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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개항과 인천조계

by 형과니 2023. 3. 10.

개항과 인천조계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4 19:49:26

 

제물포항은 우리 나라 개화기에 서구의 문물이 들어온 중심항으로 근대화의 선구지 구실을 하게 되었다. 보잘 것 없던 어촌에서 일본을 선두로 청국,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외국 영사관이 설치되고 통상 활동이 시작되었다. 상인들이 몰려오고 무역상이 자리 잡으면서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거주 할 수 있는 일정한 지역의 공간이 요구됨에 따라 우리 나라로부터 제물포 땅을 빌려 쓰는 조계 계약을 맺게 되니 인천 제물포 지역은 개항과 더불어 약 30여년간 외국인들의 조계 지역이 형성되었다.이 조게는 결국 우리 나라가 힘이 약해 우리의 땅을 외국인들에게 내주어야 하는 수치스런 역사의 한을 남기게 되었으나, 옛 조계지(현 중구의 중심지역)는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되기 전 약 100여 년간 인천의 중심지로 발전해 온 근대화 도시 발전의 시발점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1. 조계 제도

 

조계가 생기게 된 것은 19세기 서구 열강들이 동양에 진출하면서 무력을 앞세워 통상조약을 맺고 개항장에 그들이 자유롭게 자기 나라의 주권을 행사하면 살아갈 수 있는 영토를 확보하는데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일찍이 영국이 중국과 조계 계약을 맺고 1845년 중국 상해에 외국인 조계를 설치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1858년에는일본이 역시 미, , 불 등 서구 5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동경과 히로시마, 나가사끼 등 5개 지역에 조계를 설치하게 되었으며, 우리 나라는 1876년 부산항을 시작으로 1880년에 원산 그리고 1883930일에는 개항장인 인천 제물포에 일본을 비롯해 서구 여러 나라와 조계 계약을 맺어 조계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2. 제물포 지역의 조계

 

개항 당시 제물포 지역은 원래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 지역으로 인가가 매우 드물었다고 한다. 특히 매봉산(자유공원)을 중심으로 한 넓은 지역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아 특별한 지명이 없었는데 외국인들의 조계지가 번창하면서 조계지 안에 해안통이니 청관통, 이사청통, 공원지통과 같은 새로운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당시 제물포 조계 지역은 현 중구청의 중심지인 중앙동, 송학동, 송월동, 북성동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약 15만 여평에 이르는 지역에 자리잡게 되었으며, 그 후 조계 지역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해지고 여러 가지 관련사업이 확장되었다. 또한 이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생업을 개척하고자 하는 내국인들이 많이 모이자 자연스럽게 답동, 화개동, 인현동, 내동, 용동, 율목동, 화평동, 화수동, 만석동 지역에 한인 부락을 형성하였다. 이로써 인천은 근대화의 새로운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인천의 조계는 일본과 청국의 전관 조계와 서구인들의 공동 조계가 있었다. 이 조계는 개항과 더불어 1883년부터 1914년까지 30여년간 번창하였으나 한일 합방 후 모두 폐지되었다.

 

 

1) 일본 조계

 

일본인들이 점거한 조계 지역은 현 자유공원 남쪽 양지 바른 언덕에서 해안에 이르는 관동 1, 2가 일대 약 7000평에 이르는 지역에 이르는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이 곳은 영사관이 들어서고 근대도시 형태의 도로와 택지를 조성하여 일인들의 주거지가 생기고 상가가 형성되면서 일인들 중심의 일본 거리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계속 늘어나 개항 당시 348명에 불과했던 거류민들이 청일전쟁이 끝난 후에 더욱 급속하게 증가하여 1890년 말경에는 4300여명에 이르렀다. 계속 늘어나는 거류민 수용이 한계에 다다른 조계지를 좀더 확장하고자, 여러 가지로 고심하게 된 일본은 결국 1898년에 현 해안동 일대를 매립하녀 4천여 평의 땅을 늘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계속 증가하는 일인들을 수용하기 어렵게 되자, 그들은 각국 공동 조계와 한국인 거주지까지 파고 들면서 그들의 주거지를 확보했던 것이다.

 

일본 영사관은 18824월 중앙동 1가 현 조달쳥 자리의 가청사에서 출발하여 18831031일에 현 중구청 자리에 2층 양식 건물을 짓고 이전하였다, 이 자리를 해방 후 인천시청으로 이용하였고 현재 중구청이 쓰고 있다.

 

 

2) 청국 조계

 

청국 조계는 일명 청관 지역이라고도 불려왔다. 자유공원 서남 쪽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현 선린동 지역은 지금도 차이나타운의 옛 정취가 이어져 내려오는 중국인 거리다. 이 청국 조계는 1884년에 현 선린동 일대 5천평의 터를 마련하였으나 청국인들의 왕래가 빈번해 지고 상거래 또한 활기르 띠면서 무역상들이 들어와 동순태, 동순동, 동화창 등 거상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중화루, 공화춘, 동흥루와 같은 유명한 중국요리집들이 개점하는 등 중국인 거리는 매우 번창하였다.

 

이렇게 되자 5,000여평의 선린동 조계지에서는 계속 늘어나는 청국인들의 수용이 어렵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계 지역을 더 확보해야만 하기 때문에그들은 여러차례 조선 정부와 교섭을 한 결과, 현 내동 경동 지역(옛 삼리한지역)에 중국인 조계지를 확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서 일본에 패한 후 청국인들은 본국으로 대부분 청수하였도 소수의 청국인들만이 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 거리는 해방 후 1980년대 초까지도 평화각(애관극장 옆)과 영풍루가 옛 차이나타운의 흔적으로 남아 있으나 이제 그 자취마저 사라져 볼 수 없게 되었다.

