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근대 통신의 개척지
仁川愛/인천-원조&최초&최고인것들
2007-01-14 20:06:10
1. 우리 나라의 근대적 통신망
수도의 관문인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이 곳에 진출한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서로 겨루면서 우리 나라로부터 각종 이권을 얻어내고자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언제나 외교전에서는 새로운 상황 변화에 대한 정확하고도 빠른 정보를 입수하는 일이 바로 외교전의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통신 수단을 확보하는 일에 깊은 관심이 모아졌다.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에는 아직 현대적인 통신수단이 도입되지 못한 때인만큼 통신 연락에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 진출한 여러 나라들은 근대적인 통신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사업을 따내기 위한 각축전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특히 청국과 일본의 경쟁은 매우 치열하였다고 한다. 개화기 우리 나라의 신경맥이라고 할 근대적인 통신망이 이루어지기까지 청·일간의 경쟁적인 활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부산의 해저전선
고종 20년(1883) 1월 24일 일본인들은 임오군란으로 입은 피해보상을 요구하면서 그 댓가로 한·일 두나라를 연결하는 부산에서 '나가사끼'까지의 해저전선 사업권을 따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다시 덴마아크의 대북(大北)전선 주식회사에 시공권을 넘겨주어 결국 '대북전선' 측의 공사로 고종 21년(1884) 2월 28일 개통을 보게 되었다.
부산에서는 우리 나라 외교활동의 중심지인 한성과 제물포를 연결하는 통신시설이 없고, 또한 육로 교통 수단마저 불편하기 때문에 아무리 급한 연락도 일본에서 보낸 전신이 부산에 접수되면 이를 다시 배편을 이용하여 제물포에 보내고, 이를 다시 한성까지 보내자면 일주일에서 2주가 결렸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우리 나라에서 첫 번째로 해저 통신권을 따내기는 했으나 큰 실속은 없었던 것 같다.
2) 인천 기점의 우리 나라 최초의 육로 전선
◀ 국제 무선망로
한 국가의 신경 조직과 같은 구실을 하는 통신의 중요성을 인식한 구한말 정부에서는 청국의 지원을 받아 청국과의 육로전선을 가설하고, 이홍장에게 차관을 교섭하여 1885년 6월 6일 조·청전선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의거 청국의 자본과 기술을 제공받아서 1885년 8월 15일 제물포에서 서울을 연결하는 경인간 전선이 최초로 완공되었고, 1885년 9월 25일에는 제물포 청국 이사청(영사관)내에 화전국(華電局)이 설치되어 전신 업무가 시작되었다. 1885년 10월 다시 한성에서 의주간의 전선이 설치되고 청국대륙의천진과 연결됨으로써 제물포 - 한성 - 의주 - 천진 - 상해로 이어지는 우리 나라 최초의 육로전선이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이전선은 상해를 거쳐 일본까지 연결되는 국제적인 전산망으로 그 활용가치 또한 컸다고 한다. 1886년 2월 19일에는 한국과 청국간에 인천 - 한성 - 부산을 연결하는 전선조약을 체결하여 한성에서 부산을 연결하는 전선이 새롭게 생겨나게 됨으로써, 한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청국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선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또한 구한국 정부의 손으로 광무 1년(1897) 5월 경인간의 전신선도 가설하였다.
2. 우리 나라 최초의 전화 개통
1876년 3월 1일 미국의 '그래함 벨'이 이 세상에 최초로 전화를 발명한 이후 서구 여러나라에 전화가 급격히 보급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벨'이 전화를 발명한지 26년이 지나서 광무 2년(1902) 1월 28일 처음 전화(자석식 교환방식)가 도입되었다. 한성에 통신원(通信院)이 발족되어 서울, 인천간의 전화선을 가설하고 그해 6월에 우리 나라 최초의 전화업무가 개시되었다. 당시 서울에는 덕수궁을 중심으로 각 아문(중앙의 관청)과 연결되고 동시에 인천을 연결하는 전화가 개통되었던 것이다.
* 전화가입자 - 서울 50명, 인천 30명, 영등포 1명, 수원 1명
* 전 화 요 금 - 가입금 : 15원 / 사용료 : 대당 연100원 / 통화료 : 5분 마다 50전
1908년에 이르러 인천 - 서울 - 용산 그리고 인천 - 평양 - 진남포와 연결할 수 있는 장거리 전화가 개통되었다고 한다.
