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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전망차

민화 개명작업

by 형과니 2023. 4. 16.

민화 개명작업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7-09-19 11:32:00


민화 개명작업


한때 민가의 다락문 그림이 수난을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민화라는 것이 골동품으로 인정받자 도둑이 눈독 들이는 것이었다. 주인이 잠들어 있건 빈방이었건 면도를 사용했는지 감쪽같이 뜯어갔었다. 도둑을 맞고 나서야 허전하게 찢겨나간 다락문을 보며 주인은 넋나간 듯했었다. 그것은 평소의 소원하는 뜻이 담기면서 생활공간의 벽화 같기도 했었다.


아낙들의 규방 안방에는 부귀다남이나 부부간의 금슬을 상징하는 내용이었고 남정네의 사랑에는 학문을 뜻하는 서책과 문방사우를 소재로 하는 그림이었다. 현관과 방문에는 수호신인 호랑이와 청룡, 대청엔 삼강오륜을 나타내는 충효예의의 윤리문자가 액자에 담겨 걸렸었다. 이런 민화는 문짝의 장식만이 아니었다. 병풍과 족자로도 장식되었다.


민화의 소재로는 효를 의미하는 잉어와 죽순 부부의로 원앙이나 꿩 그림이었다. 잉어와 죽순은 옛날 중국의 효자 왕상과 맹종의 고사에 연유했다. 얼음속에서 잉어와 눈속에서 죽순을 구해 늙고 병든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이야기인데, 지극한 효성에는 불가능도 가능케 한다는 교훈이었다. 그런가 하면 아들 낳기를 원하는 연꽃과 잉어 그림도 있었다.


민화라는 말이 우리사회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였다. 그러나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우리예술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가 ‘불가사의한 조선민화’를 발표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겨레의 얼굴이라고 해도 좋을 민화를 우리는 전통적 미관에 맞지 않는다고 천대했었다.


이런 민화를 모아 꾸민 조선민화박물관이 영월군 김삿갓 묘소 입구의 골짜기에 있다. 대표는 인천시청 직원도 지낸 바 있는 인천출신이다. 연전에 사정을 알게 된 연수구청장이 인천에로의 유치를 꾀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었다. 지난 99년 가을에는 인천에서도 인천전통민화협회 창립전이 열린 바도 있었다.


지난 주 전통회화학회준비위가 민화의 새로운 이름을 정하자는 워크숍을 열었다고 한다. 민화라는 단순한 총칭으로는 겨레의 문화적 풍속 전통 감정 등 특성을 나타내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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