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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옹진군 각 지역의 생활터전

by 형과니 2023. 3. 10.

옹진군 각 지역의 생활터전

인천의관광/인천의섬

 

2007-01-14 19:59:21

 

 

 

1. 북도면

 

북도면은 장봉도, 신도, 시도, 모도의 4개 유인도와 아염도, 사염도, 서염도, 모도, 말못도, 나가지도, 말도, 서만도, 암여도 등 9개의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1) 선사유물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업지만 대개 기원전 700년경부터 300년에 이르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들어와 산 것 같다. 이 지역에 대한 선사시대 유적 조사는 1916년 일본인들의 조사와 1957년 국립박물관 조사, 1966년 서울대 고고학과에서 시굴조사에 이어 1970416~428일까지 그리고 동년 811~816일까지 2차에 걸쳐 국립박물관 조사로 신석기시대 패총 3군데(시도1지구, 시도3지구), 원삼국시대 패총 1(시도), 신석기시대 적성총 1기를 발굴했다. (시도 신석기시대의 분묘).

 

2) 연혁

 

장봉도 : 기원4세기는 백제, 5세기에는 고구려, 6세기에는 신라에 속해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 장봉도는 강화현, 진강현에 속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북도면 지역이 강화도호부에 속해 있었고, 그 후 장봉도는 진강현에, 신도와 시도는 강화도호부에 속해있었다.

현종 9(1668)에는 북도 전체가 강화도호부에 소속되었다.

숙종 43(1717)에 장봉도는 교동의 수군통어영에 속하면서 수군 만호가 있었다.

 

3) 국영 목장 설치

 

조선초기 강화도호부에 속한 장봉, 신도, 시도, 모도에 국영 목장이 설치되면서 목장에 속한 둔전은 초지진 검사겸 감목관의 관할이 되었다. 장봉도 목장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소를 전문적으로 사육하는 국영 목장이었으나 임진왜란 전후로 마목장으로 변하였고, 숙종 4(1678) 영종진의 신불도 목장이 폐쇄되면서 신불도의 목마도는 장봉도로 합쳤다고 하며 1895년 경에는 감목관을 비록해 목자 16, 군두1명이 있었으나, 1896년 경 목장이 폐지되었다고 한다. 신도 목장이 설치된 시기는 정확히 알수 는 없지만 세종 16(1434) 흑마와 색마를 특별히 길렀던 국영 목장이라고 한다.

 

영조 39(1763) 초지만호가 첨사로 되면서 신도목장의 감목관을 겸했으나 신도목장은 1896년 폐쇄되었다. 시도와 모도 또한 목장이 있었으나 1872년 경에는 다같이 양을 사육하는 양목장이 되었고, 1871년 경부터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면서 강화주변의 해상 방위 강화를 위해 470명의 수군과 2척의 전선화포가 배치되어 1895년까지 중요한 구실을 했다.

 

 

 

2. 송림면

 

송림면은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2개 유인도와 4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1) 선사유적

 

이 지역에 대한 1968년과 19822차에 걸친 선사 유적.유물의 발굴조사 결과 연평도 지역은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1968525일 시작된 1차 지표조사 결과 대연평도 남쪽해안에서 5군데의 패총이 발견되었고, 신석시시대 토기파편300여점을 비롯한 고석편암으로 만든 어망추 등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의 빗살무늬는 해주시 용당포 패총 출토 토기와 같은 계통이라 한다.

 

198223~ 8일까지의 2차 조사에서는 대연평도, 모이도, 당도 등지에서 16군데의 패총을 발견 조사하여 신석기시대 토기 파편 179접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당도와 대연평도의 패총을 제외하고 대부분 신석기 말기인 BC 2000~BC1000 으로 추측되고 있다. 연평도에서는 청동기시대(BC1000~BC3000) 의 지석묘가 발견되었으며 원삼국시대의 경질무문토기도 출토되는 등 선사시대로부터 원삼국시대(AD300)에 이르는 생활 흔적이 찾아지고 있다.