 

현 선린동 청관거리에는 옛 청국대사관 자리에 중국인 화교학교(초ㆍ중ㆍ고과정)가 있고 중국과 국교 정상화 이후 화교 자치회 화교 상회들이 서서히 다시 살아나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100여년 전에 정착한 화교 2, 3세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3) 공동 조계

 

공동 조계는 미, , , , 일 등 5개국이 1884103일 인천 제물포 조계장정협정에 따라 생겨나게 되었다. 공동 조계는 청국과 일본 조계의 외각 주변인 송월, 송학, 북성, 관동에 이르는 14만여평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여 여러 나라들이 공동으로 거주할 수있게 설정한 지역이다.

 

4) 신동공사

 

이 공동 조계에는 행정권이 독립된 자치의회격인 '신동공사'를 조직 공동 조계 내의 모든 문제를 최종 협의 결정하면서 산하에 집행기관인 조계자치구청을 두고 세금을 거두어 공동 조계 내의 모든 도로, 가로수, 가로등과 같은 공동 조계 시설환경 개선에 투자하는 등 자치적으로 독립과 행정, 사법권을 행사하였다.

 

신동공사는 조계장정의 규정에 따라 미, , , , 일 등 5개국의 합의로 1889323일 발족하였다. 초대 의장에는 프랑스의 '플랑시'가 임명되었으며 의원 조직은 각구 영사관과 거주지의 유지 3인 그리고 의원 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3. 공동 조계내의 영사관

 

 

1) 영국 영사관

 

영국은 18843월 옛날 제물포 포대가 설치되었던 해안가 바위 언던 현 올림포스 호텔 자리에 영사관을 열고 초대 영사에 '헬링톤'이 부임하였다. 시초에는 가건물을 이용했으나 1887년 빨간 벽돌양옥 단층을 새로 지어 사용했다. 이 건물은 해방 후까지 옛 건물이 보존되어 왔으나 6.25 폭격으로 그 자취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2) 러시아 공관

 

러시아는 각국 조계에서 사장 늦게 19021031일 영사관을 개설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인천에 거류민이 없었기 때문에 영사관을 두지 않았으나 신동공사가 발족되면서 조계지내 여러 가지 이해 관계를 고려하여 서울에서 부영사가 내려와 인천 내동에 있는 성누가병원의 건물을 빌려 문을 열었다. 그 후 선린동 해군경비 부대자리에 청사를 신축하였으나 1905년 러일전쟁으로 일본에게 패하자 영사관을 철수하게 되었다.

 

 

3) 독일 영사관

 

독일은 신동공사의 의원국이면서도 별도로 영사관을 갖지 않았다. 자유공원 한미수교 100주년기념탑 남쪽(옛 인천각)에 대사관부지를 마련한 채 끝내 대사관을 짓지 못했다. 개화기 수도 한양의 관문이 된 인천은 외국인의 조계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교통,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서구 문화가 들어오는 길목 구실을 했다. 특히 거수 여러 나라에서 들어온 세창양행, 이화양행, 함능가상회등 무역상회들이 막강한 자본으로 상권을 쥐고 상업뿐 아니라 광산, 철도, 해운을 비롯해 생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익사업을 개척하면서, 제물포 조계는 우리 나라에서도 가장 앞선 근대화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100 여년을 거쳐오면서 이곳은 인천 시가지의 가장 번화한 중심지로 자리 잡았으나 6.25를 겪으면서 9.28 인천수복 전투시 개화기의 많은 양관 건물들이 90%이상 파괴되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조계지의 옛 시가지 모습이 남아 있는 곳으로는 선린동 청관 지역과 중구청 주변 그리고 내동, 신포 등 일부 지역이 있을 뿐이다.

 

 

 

조계의 종류

 

조계의 종류는 토지의 취득 방법에 따라 Concession Settlement로 구분한다.

 

Concession은 토지를 외국 정보가 차용하는 방법인데 그정부는 빌린 땅을 다시 자국민에게 분할 대여한다.

Settlement는 외국인 개개인이 토지 소유자와 계약에 의해 빌려 쓰는 방법이다.

인천에서는 청국과 일본, 각국 조계 모두 Settlement 방식으로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일본은 인천을 제외한 부산, 원산, 마산에서 Concession방식을 채택했다.

 

조계와 지계

 

인천 제물포 조계 협약에서는 각국 조계장정(1884. 10.3), 일본과의 조계약서(1883. 9.30) 등 모두 조계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청국은 인천에서 화상제계장정(華商地界章程 1884. 4. 2)에 의해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지계'란는 용어로 고쳐 사용되었고 그후 원 세계가 내한한 후에는 '조계'라는 용어로 고쳐 사용되었다.

일본은 인천 제물포 '조계악서'이외의 모든 조약에서 거류지약서(居留地約書)에 의해 '거류지'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영군, 청국, 프랑스, 등 모든 외국조약에서는 물론 우리나라 원산조약에서도 '거류지'명칭을 사용하였음)

조계 명칭사용은 고종 201883년 체결된 조·영 수호통상 조약 본문에 조계에 관한 규정을 둠으로써 '조계'용어는 구한국 정부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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