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장의 인천객주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4 19:50:11
인천객주회(仁川客主會)는 인천 최초의 민간상인 조합이다. 개화기 인천이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자리잡으면서 상술이 앞선 서양 무역상들과 일본인들의 악랄한 경제 침략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천의 객주들은 이들과 대항하고 경쟁하며 굳건히 우리의 생활터전을 지켜왔다. 인천객주회는 '인천 신상협회'의 모체가 되었고 '인천조선인산업회의소'로 이어져 오늘날 '인천상공회의소'로 그 맥을 이어 온 인천의 자랑스런 상공업 분야의 개척자요, 근대화를 이끈 기수로서 인천 개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천의 뿌리다.
1. 각국의 상인 단체
오랫동안 우리 나라의 종주권을 주장해 온 청국인들은 개항 초기에도 정치, 경제 등 여러 면에서 우리 정부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초기 일본인들은 무역관계 등 여러 면에서 청국과 불편한 관계를 갖고 도한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인들의 진출은 날로 늘어났고 1883년 11월에는 일본 제일은행 인천지점이 개설되는 등 일본인들의 세는 계속 확장되었다.1885년 10월에 이르러 일본 상인들은 '인천항 일본인 상법회의소'를 결성하여 그들의 상권을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맞서서 청국인들도 1884년에 인천중화회관에 청국 상인들의 상업회의소를 결성하고 그들의 상권을 지키며 상세를 확장하니 경쟁은 더욱 가열되었다.그뿐 아니라 자본주의 상술로 무장된 서구 무역상들이 각종 이권을 파고드는 등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된 개항장에서 우리의 민족 상인들은 또한 새로운 상술에 눈을 뜨면서 우리의 생존권을 지키고자 조직한 단체가 바로 인천객주조합이다.
2. 객주회
◀ 인천객주회 인천객주회는 1995년(고종 22년) '혜상공국'의 허가를 받아 조직되었다. 객주회는 민족 자본이 단결하여 외국 상인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일본상법회의소'와 대항한 우리 나라 근대 상업을 이끌어 온 인천의 자랑스런 선구자적인 집단이다. 1) 객주회의 활동객주회는 민족 상인의 상권을 옹호하며 회원들에게 각종 상업정보를 제공하고 회원들의 자본을 한데 묶어 회사를 설립하도록 돕고 일본 상인들의 불법 행위를 규탄하고 고발하며, 정부에 상거래 개혁의 방향을 건의하는 등 근대 상업 활동의 기반 조성에 큰 몫을 했다.
2) 객주와 여각 (1) 보부상 보부상과 객주, 여각은 구한말 우리 나라 상거래의 전통적 조직이었다. 18세기 말 우리 나라에는 약 1,060 여개의 향시(鄕市)가 있었는데 이러한 상거래장에 일용품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보부상들이 맡아했다. 옛부터 장날은 한 달에 6회 5일 간격으로 열렸는데 보부상들은 장날에 각 지역의 향시를 찾아 장터를 순회하면서 일용 생활품을 팔러 다니는 짐꾼 장사들이었다. 이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경제 유통의 중계자로 활약이 매우 컸다.
(2) 상거래 중계지객주와 여각은 각 지방에 퍼져있는 향시와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가 되는 포구에 자리잡고 지방의 특산물을 수집하여 보부상에게 넘겨주고, 하주의 상품을 보관하거나 운송하며 숙박과 음식점을 겸하는 상거래 중계지 역할을 했다. '객주'는 주로 금, 은, 직물, 종이 등을 취급했고 '여각'은 곡물, 우피, 과실 등을 다루기 때문에 창고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3) 개항장의 역할 이러한 객주와 여각들은 개항장인 인천이나 부산에 몰려들어 근대적인 상술을 익히고, 거상으로 자라면서 새로운 상인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개항장에서 외국 상인들과 지방 상인들의 상거래 중개역을 맡고, 상품을 보관하고 위탁 판매도 하며 어음 할인 등 상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독자적인 상회를 창업하기도 했다.
3. 인천 신상협회
인천 신상협회(仁川 紳商協會)는 1896년 1월에 결성됐다. 객주회를 모체로 하여 새롭게 출발한 이 협회는 1895년 11월 10일 공포된 우리 나라 최초의 '상무회의 소규례' 법률 제 17호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규례는 당시 인천을 비롯해 부산, 원산, 한성, 목포 등 여러 개항장에 조직되어 있던 단체를 정부가 총괄하기 위해 재정되었던 관계로 이 규례에 의해 새롭게 출발한 신상협회는 객주회보다 더 조직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그 후 신상협회는 이름이 변경되어 1889년에 신상회사로, 1911년에는 다시 신상협회라 불려지기도 했다. 이처럼 신상협회는 인천지방의 유지와 관료 출신이 참여했다. 발기를 주도한 인천 감리 서상준, 제령학교를 설립한 서상빈 등 여러 유지와 객주 등 50 여 명의 회원으로 출발했다.
1) 회의 운영 회원에 대한 회비를 받았다.
회원은 찬성금 5원을 내야 한다.
협회를 통해 영업을 하고자 하는 회원은 300원의 찬성금을 받았다.
특히 회원의 벌칙 규정이 있어 회칙이 엄했다.
회원의 비위, 물품 매매 부정, 외국인과 암거래. 세금 지연 등의 벌칙을 정했다.
2) 협회 활동
정부를 대신해서 영업세를 객주들로부터 년 2회(6월, 11월) 징수하였다.
우리 상인들이 외국 상인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보호했다.
우리 민족을 깨우치고 힘을 기르기 위해 육영 사업을 지원했다.
경축일에 태극기를 집집마다 게양하도록 하고 지역의 각종 행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3) 일본의 횡포와 투쟁인천 신상협회는 횡포가 심했던 일본인 계림장업단의 비행을 규탄하고 정부에 그 단체의 해산을 강력히 건의하여 원성이 높았던 계림장업단을 해체시켰다. 1896년에 결성된 일인 계림장업단은 군복을 입고 무기를 휴대하며 폭력적으로 상거래를 하며 상인들을 괴롭히고 우리 민족의 상권을 짓밟고 민족 자본을 말살시키려 했다. 인천 신상협회는 이 폭력적인 집단의 진상을 전국의 민족 상인들에게 폭로하고 민족 저항 운동을 펼쳐 그들을 해산시키는 공을 세웠다
4) 일본의 불법은행권 배척1902년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일본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여 사용하게 되자 인천 상인들은 전국 민족 상인들과 힘을 모아 일본의 불법 화폐 사용 배척운동을 전개하여 이를 제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상협회는 일본인들의 경제 침략에 대항하는 조직적인 단체로 큰 활약을 해왔으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우리의 주권이 무너지면서 인천 신상협회는 해산되고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가 새로 설립되었다. 이렇게 되자 객주들도 별도의 인천객주단합소를 조직하여 동업 단체의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고, 그 후 1917년에 이르러 인천물산객주조합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어 객주 업계를 이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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