 

2) 연 혁

 

연평도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이 적어 확실한 역사적인 뿌리를 알 수는 없지만, '고려사 지맂'에 의하면 연평도는 안서도호부에 소속되었다고 하며 선조 10(1093) 서해도 관찰사가 임금에게 연평도에 순검군이 해적 1척을 나포했다고 보고한 기록이 있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연평도 순검군이 왜선 1척을 잡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연평도가 해주목의 관할하에 있었다고 한다. 1938년 해주부에 벽성군이 새로 생기면서 연평도는 벽성군에 편입되었다.

 

3) 연평도의 어업

 

연평도는 청어와 조기가 유명하다. 조선시대 해주목 관할에 4개의 어전(어량과 같음) 이 있었는데 연평어전도 그 중의 하나로 주산물은 청어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부터 청어가 사라졌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기가 연평도에서 많이 잡힌다고 했다. 5~6 월경이면 각처에서 조기잡이를 위해 많은 어선들이 모여 왔으며, 관에서는 어선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였다고 한다.

 

4) 임경업 장군 사당

 

연평도 산 9번지 언덕에는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흥민사가 있다. 고기잡이를 나갈 때 반드시 어부들이 임경업 장군 사당에 참배를 하며, 신년이나 명절에는 이 사당에 풍어제를 지낸다고 한다.

 

5) 연평봉수대

 

대연평도의 봉화재에 봉수대가 있다. '여지도지'에서는 18세기에 설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연평도 봉수대는 의주를 출발하여 서해안을 따라 수압도 봉수대에 전달된 것을 용매로 봉수대로 전달하여 서울 모악 서봉에 이어주는 직봉 역할을 하였다.

 

 

3. 백령면

 

백령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1981~1982에 걸친 패총의 조사 발굴된 유물로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사람이 살게 된 것 같다.

 

1) 선사시대 유물

 

이곳 진촌의 말등패총과 용기포의 용기패총 발굴 조사 내용을 살펴보면, '말등패총'에서는 빗살무늬 토기편, 타제 및 마제돌도끼, 연석봉(맷돌) 골편이 발견되었고, '용기패총'에서는 빗살무늬 토기편, 마제돌도끼 등이 발굴되었다. 이들 유물은 신석기 시대 말기인 3000년 전의 것으로 추측된다. 이속 유물의 특징은 농경 도구로 사용된 타제돌도끼나 곡식을 빻는데 사용되는 '연석봉'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어업 뿐 아니라 농업이 중요 생계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또한 초기 청동기시대로 짐작되는 '환상파수'가 부착된 흑도장갱아(항아리), 화분형 토기편이 '진촌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황해도신천군 명사리에서 발굴된 유물 계통과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에서 살던 초기 백령 nals은 평남이나 황해도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연 혁

 

'신중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령도는 고구려가 4게기초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킨 후 고구려 지역이 되었으며, 당시에 는 '혹도' (따오기섬)이라 불렸다고 한다. '대동여지도'에서는 경덕왕 16년에 폭지군(해주)의 관할이었으며 신라시대 당나라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중간 기항지로 이용되어 왔으며 (한반도 -발해만- 산둥반도), 신라 진성여왕때 는 백령도를 '골대도'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지리지'에서 고려는 '호도''백령'으로 고치고 ''을 설치하였다. 현종 9(1018)에는 이곳에 진장을 두었다. 이처럼 백령은 신라와 고려시대로부터 해상을 방어하는 중요한 섬으로 부상된 것 같다. 문종 5(1015)에 백령에 화재가 발생 28칸이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정종 9(1043) 에도 성곽이 불탔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에는 당시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에도 진촌에는 토성지가 남아 있다고 한다. 공민왕 6(1357) 백령진은 문화현 동촌으로 옮겼다고 한다. 백령에는 왜구의 치입이 잦아 ''을 비롯해 주민도 내륙지방인 문화현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조에는 백령은 장연군에 속해 조선중기까지 내려왔다. 광해군 1(1608) 백령도에 거진을 설치하고 수군첨절제가를 파견하면서 장연현에서 독립하였다. 이때 백경진은 풍천의 '광암포 수군만호영'과 장연 '아랑포 수군만호영' 그리고 대청도, 소청도의 주변 도서를 관할하였다. 1895년 백령도는 장연군에 속하게 되었고 그 후 197471일 백령면이 되었다.

