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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개척정신이 이어져 내려오는 강화

by 형과니 2023. 3. 10.

개척정신이 이어져 내려오는 강화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4 20:02:24

 

 

 

1. 새로운 도읍지 강도 개척

 

13세기초 몽고는 여러 차례 고려를 침공하였다. 고종(23)은 권신인 최고의 권유를 받아들여 1231년 수도를 강화로 옮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강화는 갑자기 고려 정치의 중심부가 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한적했던 섬 지역인 강화는 그 후 39년간 '강도'시대를 맞이하여 향토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새로운 시대가 개척되었던 것이다.

 

강화천도의 입지 조건

 

강화는 수도인 개성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다.

강화성은 넓어 농지를 확보할 땅이 많다.

강화성은 예성강, 임진강, 한강의 입구에 자리잡고 있어 육지와 연락이 편리하다.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 운반선의 길목이 되어 물자 조달이 좋다.

무엇보다 수군에 약한 몽고군의 접근이 어려운 점이 좋은 조건이었다.

고종은 정부를 개경에서 이곳 강화로 옮기면서 강제로 많은 주민도 이주시켰다고 한다. 고종은 1232년에는 수도 이름은 '강도'라고 고치고 '강도'에 궁정과 관아를 새로 지으면서 건물의 명칭을 모두 개경의 것을 그대로 썼으며, 새 궁전의 뒷산도 개성과 똑같이 송악산이라 불렀다고 하며 성을 쌓고 주거지를 만들고 많은 절을 세우는 등 새로운 도읍지를 개척하게 되었다. 1234년 내성에 궁궐 관아를 짓고 중성과 외성을 3중으로 쌓아 방위를 튼튼히 하였으며, 특히 외성은 해안선에 둑을 쌓아 염하를 건너오는 선박들을 막을 수 있도록 요새화 하였다.

 

 

 

1) 별궁

 

고종 46(1249)에는 마니산 남쪽 기슭에 별궁을 짓고 그 후 삼랑성과 신지동(선원면)에 임시 대궐을 세우기도 했다.

 

 

2) 강화성

 

내성인 강화성은 1234년에 지었다. 이 성은 규모가 커서 강화읍 북쪽산에 선원면에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 때 거의 훼손되어 1652(효종3)1677년 두차례에 걸쳐 석축으로 개수하였다고 한다. 현재 복원된 옛문루가 있다.

 

첨화루 옛 서문이다. 1975년 원형 재 복원함.

인파루 옛 남문이다. 1975년 원형 재 복원함.

진송류 옛 북문이다. 옛 송악산 서쪽 기슭에 있었음.

1783년 강화유수 김로진이 문루를 세워 진송루라 불림(1975년 복원).

 

3) 중성

 

1240년 고종 37년 쌓은 토성이었다. 중성은 동문 밖 옥림리에서 시작하여 성문고개를 거쳐 동북간으로 북산을 지나 용장고개로 하여 면화동을 거쳐 남산을 돌고 서향리 들판을 지나 찬우물로 하여 대문리고개 산등을 따라 도문고개 현장산 창리 뒷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4) 외성

 

외성은 1237'적북'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초지진'에 이르기까지 강화 동쪽 염하해안을 따라 토성으로 쌓았다고 한다. 문루가 6개소, 암문(暗門) 6개소, 수문(水門) 17개소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모두 무너져 일부 흔적만 볼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외성문루로 참경루(斬鯨樓)m 공조루(拱潮樓)1977년 복원되었다.

 

5) 15개의 불교 사찰

 

강도 39년간 강화에는 많은 사찰이 창건되거나 새로 수축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로 되어 국가 번영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특히 몽고의 침입으로 국난의 위기에 처한 고려는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려는 열렬한 신앙심에서 많은 사찰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하며, 팔만 대장경 판각 사업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2. 우리 나라 바다 개척의 선구자

 

1) 바다 개척의 선구지 강화

 

섬이 많은 강화는 일찍부터 섬에서 조금이라도 생활터전을 넓히고자 지혜를 모아 끊임없이 해안을 넓혀왔고, 이 땅을 농토로 개간하는 역사가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온 고장이다. 이 고장이 일찍부터 간사지 개간이 발달 할 수 있었던 조건을 살펴보면 이 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썰물 때에는 넓은 갯벌이 육지로 변하기 때문에 굴곡이 큰 해안을 막아 땅을 넓힐 수 있는 좋은 입지 조건을 갖게 된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몽고의 침입을 피하여 고려 고종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면서 권신인 최우로 하여금 1237년 강화도 연안을 수축하였고, 그 후 1248년 병마 판관 김방경이 해안을 막아 둑을 쌓고 간사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된 후부터는 몽고 병란에 시달리면서도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는 바로 어려운 처지를 스스로 슬기롭게 극복한 강화인의 창조적인 개척정신의 뿌리이기도 하다.

