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이야기

소서노-고구려·백제 건국한 고대사 최고 여걸

by 형과니 2023. 3. 11.

소서노-고구려·백제 건국한 고대사 최고 여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9 00:18:45


고구려·백제 건국한 고대사 최고 여걸

 

비류·온조 두아들 둔 과부…추모와 재혼하며 고구려 건국 전념

남편에 배신 당해 세 모자 망명…고난의 행군 끝에 백제 세워

 
초기 백제 가락동 유적에서 발굴된 원통형 그릇받침. 백제의 국모 소서노도 이런한 토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소서노(召西奴)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뒷날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 우리 고대사 최고의 여걸이다. 그러면 무슨 까닭에 아직도 이처럼 대단한 여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인가. 역사교육이 잘못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숱한 전란으로 대부분의 역사기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서노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도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겨우 몇 줄 실려 전해온 덕분이다. 동명성왕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했고, 비류·온조 형제를 이끌고 망명하여 백제를 건국했던 실질적 여왕 소서노, 나라를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만들었던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여걸 소서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펴본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본명은 추모(鄒牟). 일세의 영걸 추모가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망명할 때 그의 나이 21세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급박한 상황인지라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과 임신 중인 아내 예씨(禮氏)도 그대로 버려둔 채였다. 그를 따른 사람은 오이·마리·협보 등 심복 셋뿐이었다. 그리고 모둔곡을 지나다가 무골·재사·묵거 등 세 사람과 그 무리를 거두어 졸본부여로 들어섰다.

 

졸본 땅에 근거를 마련한 추모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꿈꾸던 나라, 조선과 부여의 뒤를 잇는 천손(天孫)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원대한 사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하지만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와 재물이 필요한 법. 소수의 심복과 불과 수백의 추종세력으로는 어림없었다.

 

그때 만난 여인이 바로 소서노였다. 나이는 비록 8세 연상이요, 두 아들을 둔 과부였지만 추모가 소서노를 만난 것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서노의 아버지가 졸본부여에서는 가장 강력한 토착 세력인 계루부의 부족장이며 대부호인 연타발(延陀勃)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 시집갔다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소서노의 눈앞에 어느 날 갑자기 젊은 영웅이 나타났으니 첫눈에 반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추모의 빼어난 인품, 준수한 용모, 늠름한 기상, 그리고 백발백중하는 신기(神技)의 활솜씨에 당대의 그 어떤 여자가 반하지 않았으랴.

 

추모는 그렇게 연타발 부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계루부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연씨 부녀의 재물을 밑천삼아 더욱 많은 인재와 백성을 끌어 모아 지지 세력을 키우며 한 해 동안 건국사업에 불철주야로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연씨 부녀의 재산과 영향력이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연상의 여인 소서노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리고 그녀의 전 남편 소생인 비류와 온조 두 형제도 친자식처럼 대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7년 10월, 만 22세의 추모는 마침내 대왕위에 올라 고구려 개국을 선포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구려의 황후가 된 소서노도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갔다. 소서노의 나이 44세에 이르렀을 때 대왕은 36세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소서노는 점점 걱정이 많아지고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국력이 강해지고 대왕의 위엄이 사방에 떨치자 자연히 후계자 문제가 당면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시 4년이 지났다. 대왕은 아직도 40세의 장년, 하지만 소서노는 어느덧 48세로 노령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늙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앞날이 문제였다. 죽더라도 대왕보다는 내가 먼저 죽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내 아들 비류와 온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둘 중 누구든 왕위를 이어야 마음 놓고 죽을 수 있겠는데, 만일 동부여의 친아들을 데려와 대를 잇게 하기라도 한다면… 생각하면 할수록 소서노는 미칠 것만 같았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소서노는 대왕에게 좇아가 맏아들 비류를 태자로 세워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대왕은 처음에는 좀더 두고 보자면서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 졸라대자 나중에는 들은 척도 않았다. 이미 애정이 식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소서노는 더욱 애가 타 기를 쓰고 졸라댔다.

 
사적 제11호로 지정된 서울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토성은 초기 백제시대의 왕성인 하남위례성으로 확실시되고 있다. 
나중에는 나라를 세울 때에 재산을 기울여 조력했던 일까지 상기시켜가며 성화를 부리니 대왕은 불같이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사랑에 속아 몸도 주고 돈도 주고 결국에는 배신당한 연상의 여인 소서노, 비극적 운명의 여인 소서노의 그지없이 뼈저리고 살 떨리는 절망감을 그 누가 알아주랴.