 

3) 고려시대의 유배지

 

고려시대에는 유배지로도 이용되어 왔다.

 

태조 14(931) 고려 건국 공신 유검필이 백령으로 유배.

출렬왕 4(1278) 원나라 태자 '발자'유배.(후에 원나라 13'순제'가 됨)

충렬왕 18(1292) 원나라에서도 탑지송이 유배.

인종 13(1135) 이중 묘청의 난때 왕의 조서 신둔에게 잘못 전달 유배

희종 4(1207) 박진재 최충헌 독재정권 타도 발각되어 유배

희종 7(1211) 21대 회종의 아들 '왕희' 유배

고종 10(1203) 오수왕 대장군 유배

고종 14(1227) 정순우 상장군 유배

고종 36(1227) 정순우 상장군 유배

인종 14(1636) 이대기 병자호란 때 의병장 유배

 

4) 국영 목장지

 

고려시대 백령도에는 '간혈마'로 유명한 서역 '대원산'의 말을 키우는 목장으로 유명하다. 마정을 담당하는 태복사 관리사가 상시 와서 말을 점검하고 이말들을 왕실에 진상하였다고 한다. 조선조 세종 13(1431)에도 목장을 설치하였다. 특히 이 곳에서는 야마, 야우를 키웠으며 선조31(1706)에는 백령목장에서 전마를 공급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 백령 목장은 대청도로 옮겼다. 다시 백령으로 옮기는 등 그후 몇차례 왔다갔다 하다가 영조 45(1769) 백령으로 옮겨 이지역 연자동의 쇠남이골로부터 조강골에 이르는 지역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5) 제염장

 

조선시대에는 백령도에 제염장이 있었다. 선조 26(1593)부터 설치 되었는데, 국가에서는 염장을 보호하고 소금 생산에 필요한 일꾼을 마련하기 위해 백령진 염군 50명을 배치하기도 했다. 당시 생산된 소금은 황해도 제일이라고 했다한다.

 

 

4. 대청면

 

대청면은 대청도와 소청도의 두 개의 유인도와 무인도인 갑죽도로 되어 있다. 대청면은 아직 본격적인 선사유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언제부터 사람이 이곳에 정착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옹진군에서 발굴 조사한 일반적인 예로 보아 신석기 후반부터 사람이 살게 되지 않았나 추측이 된다.

 

1) 연 혁

 

이 지역은 옛부터 중국과의 해상교통에서 백령도와 함께 중요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후사국시대 중국으로 가는 해상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해 태조 5(932) 10월에 후백제 견훤의 수군 대장인 '상애'등이 침공하자 백령도에 귀양와 있던 원나라 경금필이 '백령도''모을도' 장병을 뽑아 이들과 대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에서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싸움에 대해 기록하면서 경음필이 군사를 뽑은 '포을도'를 청도라 했다.

 

고려시대에는 대청도와 소청도를 관할하였던 백령진이 공민왕 6(1357)에 대청도와 소청도를 관할하였던 백령진이 문화현 동촌 가을산 지역으로 옮기에 되었다. 이 때 이 섬에 살던 주민들도 모두 내륙으로 함께 이주하여 섬 지역은 황폐화 되었다. 이런 현상은 조선 초기에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 태종 6(1406)에는 옹진현에 편입되었다. 섬 지역에 사람이 철수하자 이 섬지역은 해적의 소굴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 10(1428)에 백령도에 주민 이주가 시작되고 대청도에도 소를 방목하는 소목장이 설치되었다. 광해군 1(1608)년에는 백령진을 다시 설치하고 이 지역을 근거로 조운선 (세곡운반선)을 침공하던 해적을 토벌하게 되었다. 정조 23(1799)에 대청도와 소청도를 수원부에 편입시키고 두 섬에 진을 설치 진장이 부임했다. 이 진은 조선왕조 말기까지 존속되었다. 고종31(1894) 진장이 폐지되고 1895년에 '진장'대신 도장중심의 행정으로 바뀌었다.

