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최대의 갑문도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4 20:00:17
인천항에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도크'가 있었다. 이 '도크'는 비록 한일합 후 일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당시 동양에서 하나뿐인 '도크'로 인천의 자랑거리였다. 해방후 6.25와 5.16을 거쳐 1960년대부터 우리 나라의 근대화 계획이 추진되면서 인천항은 수출입 선박이나 물동량이 급격히 증가되었고 이로 인해 기존의 항만 시설로서는 도저히 그 수요를 감당할 길이 없어서, 일제가 건설했던 '도크'를 43년만에 해체하고 순수한 우리 기술로 인천항 전부를 '도크'화하는 대역사가 마무리 되어 동양에서 제일 큰 현대적인 '도크'시설을 갖게 되었다.
1. 개항 당시의 항구
개항당시 (1883년) 제물포 항은 이미 개항된 부산이나 원산보다 항구로서의 입지 여건이 매우 좋지 못했다. 서해안은 원래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대다 특히 인천은 그 차이가 10여m나 되고 더구나 해안은 모두 완만한 갯벌이 펼쳐져 있어서 간조때가 되면 갯벌이 길 게 드러나 배가 해안 가까이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배들이 접안하자면 만조시간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 등 불편이 많았다.
인천항은 크게 외항과 내항으로 구분된다. 외항은 주로 월미도 밖의 영종도 사이에 있는 작약도와 율도에 이르는 해상으로 수심이 깊어 간만의 차와 관계없이 언제나 대형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항에서 내항으로 승객이나 화물을 운반하자면 작은 배에 다시 옮겨져서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경비가 많이 들어 매우 불편하였다고 한다.
내항은 월미도와 사도 안쪽에서 해안에 이르는 지역으로 비교적 작은 배들이 들어와 정박했다. 개항초에는 짐을 실은 범선들이 만조시에 내항 해안까지 들어와 짐을 풀거나 싣기도 하였으나 물 때를 잘 못 지키면 꼼짝 못하고 갯벌바닥에 얹혀있다가 다음 만조때까지 기다려 물이 들어와야 배가 뜰 수 있어서 출항에 불편함이 또 한 컸던 것 같다.
2. 항만 시설
이처럼 개항당시 제물포항은 입지적인 조건이 좋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가 접안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시설이 절실히 요구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1884년 8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 1년 동안의 공사끝에 선박들이 간조 때나 만조시에도 자유롭게 배를 댈 수 있게 되었다. 그 부두시설을 살펴보면 현 오림포스호텔(옛 영국영사관 자리) 언덕 아래의 해관자리 앞 해안에 석축을 하여 화물 집하장을 만들고 그 아래 해안 돌출부에는 간조 때와 만조 때 각기 배를 타고 내릴 수 있는 두 곳의 승강장을 설치하였으니 이 시설이 바로 인천 최초의 항만 시설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빈약한 시설로는 날로 증가하는 수출입 물량을 감당할 수 없어서 1893년에는 영국인신기사 '챔버스'의 설계로 해관앞 해안을 매립하여 늘리고 소월미도와 월미도에 등개를 세우기도 했다.
1906년에는 8개년 계획으로 해안을 넓히고자 17,976평을 매립하여 축대를 쌓고 배가 접안할 수 있는 철각잔교 1개소, 목조잔교 3개소를 설치하는 등 계속 항만시설을 확장했으며 항내 화물을 손쉽게 옮길 수 있는 기증기 시설 2기를 갖추기도 했으나 항만시설은 계속 증가되는 수요를 따르지 못해 불편한 문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 후에 다시 이 문데를 본격적으로 해결해 보고자 1911년부터 12년간 연차적인 항만시설 확장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인천항 '도크'사업
인천항의 '도크'추진은 원래 인천항의 약점인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해 보고자 추진하게 되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1904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무역의 주도권이 부산으로 넘어가게 되어 인천항은 경제적으로 큰 다격을 입게 되었고 이를 타개 하기 위해서는 인천항을 보다 새롭게 발전시켜야겠다는 여론이 제기 되면서 '도크'공사가 더욱 절실한 과제로 등장한 것 같다.
