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民亂)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11-25 14:02:25
민란(民亂)
미추홀
1893년 6월 14일, 인천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인천부의 이교(吏校)와 병민(兵民) 수백 명이 인천감리서를 습격해 중상자만 16명을 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민란의 발생 원인이나 난민들이 등소(等訴)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박광성 선생은 생전에 '고종조(高宗朝)의 민란 연구'에서 "당시는 인천부사가 인천감리를 겸임하고 있던 때인데, 인천부의 이교와 병민이 함께 감리서를 부수고 관리를 구타한 것은 감리서를 위주로 하고 인천부를 소홀히 하는 데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니었던가 짐작이 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고 전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주모자인 이방(吏房) 이인승(李寅升)의 죄를 물어 섬으로 귀양 보내고 중군(中軍) 이동석(李東錫)과 등소를 주창한 김재진(金在進), 시종 참여한 하형오(河衡吾) 등 7명에게는 형배(刑配)를, 병졸 김응원(金應元) 등은 징방(懲放)하였다.
부사 성기운(成岐運)을 파면시킨 것으로 인천 민란은 일단락됐지만 크고 작은 소요가 전국 각처에서 끊이지 않았다. 고종 재위 기간에만 1864년 황해도 풍천부를 시작으로 해 무려 47건이 경상, 전라, 충청, 황해 일원에서 일어났다.
그 때마다 조정은 학정을 저지른 탐관오리 등을 처벌하고 민심을 수습한 후 대부분 몰락한 양반, 농촌 지식인, 지방 명문가 출신인 주모자를 색출해 효시(梟示)하는 등 극형에 처했다. '왕권에 저항한 백성'들에게 '공포'를 각인시켰던 것이다.
야당이 BBK 사건의 처리 결과에 따라서는 "전국적 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해 물의를 빚고 있다. '김대업 학습 효과'라고는 하지만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대응과 공세가 가히 점입가경이다. 우리의 정치, 아직은 갈 길이 멀고 먼 것 같다.
/조우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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