 

2) 바다를 막아낸 제방

 

강화에는 45개에 이르는 제방이 다음과 같이 여러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 둑은 생활의 터전으로 넓혀 농토를 만들고 벼농사를 지어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제 포 둑(선원면) 고려 고종 43(1256)에 축조

삼강포둑(송해면) 인종 14(1636) 강화 유수 강신 축조

굴 포 둑(길상면) 효종 7(1656) 강화 유수 홍중보 축조

대 청 둑(선원면) 현종 4(1664) 강화 유수 조복양 축조

동천앞둑(송해면) 현종 11(1670) 강화 유수 김수홍 축조

장 지 둑(내가면) 현종 6(1666) 강화 유수 서필원 축조

비 포 묵(강화읍) 숙종 22(1696) 강화 유수 최규서 축조

선 두 둑(길상면) 숙종 32(1706) 강화 유수 민전원 축조

선두동둑(길상면) 이태좌 축조

상 주 둑(길상면) 숙종 32(1706) 송가와 매음도를 남북으로 연결 6.5km, - 4km .

 

 

3) 해방후 간척 사업

 

강화의 바다 간척 사업은 해방 후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길상면 초지리와 장흥리 황산도간의 양쪽 뚝을 막아 3136ha의 광활한 땅을 만드는 대 간척사업이 1962320일 완성되었다. 삼산면 매읍리 연안일대 240ha를 매립, 염전과 농장을 개척하였다.

 

4) 방죽 개척으로 농업용수 확보

 

섬 지역인 강화는 원래 농사에 필요한 물이 부족한 고장이었다. 이곳 선조들은 바다를 메꾸어 마련한 땅을 개간하여서 벼농사를 짓고자 지혜를 모아, 빗물을 저장하여 쓸 수 있는 방죽을 만들게 되었고,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방죽을 개척한 결과 쌀농사를 자급자족 할 수 있는 풍부한 농업 용수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양죽은 현재 42개에 이르고 있으며 오래된 방죽으로는 고종 43(1256)에 설치한 선원면의 출포방죽이 있다.

 

송해면 제포방죽, 와포방죽, 이포방죽, 삼간포방죽, 승천방죽

선원면 출포방죽, 대청방죽

길상면 굴곳방죽, 선두방죽, 어지장방죽

내가면 정지방죽

강화읍 비포방죽, 적북방죽

양사면 호두방죽

교둥면 영산방죽, 염주방죽

삼산면 상주방죽, 검어지방죽, 을포방죽, 공개방죽, 웅곳방죽, 남선방죽, 목포방죽, 사지평방죽, 인계평방죽

 

5) 현대에 이어진 저수지 개척사업

 

농업 용수를 저장하기 위한 저수지 개척하업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끈질긴 노력에 힘입어 강화 지역의 천수답은 이제 수리 안전답으로 크게 개선되었으며, 쌀농사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터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교산저수지 양사면의 교산리 배우고개 밑에 축조(19651973)

고려저수지 고려산, 혈구산, 덕산 줄기의 산천을 흐르는 냇물을 저장하는 저수지로써 내가면 오상리, 구하리, 황천리, 하점면 신삼리에 농수를 보내고 있다.(1957. 12.31 준공)

초지저수지 질상면 춘지리에 있다. 황산도 벌판의 넓은 땅을 수리안전답으로 만듬(1952. 3. 20 준공)

 

 

3. 8만 대장경판이 만들어진 고장

 

강화는 국보 32호인 8만 대장경판을 만들어 낸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대장경이란 불교의 경()과 률()을 엮은 것인데 그 내용을 목관에 활자로 새겨 만든 것이 경판이다. 경판이 8만장에 이른다하여 8만 대장경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당시는 모든 불경 내용을 붓글씨로 일일이 써서 보급하던 시절인데 한지에 경판을 도장 찍어내듯 빠르고 쉽게 복사하여 책으로 엮어내는 이러한 혁명적인 인쇄기술을 개발한 것은 우리 나라 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앞선 기술로써 목판인쇄술의 금자탑을 이루었다.

 

이러한 자랑스러운 8만 대장경이 이곳 강화에서 만들어졌다 하니 우리 강화는 목판 인쇄술의 개척지요, 우리 조상의 자랑스런 창조적인 정신의 뿌리가 서려 있는 고장이라 하겠다. 1995년 유네스코에서는 우리 나라 8만 대장경판을 세계 인류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으니 더욱 자랑스럽다.