 

1910년 이후 도장제는 면장제로 되면서 대청도와 소청도는 백령면으로 편입되었고 그 후 197471일에는 대청면으로 되었다.

 

2) 고려시대의 유배지

 

충렬왕 4(1278) 김방겸이 왕과 공주제거 모반의 무고로 대청도 유배.

충렬왕 5(1279) 감찰 시승 최유엄 직언상소로 왕의 뜻거역죄로 유배.

출렬왕 6(1280) 원황제가 황자 '애아적' 유배.

충렬왕 9(1283) 원나라 실자지 유배.

충렬왕 10(1284) 원의 활활알을 유배.

충렬왕 18(1292) 원 적당인 길출 유배.

충숙왕 4(1317) 원의 위왕아목가 제주도 유배에서 대청으로 옮김.

충숙왕 11(1324) 원황제 발자태가 유배.

충혜왕 원년 (1339) 원의 명종태자 유배.

 

 

5. 덕적면

 

덕적면은 주섬인 덕적도와 소야도, 문갑도, 백아도, 울도, 굴업도, 선미도, 지도, 목덕도등 9개 유인도와 31개의 무인도로 되어 있다.

 

1) 지명

 

삼국시대 덕적도는 덕물도, 득물도등으로 불렸으며, 소야도는 사치도라 불렸다. 용비어천가에서는 덕적을 '덕물'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그 외에 인물도 또는 수심도, 큰 물섬이란 표기도 있다고 한다.

 

2) 선사유적 조사

 

사람이 이 섬에 정착하게 된 확실한 연대는 알수 없지만 1954, 1960, 1983년 등 3차에 걸친 선사유적 조사결과 대체적으로 이 섬도 신석기시대 후기(BC 2000~ 1000)로부터 살게 된 것 같다.

 

 

3) 연 혁

 

덕적은 신라가 중국과 통교한 533년 이래 당황성에 소속되어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가지 이어졌다. 조선시대 고종 46(1259) 몽고의 침입으로 서경(평양)의 황해도 화두주민들이 덕적으로 이주하여 이 때 덕적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되었다고 한다. 성종 17(1486) 인천도호부로 편입되었다. 숙종 34(1708) 덕적진을 설치 수군첨절제사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드나들던 왜구들의 노략질을 막았으며, 경종 3(1723) 이 진을 철수하였다. 영조 16(1740) 덕적진을 부활 수군첨절제사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드나들던 왜구들의 노략질을 막았으며, 경종 3(1723) 이진을 철수하였다. 영조 16(1740) 덕적진을 부활 수군첨절제사를 재배치하여 고종 31(1894)까지 존속시켰다. 1973. 7. 1 옹진군이 되었다.

 

4) 삼국시대 해상 교통의 중심지

 

기록에 의하면 덕적도는 삼국시대 한반도와 중국 산동반도로 이어지는 황해상의 해상교통 요지였다.

 

덕적도는 백제 근초고왕 27(372)부터 광개토왕 21(475)까지 100여년동안 백제와 사신을 교류한 인천의 능허대 -덕적- 산동반도로 이어지는 황해상의 중간 기착지로 큰 구실을 했다. 그 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진흥왕 (564) 때는 중국의 '''' 나라와 매년 사신을 교류하였는데 이때에도 남양만의 당황성 -덕적- 산동반도로 이어지는 중요한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

 

5) 당나라 군사의 집결지

 

신라는 나/당 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치려고 태종 무열왕 7(660) 618일 당의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군사를 왕의 태자와 김유신이 100척의 배에 군인을 싣고 덕적도에서 맞이하였다고 한다. /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그 후 백제 유민이 각지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켜 그 세가 크게 위협하므로 당군은 본국에 원군을 다시 요청하여 당나라 '손이사'7천의 군사를 이끌고 문무왕 3(663)에 덕적도에 왔다고 한다. 이처럼 당의 대군이 덕적도를 중간 집결지로 이용하였다.

