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제1의무역항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4 19:51:41
1. 개화기 우리 나라 제1의 무역항
인천은 개항 초기부터 서구 여러 나라의 선박과 외국인의 왕래가 많아 지면서 국제적인 항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와 통상협정을 맺게 된 여러 나라들은 개항장인 제물포에 조계지를 확보하고 그들 나라의 무역상사들을 진출시켰다. 개항 초기에는 일본인과 청국인들이 들어와 상권을 형성하여 서로 경쟁하게 되었고, 이어서 미국을 비롯해 영국, 독일 등 여러 나라 무역상사들이 들어오면서 상업활동은 어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들 외국상사들의 그등릐 상품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우리 나라의 전통적 상거래 조직인 인천의 '객주'와 '여각'을 통해 보부상과 자연스런 협력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들 여각과 객주들은 거수 상인들과의 상거래를 통해서 근대적인 거래방법을 배우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려한 바와 같이 외국자본들은 우리의 시장을 독점하게 외었고, 특히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 자본 세력이 설자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무너뜨리니 상거래 터전을 잃게 된 우리 객주들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민족 자본의 결속을 부르짖으며 1885년에는 '인천객주회'라는 객주조합을 결성하여 외국 자본에 맞서기도 했다.
1) 무역 실적
인천은 우리 나라 최초의 외국 무역상이 들어온 고장으로서 근대화된 서구의 편리한 공산품과 생활 소비재가 들어와 전국으로 공급되는 중심항이 되었고 인천항의 주요 수출품은 우리 나라의 농산물이 주종을 이루었다. 개항이후 무역량은 해마다 배로 늘어나 십수년(1884∼1907)동안 우리 나라 무역의 50%를 차지하는 전국 제1의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911년을 고비로 부산이 급성장하면서 인천을 앞서게 되었다.
2) 거래 상품
개항 초기의 수출물은 주로 우리 나라 농산물이 주종을 이루었고 수입품은 서구의 공산품인 생활 소비재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수입량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 수입 초과 현상이 계속되었다.
수출품 : 콩, 금, 밀, 조, 우피, 우골, 해산물 등
수입품 : 면포류(광목), 석유, 성냥 ,담배, 설탕, 시멘트 등
(1) 쌀수출과 미두
1890년 경부터 일본인들의 끈질긴 압력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하게 되면서 1897년에 이르러 인천항의 쌀 수출항이 되기도 했다. 쌀이 부족했던 일본이 우리 나라의 쌀을 수입하기 위한 방법으로 1896년 인천에 '주식회사 인천미두취인소'를 만들어 이제까지 한 인 객주를 통해 쌀을 거래하던 방식을 버리고 일본인들이 직접 쌀을 거래 하였다. '미두'란 오늘의 증권 거래와 비슷한 것으로 현미쌀 1석당 1원의 보증금을 미두중개점에 예치하고 이 보증금으로 쌀 거래를 하였다. 투자 방법은 미두중개접(15개소 있었음)을 통해 곡가의 10%를 보증금으로 걸고 현미 100섬에서 300섬까지 투자가 가능하며, 3개월 후 쌀값이 오르면 이익을 보고 쌀값이 내리면 손해를 보게 된다.
이두로 한밑천 크게 잡고자 일확천금을 노린 각 지방의 부호나 지주들이 덤벼들어 패가 망신하거나 자살하는 소동까지 생겨 온 국민의 원성도 높았다고 한다. 미두는 1939년까지 계속되었다. 미두 바람에 전국의 쌀이 인천항으로 몰려 들어 인천은 우리 나라 쌀수출 중심항으로 자리 잡았다. 1919년 한 해에 76,974,550석이거래 되었으며, 1939년까지 20여년간 평균 2,500만석의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미두 중개소는 대부분 일본인들이 경영했으며 한국 사람으로는 인천의 유군성, 개성부자 김익환, 평안도 대지주 장최근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전국에서 몰려든 미두꾼은 신포동(터진개)이나 용동으로 몰려들어 흥청거렸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용동에는 '권번'(기생소개소)이라 새겨진 층계석이 남아 있다.
2. 일본 상인들
1) 일본인
일본상인들이 처음 들어오게 된 것은 대체로 1883년 4월 13일경인 것 같다. 처음 들어온 일본인들은 당시 부산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상인 7, 8명과 직공들 7, 8명이었다고 한다. 그해 9월 30일 일본인들의 조계지가 확정되면서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몰려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해 12월말 경에는 일본인 거주자가 348명에 이르렀고, 그들이 시작한 상거래 업종을 살펴보면 매우 다양한 분야를 파고들어 우리 나라에 대한 경제 침략의 발판을 튼튼히 다졌다. 그들이 펼쳐 놓은 업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역업, 미곡상, 정미업,여과업, 임대업, 잡화상, 주류상, 선구상, 음식업, 유곽
(1) 은행 설치
인천에 처음 생긴 금융기관은 (1883.11 17) 일본 제일 은행 부산 지점이다. 이 은행은 인천출장소를 개설하면서 금융 지원의 뒷받침까지 받게 된 일인 상일은 급속한 발전을 거듭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입장에서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1890년에는 일본 제 18은행 지점이 그리고 1892년(고종 29년 7월)에는 일본 재 58은행이 들어옴으로써 인천의 금융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1893년에는 일본의 대판상선이 인천 지점을 개설하여 인천항의 수출 상품 수송까지 독점하기도 했다.
