 의병을 일으켜 투쟁 계획을 추진하다 동지들의 체포로 할 수 없이 몸을 피하여, 이동휘는 현 용유면 무의도로 숨어들어 3년간 은신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 지사는 무의도에 은신하는 동안에도 섬 주민의 교화운동에 힘썼다고 전하는데 이때 부살펴 준 분이 '차태옥'씨라고 한다.
(4) 국영 목장
세종 18년부터 황해 여러 섬에 국영 목장을 운영하면서 용유도, 무의도에 목장이 개설되어 400 여 년간 운영되었다고 한다.
세종 10년(1428) 무의도 국영 목장 설치
세종 13년(1431) 용유도 국영 목장 설치
고종 20년 용유, 무의 목장이 영종진 소속 목장이 되었다.
고종 21년 용유, 무의 목장이 폐쇄되었다.
조선시대 용유, 무의도목장의 실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