 

6) 국영목장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덕적도에 국영목장이 설치되어 국마 257필이 방목되었다고 하며 소야도, 문갑도에도 목마가 방목되었다. 성종 8(1477)에는 소야도 목장이 영종포의 초지량에 이관되었다고 한다.

 

7) 19세기말 이양선

 

18세기말부터 10세기에 이르러 서양 선박의 출몰이 잦았다. 이들 이양선은 도서지역에 들어와 나무를 베어가고 약탈하는 등 주민을 괴롭혔다. 1860년말 영.불국의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는 등 서구세력의 아시아에 대한 침략위협에 직면한 정부는 쇄국정책을 강화하며 황해의 해상 관문인 덕적도에 감시 기능을 강화하였다.

 

1864 . 7. 28 굴업도 이양선 2척 정박 약탈

8. 10 굴업도 이양선 출몰

8. 14 굴업도 이양선 출몰

1866. 8. 25 이양선 수척 출현

1877. 11. 27 일본선 1척 출현

1878. 2. 7 소야도 이양선 출현

2. 8 덕적도 쑥개앞 바다 이양선 정박

1879 3월부터 7월까지 이양선 일선 7회 출현

 

 

6. 자월면

 

자월면은 자월도와 대이작도, 소이작도, 승봉도의 4개 유인도와 9개인 무인도가 있다. 자월도란 이름은 1910년부터 불려진 이름이고원래는 조물도, 조월도, 조흘도라 불렀으며, 승봉도는 승황도, 이작도는 이측도라고 불렸다고 한다.이 섬 지역에 사람이 살게된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다름 섬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개 신석기시대 후반부터 사람이 산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1954 88일 진단학회에서 이 지역의 선사유적을 조사한 결과 승봉도 지역에서 패총2개를 찾아 조사해본 결과 패총에서 40여점의 빗살무늬토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1) 연혁

 

신라 : 진흥왕 553년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자월도는 한주의 당은군에 속해 고려시대에까지 이르렀다.

고려 : 현종 9(1018) 수주 (수원)에 편입되었고, 그 후 인주에 속하게 되었다. 명종 2(1172) 감무를 배치하였다. 충선왕 2(1310) 남양부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 : 고종 8(1871) 대부도에 ''을 설치하고 조흘도 (자월도), 이작도, 승황도(승봉도)를 관할함. 고종 32(1855) 갑오개혁후 조흘도와 이작도는 남양군의 영흥면으로 승봉도는 인천부 덕적면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1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천부 덕적면에 편입된 지역은 승봉리로, 남양군 영흥면에 편입된 지역은 승봉리로, 남양군 영흥면에 편입된 지역은 자월동, 대이작동, 소이작동으로 그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이 다시 개편되면서 인천부 덕적면과 낭양군 영흥면이 모두 신설된 부천군으로 되었다.

1973 11일 다시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1983 11일 영흥면 자월출장소와 덕적면 승봉리 대초지도, 소초지도, 문갑리, 선갑도를 합쳐 자월면이 되었다.

 

2) 국영목장

 

목장을 섬지방에 두는 것이 신라시대 이후 내려오는 전통인데 조선시대 자월도, 이작도, 승봉도에 목장이 설치되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성종 8(1477) 병조에서 경기도 관찰사에게 알린 내용을 살펴보면 이곳에 목장이 있었고 조선시대 '목장도'에 의하면 조흘도 목장에 68필의 국마가 있었고, 이작도에도 59필의 국마가 있었다고 한다.

