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개신교와성공회가들어온곳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4 19:53:06
개화기 제물포는 서구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서구 문호가 일찍 자리잡은 개화의 고장이요, 개신교 그리고 성공회가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온 고장이기도 하다. 초창기 선교 활동을 위해 이 고장에 들어온 종교인들을 살펴보면, 한국 감리교를 개척한 '아펜셀로' 목사 부부를 비롯하여 '언더우드' 목사, '스크랜톤' 박사, '헬리릭스' 목사, '리클' 목사들 그리고 성공회를 개척한 '고요한' 주교, '레오나르위너', '줄리어스', '와일스' 외과의사 그리고 '엘리마 랜디스' 의사 선교사들을 시작으로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들어온 것 같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갔으나 특히 감리교회의 '아펜셀러' 목사와 성공회의 '랜디스'는 이 고장의 자리를 잡고 개화기 인천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이 매우 컸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인천에 현대식 교육을 보급하였고 현대식 병원을 개설하여 질병으로 고생하던 많은 환자를 돌보는 등 훌륭한 업적은 남겼다. 이처럼 제물포는 개신교와 성공회가 최초로 선교 활동의 뿌리는 내린 고장이다.
1.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
우리 고장 인천 중구 내동에 자리잡은 내리교회는 우리 나라 감리교회 중 가장 먼저 창립된 교회라고 한다. 내리교회사에 의하면 1885년 7월 19일 '아펜셀러'가 인천 내리교회를 창립했다고 하였으니 내리교회는 110여년의 긴 역사를 지닌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교회이기도 하다. 이 교회는 개화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기독교 단체 활동을 통해 지역 주민을 계몽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며 항일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는 등 우리 인천 향토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매우 컸다고 한다.
특히 1892년 내리교회에서 설립한 영화학당은 우리 나라 초등교육 기관의 효시로서 개화기 인천 지역의 유능한 인재를 배출한 인천 교육의 뿌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내리교회는 개화기 인천 주민들에게 새로운 서구 문명에 눈을 뜨게 하는 등 정신 개화에도 큰 몫을 했다고 생각이 된다.
1) 영화학당
개화기 내리교회가 우리 지역 사회에 공헌한 업적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일은 바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초등교육 기관을 설치한 업적이라고 생각된다. 이 학교는 제2대 목사로 부임한 존스(G. H Jones : 우리 나라 이름 조원시) 목사 부처에 의해 1892년 3월 12일 내리교회 내에 있는 사택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학생 한 명으로 시작했으나 그 후 학생이 5명으로 늘어나면서 영화학당이라 이름 짓고 존스부인과 '최혜렌'이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2) 영화여학교
1894년에 학교 건물 6간을 새로 마련하게 되었고 학생들도 계속 늘어 70여명(남 50, 여 20)에 이르게 되었다. 학생들이 계속 늘어남에 다라 남녀를 별도로 분리해서 가르쳐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897년에 이르러 영화학당은 남녀 학생을 분리하여 새로 영화 여학교를 만들고 '존스'부인이 전적으로 이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후 영화여학교는 창영동 현 위치로 이전하여 오늘날 영화여자실업고등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영화학교
영화학교는 여학생을 분리한 후 남자 학교로 발전하였고 1903년에는 구한국 정부로부터 소학교령에 따라 사립 영화학교로 인가를 받고 새로운 모습의 신교육 제도에 따라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04년 미국인의 지원으로 벽돌 단충교사를 신축하였고, 1905년 영화학교 제1회 졸업생 17명을 배출하게 되었다. 1907년에는 학교를 2층으로 증축하여 시설을 늘리고 고등과를 병설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 학교에서는 고등과 학생들에게 군대 훈련을 실시하는 등 개화기 인천지역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넓히고, 애국심을 불어넣는 등, 민족 교육에도 힘을 기울여 왔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 많은 공립 초등학교가 생기면서 사립 영화학교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고, 1970년에는 이르러 마침내 개교 78년만에 애석하게도 우리 나라 초등교육의 효시인 영화초등학교는 문을 닫고 말았다. 그 후 샛별학교로 부활하여 현재 영화초등학교로 계승되고 있다.
