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현대 교통의 발상지
仁川愛/인천-원조&최초&최고인것들
2007-01-14 20:05:20
인천은 우리 나라 개화기 서구 여러 나라의 문물이 일찍 들어온 고장이요 또한 수도의 관문인 관계로 개항 이후에는 많은 외국사절이나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여러 가지 화물 또한 날로 증가하였으나 경인간의 도로나 교통시설은 매우 열악하여 화물수송이나통행에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천에서 경성에 이르는 80리 길은 우리 나라 개화의 새로운 문물이 들어온개화 1번 도로로서 국내외의 깊은 관심 속에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하여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생긴 경인철도를 비롯하여 경인고속도로와 전철이 개통된 자랑스런 그 역사의 현장이 살아있는 현대 교통의 발상지다.
우리 나라 최초의 교통 시설
경인철도개통 : 1899년 9월 18일
경인복선개통 : 1965년 9월 18일
경인고속도로개통 : 1968년 12월 2일
경인전철개통 : 1974년 8월 15일
1. 철도 개통전의 옛 길
개항후 제물포에서 서울로 갈 수 있는 교통로는 육로와 해로의 두 길이 있었다.
1) 경인도로
옛 경인간의 도로는 사람들이 도보로 다닐 수 있는 보잘것없는 소로길이었다고 한다. 서울을 가자면 제물포나 인천읍 지역에서 출발하여 부평과 오류동을 지나 영등포를 거쳐 다시 양화진에 이르러 배를 타고 마포에서 내려 서울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길은 개항 후 외국 사절이나 무역상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유일한 도로의 확장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정부에서는1883년 11월 노폭을 2m 정도로 확장하여 우마차가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도로는 포장된 도로가 아니기 때문에 노면이 고르지 못하고 특히 비가 오거나 장마 때가 되면 땅이 질어 통행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한강이 범람하게 되면 통행이 수개월씩이나중단되는 등 매우 불편했던 것 같다. 그 후 1905년에는 이 길이 개수되면서 자동차가 다닐만한 신작로로 변하게 되었고 1915년에는 본격적으로 노면 확장 공사가 이루어져 노폭 10m의 넓은 도로로 발전하였으며 1931년에 이르러서 현재와 같은 경인도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2) 오류원
오류원은 개항 후 경인간을 왕래하던 외국인과 우리나라 관리들이 말을 갈아타고 다닐 수 있게 역마 15필이 배치되었으며 그 외 행인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식사와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경인철도 개통으로 오류원은 폐지되었다.
제물포, 인천읍(현 관교동) - 경신역(수산동 경신마을) - 성현(만수동 비류고개) - 동소동(부평) - 역곡 - 오류원(오류동) - 영등포 - 양화진(한간나루 이용) - 마포 또는 용산 - 한양
2. 경인간의 교통 수단
경인선 개통 당시의 화차길이 확장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교통 수단이 생겨나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철제 마차 두 대를 들여와 영업을 시작했으나 시운전을 해본 결과 수지타산이 안 맞아 철수하게 되었고 그 후 1894년경에는 일본인들이 인력거 10대를 들여와 본사를 서울 용산에 두고 경인간의 손님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청국인들은 원세계가 중심이 되어 북경에서 수레를 들여와 영업을 하기도 했으나 청일전쟁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그 외 교통 수단으로는 우리의 전통적인 가마와 조랑말이 사람과 짐을 나르기도 했다고 한다.
자동차 교통
1919년 8월 : 승용자동차 첫 영업
1928년 : 인천에서 화물자동차(트럭) 경인간 화물수송 개시
1929년 5월 : 경인버스 주식 회사 첫 버스 운행(1일 3회)
교통운임
가 마 : 1인당 16$(4인이 끄는 가마)
인력거 : 1인당 5$
조랑말 : 1인당 3$
3. 경인간 뱃길
경인철도가 생기기 전에는 많은 화물을 모두 배를 이용하여 운반하였는데 주로 제물포에서 강화수로(염하)를 거쳐 한강 입구에서 김포반도를 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마포에 이르는 해로가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천에서 강화에 이르는 해로는 이 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항해하는 배는 수심이 깊은 갯골을 따라 배를 운항하지 않으면 배가 갯벌에 좌초되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율도 앞을 거쳐 세어도를 지나 김포와 강화의 좁은 해로인 염하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곳은 물살이 빠를 뿐 아니라 특히 염하로 들어가는 입구의 손돌목은 그 바닥이 바위 층이고 위험스럽게 도사린 돌부리가 많아 옛날부터 배가 파손되는 험지로 이름난 곳이다.