 

 

7. 영흥면

 

영흥면은 영홍도를 비롯하여 선재도, 측도, 부도 등 4개의 유인도와 19개의 무인도가 있다. 영흥도 지명은 고려초기부터 시작된 것같다. 조선후기에는 연홍도 라는 별칭이 있었지만 계속영흥도로 불려오고 있다. 선재도는 고려시대 소우도라 불려오다 1971년경부터 지금의 선재도로 불려졌다.

 

 

1) 선사유적

 

영흥면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선사유적 조사 결과 대체로 인근 도서 지역과 비슷한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1984526일 국립박물관에서 영흥, 선재 지역 조사상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흥도 : 소장골과 용담에서 1개소의 패총 발견됨. 빗살무늬 파편 23점 채집

선재도 : 사매기, 통오리, 버드러지에서각각 1개소의 패총 발견 빗살무늬 24, 사매기 패총에서 농경 도구인 '갑돌' , 청동기시대의 슴베돌 살촉, 원삼국시대의 김해식 토기편 출토

 

2) 연 혁

 

고려시대 영흥면 지역은 속해 있었다. 현종 9(1018) 당은군은 인주의 관할이 되니 영흥도 또한 인주관할이 되었다. 충선왕 2(1310)에 당은군은 남양부로 되었고 영흥도도 남양부 소속이 되어 조선시대에까지 이르렀다. 18세기에는 남양도호부 대부면에 속했다. 고종 9(1872) 514일에는 남양부의 화양진을 영홍도 서남쪽 업벌로 옮겼다. 같은해 710일 영홍도로 옮긴 영흥진은 고종 31년에 (1894) 폐지되었다. 1914 영흥은 남양군에서 부천군 관할이 되었다. 197311일 옹진군으로 되었다.

 

3) 국영목장

 

다른 도서 지역과 마찬가지로 영홍도에도 국영목장이 있었다. 성종때부터 설치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에 의하면 선조 (1568~1607)때에는 국마 119, 목자 281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선재에도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4) 삼별초의 항쟁지

 

고려 원종때 영홍도는 삼별초가 항쟁의 근거지로 이용된 고장이기도 하다. 원종이 동11(1270) 5월 강도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명하자 삼별초는 개경의 환도는 몽고에 대한 항복이라고 강력히 반발하며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군은 강화도를 떠나 동년 819일 진도에 항거의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강화도를 떠난 삼별초군이 진도에 자리잡기까지 70여일동안 영흥도를 근거지로 항거하였다고 한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원종 116(1270) 김방겸이 송만호와 몽고군이 합세하여 삼별초군을 토벌하기 위해 추적하다 바닷가에 이르니 영흥도에 삼별초군의 배를 발견 이를 토벌하려 했으나 '송만호'가 위험하다고 말렸다는 기록이 있다. 삼별초가 진도로 옮겨 항거하다 원종 12(1271) 진도 항거지를 빼앗기고 제주도로 옮겨 항거하고, 1272년에 영흥도에서도 이들이 항거했다고 한다. 원종 1311월에도 삼별초가 거제도를 침범하고 영흥도에는 삼별초군의 배가 드나 들었다고 한다.

 

5) 유배지

 

고려시대 원종, 충렬왕, 충숙왕 대에 걸쳐 여러 신하들이 유배된 고장이기도 하다. 원종 8(1267) - 문하시랑 이장용이 원종에 올린 글월에 미움을 사영흥도에 유배되었다.

 

원종(1256~1274) - 추밀사 이계가 유배되었다.

충렬왕 18(1292) - 원의 합단의 대왕이 유배되었다.

충렬왕 (1275~1308) - 원의 환관 이숙의 힘으로 벼슬을 한 전영보의 잘못을 문책한 백원항이 이숙의 모함으로 유배되었다.

충숙왕 5(1318) - 민란의 책임을 물어 제주부사 장윤화가 유배되었다.

충숙왕 6(1319) - 사리 사욕을 탐하던 충선왕의 측근인 조득구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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