 

1) 선원사

 

선원사는 강화 선원면 '선행리'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절은 볼 수 없고 절터만이 남아 있다. 선원사는 속대장경을 보관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대장경판이 최초 보관된 곳은 강화읍 서문 밖 '판당'인데 그 후 선원사에 보관하였고, 고선 시대에 이르러 선조 7(1238)에는 한양으로 옮겼으며, 다음해 다시 경남 해인사로 옮겨져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선원사는 고려의 권신인 최우가 세운 절로서 당시 전라도 송광사와 함께 한국 3대 사찰의 하나였다고 한다. 197611월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이 선원면 지산리 '도감' 마을에서 조사를 한 결과 이곳이 선원사지 터임이 판명되었다. '도삼'마을은 옛날 '대장도감'이 있었던 곳이요, 이곳이 대장경판을 만든 장소라고 추측을 하고 있다.

 

2) 두 번의 대장경 경판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대장경을 두 번 제작하였다. 첫 번째는 고려 현종 때 글안의 침입으로 개경이 점령되었는데, 이때 현종은 불심에 국난극복을 기원하고자 대장경을 만들었고 이로 인해 글안이 물러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 경판은 64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완성하여 대구지역 '부인사'에 보관되었는데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귀중한 경판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두 번째는 몽고의 침입으로 고종이 개성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긴 지 5년 만인 1237년에 만조백관과 함께 불전에 국난극복을 기원하고 대장경판 제작사업을 결심하여 대장경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3) 대장도감 설치 운영

 

고종은 강화도에 대장경 제작을 감독하는 대장도감을 두고 그 분소를 경상도 남해에 설치하여 제작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대장경판은 16년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대장경판을 만드는 나무로는 자작나무가 으뜸으로 제주도와 완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자라는 흰자작나무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이런 목재를 경판으로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오래도록 썩지 않도록 장기간 바닷물에 담가 두었다가 이를 건져내어, 다시 그늘에 오래 말려 조각에 착수하기까지 6년이란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남해도는 몽고의 병화가 미치지 않는 곳이며 경판 목재를 구하기 쉽고 또한 해로를 통해 강화도로 수송하기 편하기 때문에 이곳에 분소를 두게 되었다고 한다.

 

4) 경판

 

경판의 크기는 가로 22cm, 세로 69.6cm, 두께 2.6cm3.6cm, 무게는 3.4kg이다. 경판의 양쪽 끝에는 각목으로 휘지않게 조이고 네머리에는 견고하게 구리쇠를 붙였으며, 옻칠을 하여 변질을 막았기 때문에 경판은 800여년이나 되었으나 아직도 무쇠처럼 단단하다. 경판의 글자 크기는 6, 경판마다 글자수는 14자씩 23줄로 새겼다. 경판의 실제 매수는 81,240여개나 되는데 8만 대장경판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5) 해인사

 

경판 보고나을 위해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 온도, 통풍, 습도, 광선을 고려하여 자연 현상을 최대한 응용하는 등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경판의 손상을 피하여 오랜 세월 원상태로 보관하고 있다.

 

 

4. 독창적으로 개척한 강화 화문석

 

화문석은 강화인이 개척해 낸 특산품이다. 그 동안 강화화문석은 국내 시장은 물론 국제시작에서도 이름이 나 있는 강화의 진귀한 특산물이 되었다. 이 화문석을 만들기 시작한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대개 고려 중기 이후부터 가내에서 수공업 형태로 시작되어 이어져 내려온것 같다.

 

1) 화문석 제작

 

화문석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게 된 것은 약 100여년전 강화지역에 이조 왕실로부터 화문석의 무늬를 특수하게 제작하라는 명이 내렸다고 한다. 당시 백색자리의 생산지인 송해면에서는 학명 받은 문양을 제작하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해 보았으나 실패만을 거듭하게 되었다고 한다.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무척 고심하던 중 송해면 양오리 '한충교'(당시 18)란 젊은이가 있었는데 이 분이 여러 가지 연구 끝에 하명 받은 문양 제작에 성공을 거두게 되어 화문석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가지로 품질 개량에 노력을 기울인 결화 오늘날과 같은 공예품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2) 화문석의 종류와 만든 방법

 

화문석은 '꽃돗자리''등메'가 있고 만드는 재료도 '왕골'''의 두종류가 있다.

 

꽃돗자리 : 강화군 송해면 양도리에서 '왕골'을 재료로 만드는 돗자리다. 돗자리를 만드는 방법은 삼각형으로 된 왕골 껍질을 벗겨 손으로 엮으면서 여러 가지 색을 물들인 왕골을 덧겹쳐 무늬로 짜내는 방법으로서 그 기법에 특이하다고 한다.

