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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동이야기

"굴까다가 이렇게 늙었네... "

by 형과니 2023. 5. 3.

"굴까다가 이렇게 늙었네... "

仁川愛/만석부두 관련 스크랲

 

2007-03-07 15:42:51

 

"굴까다가 이렇게 늙었네... "

 

만석동에 올라와... ‘깡깡일’,‘굴까기힘든노동 이웃과 정 나누며 버텨내

 

내고향은 황해도 송화군 진풍면 초도린데 지금 고향가면 뭐해 아무도 없는데. 그래도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 참 살기 좋은 곳이었는데......“

 

만석동 43번지 굴막에서 굴을 까는 김순애 할머니(75)의 고향은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산의 하나로 꼽히는 구월산이 바라다 보이는 초도라는 작은 섬이다. 초도에서 김할머니는 20살 까지 살았다.

 

작은 섬이라도 살기 좋았어. 우리마을은 70집 정도가 살았는데, 옥수수, , 차조 같은 것을 키워 먹었어. 바다가 얼기 전에 배를 타고 남포로 나가 쌀도 사고 성냥 같은 건 미리 사왔어. 논이 없어 쌀이 귀하긴 했어도 섬엔 먹을게 지천이었지.”

 

구월산이 바라다 보이는 초도가 고향

 

김할머니 고향에서는 멀리 진남포제련소 굴뚝이 보였는데 마을 어른들은 늘 제철소에 연기가 끊기면 마을에 재앙이 올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진남포 제철소의 연기가 멈추고 6.25전쟁이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은 일주일정도만 섬을 떠나있으면 된다는 해병대 말을 믿고 배를 타고 거제도로 피난을 갔다.

 

일주일 나가 있으려고 했던 게 벌써 60년이 다 돼가네. 부산에 내렸다가 다시 거제도로 갔는데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애.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지, 거긴 숯 굽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더라구. 그래 새벽에 산에 올라가 숯 굽는 사람들이 쳐 놓은 나뭇가지 한짐해서 우포시장에 가면 두 세 시가 되는거야. 그럼 그거 팔아서 쌀사고 그랬어.”

 

김할머니는 나무를 해서 산에서 내려 오다 종종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들렀다. 혹시 열일곱에 해병대에 입대했던 남동생 소식이나, 고향사람들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막내가 태어나고 만석동으로 올라와

 

수소문 끝에 남동생의 소식을 들은 것은 부산 용두산에 있던 해병대 사령부에서 였다. 전사자 명단에서 동생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할머니는 스물셋 되던 해에 사촌오빠의 소개로 황해도에서 피난 온 남편을 만나 부산 남부 면동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은 공동수도에서 물을 받아 국제시장을 다니며 물장사를 했다. 김할머니도 집에만 있을 수 없어 물동이를 이고 부산 산동네를 다니며 물장사를 했다.

 

부산에서 김할머니는 아들 셋, 딸 둘을 낳았다. 할머니와 남편이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막내아들을 낳던 해 인천 만석동 똥마당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만석동에서 갯일을 하면 부산 보다는 생활이 나을 것 같았다.

 

남편은 부두나 곡물상에서 손수레에 짐을 싣고 날라주는 짐꾼을 했다. 할머니는 송월동이나 지금의 대한제분 근처에 있던 공동수도에서 물을 받아 근처 조선소에 물을 대주었다. 또 틈틈이 조개도 캐고 굴도 까면서 생활해 나갔다.

 

남편이 55살 때 갑자기 구루마 끌다가 길에서 쓰러져 죽었어. 그때 막내가 6살 이었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그때는 살아서 안 죽으니 살았지...... 그때부터 애들 굶기지 않으려고 일이 있으면 뭐든지 했어. 여름에는 바지락 캐고, 가을, 겨울에는 굴 따서 팔고. 일이생기면 배에서 깡깡일 하고.”

 

할머니가 하신 일 중에 가장 힘들었던 일은 배에서 녹을 벗겨내는 깡깡일이었다고 한다. 한여름에는 배의 철판이 햇볕에 달아올라 말도 못하게 덥고 겨울에는 바닷바람에 손과 발이 꽁꽁 얼어붙었다.

 

삼일을 꽁공 언 보리밥 먹으며 굴땄지

 

그래도 깡깡일은 저녁에 아이들을 볼 수 있으니 그나마 나은 일이었다. 굴을 따러 강화도 삼선으로 배를 타고 나가면 삼일씩 집에 못 들어오곤 했다.

 

"그때는 렌지가 있나 뭐가 있나. 집에서 보리밥해서 배타고 나가면 이틀이고 삼일이고 꽁꽁 얼은 보리밥 먹으면서 굴 따는 거야. 잠도 배에서 새우잠자고. 그렇게 하고서 만석부두에 배가 닿으면 새벽 두 세시야. 굴막으로 굴푸대 져 나르고 집에 들어가 아이들 자는 얼굴을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저것들 굶기지는 말아야 할텐데 하는 생각만 들어. 지금이야 아이들 다 컸으니 이런 말도 하지.”

 

김할머니는 지금도 만석고가 밑 굴막에서 굴을 까서 팔고 있다.

 

할머니는 움직일 수 있을 때 까지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예전에 비해 일이 편해졌지만 벌이는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아이엠에프 전에는 집에서 잔치하는 집 들이 있어서 장사가 좀 되었지만 요즘은 단골손님들만 가끔 찾는다고 한다. 구청에서 새로 지은 굴막에 들어가면서 굴막임대료며, 연탄값이며, 굴껍데기 치우는 값이 수월치 않게 나가 더욱 힘들다고 한다.

 

김할머니는 요즘도 아침730분이 되면 굴막에 나와 굴을 까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까지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허리가 아파 굴까는 일이 점점 힘들어 지지만 그래도 굴막에 나가면 함께 굴까는 이웃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고향사람들도 찾아와 만나니 좋다고 한다.

 

굴까다 이렇게 늙었네. 지금 시집갈 수 있는 나이면 얼마나 좋을까. 쓸데없는 소리 쓰지 말고, 우리집 굴 참 좋다고 소문이나 내줘하시며 밝게 웃는 김할머니는 평생 노동으로 단련돼 있어서 인지 아직도 건강해 보인신다.

 

참 좋은 굴을 판다고 자랑하시는 김할머니는 오늘도 신만석고가 밑 새로생긴 굴막 ‘6앞에서 굴을 까고 계신다.

 

(:유동훈/만석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