3. 최초의 월미도 무선전신
강희 4년(1910년) 9월 구한국 정부에서 인천 월미도에 무선전신소를 설치하고, 이 지역의 해안을 순시하는 광제호에 무선 시설을 설치한 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무선전신이다. 광제호는 인천항을 드나드는 배의 항로를 순찰하고 세관 감시를 하는 등 매우 중요한 일을 수행했다고 한다.
당시 월미도 무선전신은 민간인들이 전신을 이용할 수 없었고 주로 감시 활동선과의 연락과 외항선에서 보내는 관보를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한 특별히 일본인들이 수발신하는 전보 내용만은 인천 우편국과 교신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본격적인 무선 업무가 확대된 것은 1923년 6월 7일에 경성 무선국이 새로 설립되면서 1925년에는 그 기구가 지방에까지 확대 설치되어 인천, 목포, 진남포, 청진 등 여러 해안의 주요 항구에 새로운 무선지국이 탄생되었다.
이처럼 무선국이 지방별로 생기면서 우리 나라 최초의 인천 월미도 무선전신소는 자연 폐쇄되었다. 이 무선전신소는 원래 월미도 산 정상의 포대자리에 있었다고 하며 폐쇄후에도 오랫동안 그 가옥과 안테나가 남아 있었으나 1932년 봄 화재로 흔적마저 사라져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4. 우리 나라 최초의 우체국
고종 21년(1884년) 3월 27일 칙령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우정제도가 공포되어 한양에 우정국이 창설되었다. 같은해 11월 17일 우정 업무가 시작되면서 이 때 인천에도 우정총국 인천분국이 설치되어 우정 업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초대 국장에 월남 이상재가 임명되었으며 당시 인천분국은 인천항 감리서 안에 설치되어 경인 지역의 우편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아깝게도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이 개설 17일만에 폐쇄됨에 따라 인천분국도 없어지고 말았다.
1) 인천우체사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 인천분국이 사라진지 10여년이 지나서 고종 32년(1895년) 음 6월 1일 한성과 인천에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우체사가 설치되었다. 인천우체사는 인천부 외리 226번지(현 조흥은행자리)에 자리를 잡고 초대 책임자로 김장한이 주사 2명과 수명의 집배원으로 우편업무를 시작하였으며 1898년에는 내리(현 내동) 103번지에 새로 청사를 짓고 이전했다고 한다. 인천우체사는 그 후 광무 9년(1905년) 5월 20일 일본 침략으로 안타깝게도 21년만에 폐쇄되었다.
2) 우편물 수송
우편물 운반 - 운송인이 보도로 운반
출발 시간 - 인천과 서울우체사에서 오전 9시 출발
우편물 교환 - 교환지는 오류동, 시간 : 1시, 우편물을 서로 교환
도착 시간 - 5시 30분(각 우체사)
※ 우편물 수송시간 8시간 30분 정도 걸림
경인간에 기차가 생기기 전에는 우편물 수송은 모두 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초창기는 우편물의 양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우편물을 우편낭에 넣어 우송인이 이 배낭을 메고 1시간에 십리 정도의 속도로 걸어 다녔다고 한다.
경인간에 우편물이 수송되면서 우편물을 노리는 도적들의 무리가 자주 출현하여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도적들은 권총이나 일본도로 무장하고 특히 우편물을 교환하는 오류동 근처에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우편물 수송에 각별한 대책이 강구되었다고한다.
3) 일본인 우편국
개항이 되면서 일본인의 진출이 늘고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일본인들의 우편물이 배편으로 제물포항에 많이 들어오게 되자 일본인들은 고종 21년(1884년) 4월에 일본인 우편국을 개설하게 되었다. 당초 이 우편국은 일본 영사관내(현 중구청)에 설치되었으나 1888년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인천우편국 출장소가 생기기도 했다. 1896년에는 신청사를 지어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우편업무가 확대되어 우편저금, 외국환 소포 우편을 취급했다. 1924년 12월 현 인천우체국을 신축하여 이전된 이후 현재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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