4) 하와이 이민 개척과 내리교회
개화기 제물포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 시작한 이민 사업의 개척지이기도 하다. 1902년에 시작되었던 하와이 이민은 내리교회의 조원시(G. H Jones) 목사에 의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하와이 설탕회사에서는 사탕 옥수수밭에서 일할 노무자가 필요하여, 한국 정부에 이민 노무자 고용을 정식으로 요청해 옴에 따라 이민 문제가 정부 차원에서 검토되었다. 이민 사업을 전담할 수 있는 기관인 '수민원'이 설립되어, 이 수민원을 통해 이민 모집을 실제로 맡아서 할 수 있는 회사를 물색하여 동아개발사를 지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회사는 이민 모집을 데슬러(D. W. Deshler)라는 미국 사람에게 의뢰하였는데 이민 모집이 의외로 잘 진척이 되지 않자 여러 가지 고심 끝에, '레슬러'는 결국 조원시 목사에게 이민 모집의 협조를 요청하게 되었고, 조원시 목사는 내리교회 교인들에게 이민을 권유하여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5) 최초의 이민
우리 나라 최초의 하와이 이민은 주로 내리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02명(희망자 121명중 신체검사 합격자만 이민 허용)이 1902년 12월 22일 미국상선 게릭호(S. S. Gaelic)편으로, 제물포항을 출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였다고 하다.
6) 신민회 조직
1차 이민의 대다수가 내리교회 교인 등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선교사 '홍승하'를 비롯한 전도사들이 같이 동행했다고 한다. 1903년 8월 7일 이민간 내리교회인들은 낯선 곳에서 서로 의지하고 결속하기 위한 애국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선교사로 파송된 홍승하를 회장으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이 신민회는 후일 미주를 중심으로한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한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7) 한국 최초의 해외 지교회
1903년 11월 10일에는 이민간 땅에서 내리교회인들이 중심이 되어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는 결국 해외에 설립된 최초의 내리교회 지회인 동시에 한국 교회가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2. 우리 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공회는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제물포를 통해 우리 나라 최초의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890년 9월 29일 한국 초대 성공회 주교인 고요한(Bishop John Corfe)일행 여섯 명이 제물포에 들어온 후, 선교 활동을 통해 인천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이 매우 컸다고 한다. 특히 성공회는 이 지역에 '성누가병원'을 세우고 인천지역 주민에게 발달된 서양 의술로 많은 사람들을 질병에서 구해 지역 주민의 생명을 지켜 준 의료 선교 활동은, 시민 모두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1) 의료 선교사 랜디스
인천에 들어온 성공회 '고요한' 주교와 개척 선교사들은 제물포를 거쳐 서울로 들어가고 랜디스(Eli Barr Landis)는 인천 지역에 정착하여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다. '랜디스'는 1888년에 미국 펜실바니아 의대를 졸업하고 전문의 과정을 마친 후 20대의 젊은 의사로서 곧바로 한국 선교 활동에 참여하여 제물포에 들어왔다고 한다. 랜디스는 1890년 10월 10일 제물포에 들어온지 한 달도 못된 짧은 기간에 큰 집을 세로 얻어 진찰실과 입원실을 마련하고 환자를 돌보기 시작하였으니, 랜디스는 인천 최초의 서구식 병원을 연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2) 인천 최초의 영어학교
랜디스는 의료 활동에 전념하면서 1891년 2월 1일에는 인천 최초의 영어학교를 개설하였다. 4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낮에는 의료 활동을 하고 밤에는 다시 영어학교에 나와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주 6회 강의를 하면서 또한 매주 주일에는 영어 성경반을 운영하면서 선교 활동을 하는 등 조금도 쉴 사이 없이 자기 건강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인 봉사를 해왔다고 한다.
3) 인천 최초의 고아원
1892년에는 부모를 잃은 여섯 살난 고아를 데려다 같이 보살피는 일을 시작으로 인천 최초의 고아원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니, 랜디스는 이처럼 인천을 위해 의료활동을 비롯한 다방면의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불철주야 선교활동에 전념하다가, 1898년 인천에 온지 8년만에 애석하게도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으니 32세의 꽃같은 생애를 이국 땅에서 아깝게 마쳤다. 랜디스는 우리 인천 시민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은인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 같다. 현재 인천시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외롭게 잠들고 있다.
4) 성누가병원
1891년 10월 성공회에서 개원한 성누가병원은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의 효시가 되었다. 당시 제물포 주민들은 이 병원을 약대인 병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약대인이란 랜디스에 대한 존칭으로 불려진 이름인데 랜디스가 환자를 돌보는 병원이란 뜻에서 자연히 그 병원마저도 약대인 병원이라 불려졌으며 심지어 병원이 자리잡았던 현 성공회 주위 산언덕을 가리켜 약대인산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이처럼 랜디스는 어떤 어려운 병도 신통하게 잘 고쳐 주는 명의로서 당시 주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개화 당시 의료 시설이 절대 부족했던 제물포 주민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 병을 고치고자 자연히 약대인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이 몰려들었고 랜디스는 이들 환자를 돌보기에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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