1) 제 1'도크'시설
조수간만의 차와 관계없이 언제나 대형기선이 '도크'내로 출입할 수 있고 부두에 접안하여 화물을 풀고 실을 수 있는 시설을 각추고자 1911년부터 1923년까지 12년간의 공사로 제1도크는 완성하게 되었다.
2) '도크'의 규모
도크의 위치는 해안동에서 인천여상앞에 이르는 해안에 자리를 잡고 배가 드나드는 관문은 내랑을 향해 서쪽으로 설치 되었다.
도크는 크게 배가 드나드는 갑문과 배가 들어와 정박할 수 있는 도크로 구분된다. 갑문과 도크의 규모는 아래와 같다.
갑문 : 2중 갑문식 / 길이-164.85m / 너비-18.8m / 측벽높이-14.55m
도크 : 크기-3만평 4,500톤급 선박 3척 동시 접안 / 길이-454.55m / 너비-218.18m
수심-10.61m~8.33m
3) 제 2'도크'공사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인천항은 날로 늘어나는 물동량을 처리할 수 없을 만큼 제 1도크로는 포화상태로 그 기능의 한계에 이르러 부득불 제2의 도크 건설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 공사는 1935년에 착수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공사는 1943년에) 30% 수준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공사내용
도크의 크기는 8천톤급 선박 1척, 3~5천톤급 선박 5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시설 규모에 도크의 길이 1,300m, 수면적 64만 1,500㎡, 너비 250m에 이르며 그 외 항만 부대시설로 43만평의 토지를 매립하여 화물을 처리하고 수송할 수 있는 도로, 철도 시설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4. 인천항 전면 '도크'화
1960년대 들어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국토 종합개발 계획이 수립 되었고 수도의 관문인 인천항을 세계 수준의 국제항으로 개발 하고자 항만 개발의 종합적인검토로 인천항을 전면적으로 개조하여 '도크'화 하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공사는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착동하여 1974년 5월 10일 드디어 8년만에 '도크'화가 완성됨으로써 인천항은 동양 최대의 갑문식 도크를 갖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인천항은 일본의 오랜 잔재를 말끔히 씻고 순수한 우리 기술로 이룩한 세계적인 항만시설을 갖춘 자랑스런 고장이 되었다.
1) 갑문
이러한 갑문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만들어진 갑문이라고 한다. 이 갑문은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설치되었다. 갑문은 두 개로 되어 있어 5만톤급 1척과 1만토늡 1척이 동시에 입항할 수 있게 되어있다.
갑문의 크기는 지하 24m밑에 서울의 3.1빌딩 크기의 시설이 들어 섰다고 하며 시멘트 사용량도 춘천댐의 두 배에 달한다고 한다.
2) '도크'화 된 인천항2
인천항의 전면 도크화는 1920년대에 완성한 옛 '제1도크'와 1940년대초 중단되었던 '제2도크'를 비롯해 옛 인천내항 전부를 도크화하여 인천항의 약점이었던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면서 대형선박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시설을 각추게 되었던 것이다.
인천항내에는 8개의 거대한 부두 시설이 특색있게 각추어져 있어 각 부두별로 많은 배가 동시에 접안할 수 있게 되었다.
도크항 규모
5. 우리 나라 최초의 양곡 전용 부두
우리 나라에 도입되는 양곡의 70%를 취급하는 부두가 제7부두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이자 제일 큰 양곡 부두로서 1일 1만톤의 양곡을 하력하여 콘베이어 시설(937m)를 통해 5개소의 싸이로 시설에 75만톤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이 각추어져 있다.
전면 '도크'화로 인천항은 년간 3,900만톤의 하역 능력을 가진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계속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도 계속 늘어나는 물동량을 처리하기에는 역부족한 상태다. 서해안 시대를 맞아 중국과의 무역량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며 앞으로 남북 교류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시설은 더욱 확충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인천국제공항이 완공되면 인천항은 한층 더 눈부신 발전이 거듭되리라 믿는다.
부두의 시설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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