(2) 일인 상법회의소
일본인들은 1885년(고종 22년)에 인천 상법회의소를 조직하고 1891년에는 인천항 무역조합을 결성하여 일본 상인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서 청국 상인을 견제하영으며 우리 민족 상인의 생존권마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3) 계림장업단
1896년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천의 일인 상인 219명이 '계림장업단' 이란 행상 단체를 조직하여 우리 나라 내륙 깊숙이 파고 들어가 그들의 상권을 확대해 갔으며, 한때 그들의 조직 인원은 1,38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경제 수탈의 앞잡이가 되어 행패 EH한 심했고 이에 반발하는 국민의 원성이 매우 높았다. 한국 정부에서도 이 조직의 피해에 대한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여 드디어 1898년에는 계림장업단이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청일, 노일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면서 1910년경에는 서구 상인마저 몰아내고 이 고장을 일본인의 독무대로 만들고 말았다.
3. 우리 나라 최초의 서구 상사
제물포는 부산이나 원산항보다 새항은 늦었지만 수도의 관문이랑 지리적인 특수성 째문에 서구 여러 나라의 현대적인 무역상사들이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상륙하여 자리잡은 항구가 되었다. 이화양행, 타운선트양행, 광창양행, 함능가장회, 세창양행 등 대표적인 상사들이 개화기 우리 나라에 끼친 영향 또한 매우 컸다. 「인천부사」를 통해 당시 서구인들이 진툴한 실태를 살펴보면 11개국이나 되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자리잡고 살았었음을 알 수 있다.
1) 청국 상인
청국 상인들은 일본보다 늦게 1884년경부터 들어왔다. 처음 들어 온 청국인들은 불과 5명 정도 였다고 하며 이들은 주로 인천항에 드나드는 미·영·러국의 선박을 상대로 식량과 급수를 공급하는 납품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청국 상인들의 왕래가 늘어 선린동 중국 조계 지역을 중심으로 상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청국인들은 주로 식료품, 잡화, 양품류, 철기구 등을 수입하여 상권을 확대하며 일본 상인과 경쟁하였고, 1888년경부터는 상해의 상업기선주식회사가 인천과 상해를 정기적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정기선이 개설되면서 상거래가 더욱 활기를 띠었다. 1890년경에 이르러서는 무역량이 일본인을 능가하기도 했으나 청일전쟁(1894∼1895년)으로 일본에게 패한 후에 한때 대부분의 청국 상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며 상세가 약화되기도 하였다.
1900년대 번성했던 청국 상사들은 주로 산동성 출신들이 많았다. 당시 큰 상사는 12개가 있었고 대표적인 거상들로는 영래성, 덕순복, 삼성태, 서공순 등을 손꼽았다. 청국인들은 부지런하고 신용이 있어 일본인보다 환영받으면서 장사도 잘했다. 청국인들은 한국산 미곡과 우피, 인삼 등을 수출했다고 한다.
2) 이화양행
이화양행은 1883년 인천에 진출한 영국의 상선회사로서 동양 진출의 본거지를 중국 상해에 두고 그 지사를 제물포에 개설하였다. 주로 우피를 수출하는 한편 상해, 일본의 '나가사끼', 부산과 인천을 연결하는 정기 항로를 개설 화물 수송업을 시작랬으나, 영업이 부진하였고 그후 우리 나라 광산에도 손을 댔으나 모두 실패하여 1884년 12월 15일에 철수하고 말았다.
3) 세창양행
홍콩과 일본에 지사를 둔 독일인 '마이어'양행이 1884년 재물포에 상륙하면서 세창양행이란 이름으로 간판을 걸었다. 무역은 주로 면포, 총기, 인쇄기 그리고 바늘과 같은 생활용품이었고 홍삼과 금을 출하면서 번창하였다. 1889년에는 쾌속정 '제강호'를 들여와 인천과 마포간을 운행하는 해상 교통로를 처음 개척하여 사람과 물자 수송에 새로운 시대를 열기도 했다.
4) 타운선트양행
미국계의 이회사는 1885년에 들어와 주로 선박, 화약, 석유 등을 수입하고 인천에서 화약 공장을 최초로 세웠으며 쌀을 정미하는 현대식 공장인 '답손'정미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5) 광창양행
1902년 영국인 '베네트'가 일본인과 합작 설립한 무역회사로 영국의 면직물을 수입했다.
6) 함능가 상회
1896년 일본 '나가사끼'지사를 둔 영국 상사가 인천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맥분, 설탕, 총포, 면직물을 수입하는 한편 러시아의 대리점도 맡아 우리 나라 쌀을 해외로 수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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