등메 :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에서 ''(조리골)로 만드는 돗자리다. 그 기법은 먼저 ''로 짠 백색돗자리에 별도로 물들인 색색의 ''을 가지고 무늬를 전문적으로 놓는 사람이 송곳으로 무늬 사이를 벌려 색색의 ''을 끼워 수놓듯이 무늬를 만드는 방법이 꽃돗자리와서로 다르다고 한다.

무늬의 종류 : 무늬는 십장생문, 호문, 만화문 등이 있고 색칠자, 흑칠자, 색오자, 흑오자문 등 7종의 화문석이 생산되고 있다.

 

3) 화문석 생산

 

화문석은 대개 가정에서 수공업 형태로 생산되기 때문에 생산자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많을 때는 약 4천 세대에서 적을 때는 2천 세대 정도가 종사하고 있으며 생산량은 4만장에서 3만장 정도가 된다고 한다.

 

 

5. 직물 생산의 개척지

 

강화는 육지와 동떨어진 섬지역이지만 직물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약 400년 전부터 직물 생산이 활발히 이루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반포나 백목면을 짜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60여 년 전부터라고 하는데 직물 제조기를 개량하여 직물 생산의 변화를 불러일으킨 '김흥식'은 강화 직물 개척의 선구자다. 개발한 제조기를 이용하여 질 좋은 비단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자 강화 직물은 전국적으로 인기 있는 제품이 되었고, 수요가 급증하면서 1960년대에는 공장수가 60여 개나 되었으며 소비량도 계속 증가하여 전국 소비량의 70%를 차지한 때도 있었다. 5060년대 우리 나라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직물 생산의 새로운 방법을 창의적으로 개발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음은 이 고장의 정신적 뿌리인 진취적인 개척정신이 그 힘이라고 생각된다.

 

1) 직물공장

 

강화 지역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주로 안견직, 면직물 그리고 소창, 면사와 같은 상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넥타이나 커텐지와 같은 특수 제품도 생산된다. 섬유 공업의 대표적인 업체들은 다음과 같다.

 

·심도견직 ·고양방직 ·남화견직 ·동방직물

 

·이화견직 ·경도직물 ·평화견직 ·경화방직

 

 

6. 우리 나라 최초의 강화도 수호조약

 

강화도는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한강 하구에 자리잡고 있어서 수도의 관문이요, 군사적 요충지로써 그 중요성이 매우 크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구한말에 있었던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11) 같은 두 차례의 양요의 회오리 속에 휘말려 많은 수난을 겪게 된 고장이기도 하다. 특히, 1875년에 일어난 운양호사건은 일본인들의 한국 침략에 대한 구실이 되어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로써 강화는 우리 나라 문호 개방의 시발지가 됨으로써 개화의 역사적인 선구지가 되었다. 이 강화도수호조약에 의해 부산, 원산, 인천항이 차례로 개항하게 된 것이다.

 

1) 운양호사건

 

서구 문명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국력이 커지자 대륙 진출의 야망을 품고 한반도를 그 발판으로 삼고자 우리 나라에서 외교적인 절충을 벌였으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밀려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있던 차에 우리 나라 조정에서는 대원군과 민비파가 대립하여 국정이 흔들이는 틈을 이용, 일본인들은 군함을 동원하여 우리 나라 동서 해안을 침입, 해안을 측량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분쟁거리를 만들고자 18758월 운양호가 인천 앞바다에 들어왔다. 이 들은 인천 앞바다를 배회하면서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하자 불법으로 침입하는 외국 선박을 경고하고자 해안 포대에서 포를 쏘았는데, 일본인들은 이를 트집잡아 운양호에 대한 보상과 포격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게 되었고, 또한 이 문제를 그들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대안으로 수호조약으로 통상수락을 요구하게 되어 이에 대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2) 강화도 수호조약 체결

 

고종 1312: 일본군함 맹춘호 경기도 남양만에 정박하여 일본측 미야모도, 모리야마와 남양부사 강문과 접견 절차 협의

 

(1) 13: 일본군함 맹춘호 강화 초지진 도착 강화부사 박재근과 일함장 가시마 절충

 

(2) 15: 어영대장 신관호를 접견대장 윤자승을 부관에 임명 일본과 협상

 

(3) 116: 일본측 대표와 강화도에서 회담 개최(일본측 대표 '구로다' 갑곶진에 상륙)

 

(4) 211: 강화부 연무당에서 회의 개최 한국측 신관호, 윤자승, 홍대동 등 4

 

일본층 구로다, 이노무에, 미야모도, 모리야먀 등 4명 회담 1,2,3차 진행 강화읍 진무영(현 군농협)

 

(5) 227: 양국 대표 연무장에서 강화도수호조약(한일수호조약) 12개조항 조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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