1) 해운업
인천과 서울을 연결하는 육로는 길이 좁고 열악해 화물 수송이 어려웠기 때문에 개항기에는 대개 배를 이용하였다. 배로 제물포에서 용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8시간 정도인데 날씨가 나쁠 때는 30시간까지 걸렸다고 한다. 그 후 새로운 배가 취항하면서 5시간에서 6시간 정도로 크게 빨라졌다고 한다.
2) 해룡호
해룡호는 1886년 7월 인천에서 용산을 운항한 최초의 기선이다. 이 배는 주로 정부에서 운영하는 배로 세곡을 운반한 기선이었다고 한다.
3) 용산호와 삼호호
이 배는 조의윤이란 사람이 삼산 상회를 설립하고 1888년 8월 일본에서 구입한 배다. 인천과 용산간을 운항하면서 주로 사람과 화물을 수송해 오다 불행하게도 그 해 11월 삼호호가 강화수로에서 좌초 침몰하고 말았다. 그 외에 1866년 대홍 상회와 1888년에 설립한 삼호 상회가 배를 운영하면서 인천과 마포간을 운행했다고 한다.
4) 제강호
1889년 인천에 세창양행을 운영하던 독일인이 제강호(35톤)라는 최초의 쾌속정을 들여와 인천과 마포간을 정기적으로 운항하였는데 배가 빨라 모두들 선호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배도 결국 동년 9월 15일 강화수로에서 침몰했다고 한다. 이처럼 한강을 이용한 해운업은 위험 부담이 매우 컸고 경인간의 육로 도한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해 날로 늘어나는 교통문제 해결을위해 자연히 철도부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4. 경인철도
미국인 '모오스'(James R. Morse)는 1896년 3월 29일 조선정부로부터 경인간의 철도 부설권을 받아 인천에서 타운선 상회를 운영하던 미국인 타운센트(W. Townsent)와 손을 잡고, 콜브란(Collbran)을 기사장으로 임명 1897년 3월 22일 인천 우각현(일명 쇠뿔고개, 도원고개)에서 역사적인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자금에 쪼들리게 된 '모오스'는 1899년 1월 31일 일본인에게 철도 부설권을 넘겨 결국 일본인들이 공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1899년 4월 23일 제2차 기공식을 하인천역에서 갖고 공사를 마무리하여 1899년 9월 18일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공사를 마무리짓고, 우리 나라(32.8km) 최초의 철도가 개통되었던 것이다.
그 후 한강 철교가 완성됨에 따라 1900년 7월 5일 인천에서 서울 종착역인 서대문역까지 전구간이 개통되어 본격적인 철도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906년 4월 : 우각동역이 폐지됨
1908년 : 주안역이 새로 신설됨
1908년 12월 : 옛 청과물 시장 부근에 있었던 축현역이 선로 변경으로 현 역사 위치로 역사를 신축이전
개통시의 정차역(인천, 축현. 우각동, 부평, 소사, 오류동, 노량진)
차운행 : 1등급 1원 50전 편도, 2등급 80전, 3등급 40전
철도 우편물 수송 - 1901년 1월 1일 개시
탁송 화물 취급 - 1906년 1월 4일 개시
최초의 기관차
미국 브룩스공장제(모갈형 35통)
객차 보기식 중앙관통식(목재)
(길이 : 50척, 폭 : 9척 8촌, 무게 : 5천 파운드)
※ 이 기관차는 1898년 인천철도회사에서 부품을 미국에서 들여와 조립했다고 함.
※ 우리 나라 최초의 철도공장 인천에 있었으나(1898년), 경인철도 개통 후 용산으로 이전했다고 함.
'인천원조&최초&최고인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최초사 박물관’에 가면 알 수 있다 (0) | 2023.03.19 |
---|---|
우리 나라 근대 통신의 개척지 (1) | 2023.03.10 |
우리 나라 최초의 기상대 (0) | 2023.03.10 |
[인천이 원조]정미소 (0) | 2023.03.09 |
[인천이 원조] 보육원 (0) | 2023.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