 

대왕은 본처 예씨와 적자 유리(琉璃)가 오자마자 이미 작정하고 있었다는 듯 황후와 태자로 책봉했다. 그뿐인가. 소서노는 소후(小后), 곧 제2부인으로 강등시켰으니 졸지에 배반당한 소서노의 설움움과, 하루아침에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비류·온조 두 형제의 쓰라린 가슴은 어떠했으랴. 그렇게 해서 세 모자는 고구려를 떠나 멀리 남쪽으로 가서 신천지를 개척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소서노 모자의 말을 들은 대왕은 말리기는커녕 잘 되었다는 듯이 많은 재물을 출국경비로 내려주기까지 했다.

 

서기전 19년 9월. 그렇게 해서 소서노는 마침내 회한만 남긴 채 졸본 땅을 영영 등지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오간·마려·을음·해루·흘우 등 열 명의 심복과 그 일족, 그리고 자신의 부족인 계루부의 수많은 백성이 소서노의 뒤를 따랐다. 소서노의 나이 그해에 만 48세였고, 비류와 온조는 각각 30세, 25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그렇게 졸본을 떠나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남쪽으로 내려가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나라를 세운 곳은 대방의 옛 땅이었다. 처음에는 ‘열 명의 신하가 보좌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가, ‘백가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나라를 세웠기에 국호를 백제라고 바꾸었으니 그해가 서기전 18년 10월. 망명길에 오른 지 13개월 만의 일이었다.

 

소서노가 처음으로 근거지를 삼은 곳은 마한 땅이었다. 마한 왕에게 재물을 바치고 땅을 얻어 변방의 소국을 자처하고 지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말갈과 낙랑과 동예 등 주변의 강적들이 신생 약소국 십제를 얕잡아보고 걸핏하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는 바람에 견딜 수가 없었다. 소서노는 자식들과 의논 끝에 보다 안전한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십제는 건국하자마자 다시 남부여대하여 배를 타고 연안을 따라 황해를 남하하기 시작했다.

비류왕과 온조 형제의 틈이 벌어진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형 비류에게 자신의 여생의 여력을 몽땅 쏟아 새 나라를 세우는데 온갖 힘을 기울이는 어머니에게 아우 온조가 시기를 하고 불만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또는 나라를 세우고도 10년이 가깝도록 정착을 못한 채 강적만 만나면 허겁지겁 보따리를 꾸려 남쪽으로 계속 도망만 치는 소서노와 비류의 소극적이며 온건한 정책에 보다 젊고 혈기 넘치는 온조가 강경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반기를 들고 나섰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대방의 옛 땅을 떠나 바다를 남하하여 배를 댄 곳은 미추홀이었다. 미추홀에 상륙한 소서노는 두 아들과 신하들을 보내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보라고 했다. 비류왕은 온조와 신하들을 데리고 강줄기를 따라 거슬러 오르다가 상류의 부아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온건파 비류왕은 미추홀에 그대로 도읍을 정하기로 결심했으나 온조를 중심으로 한 소장 강경파들은 한산 도읍을 주장하여 서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두 형제는 대판 싸우고 부아산에서 내려왔다. 신하들이 입을 다물고 그 뒤를 따랐는데 대부분 온조와 같은 생각을 지닌 소장 강경파였으므로 비류왕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싸움은 미추홀로 돌아간 다음에도 재개되었다. 소서노는 맏이 비류의 편을 들었다. 소서노와 비류왕을 중심으로 한 온건 노장파와 온조를 축으로 한 강경 소장파의 틈은 점점 벌어져갔고, 마침내 태어난 지 10년밖에 안 되는 나라, 그나마 작고 힘 약한 백제는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온조가 자신의 추종세력을 이끌고 내륙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우태와 추모에게 두 차례 시집갔다가 두 번 모두 실패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 소서노, 하지만 그녀의 비극은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엄청난 비극의 씨앗을 오랜 옛적에 자신의 자궁에서 배태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곧 비류와 온조 두 형제의 불화·반목·대립이었다. 비류도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 온조도 내 배를 아프게 하고 태어난 아들이니 그 누구도 파멸당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국모 소서노는 바닷가 미추홀과 내륙의 위례성을 오가며 꾸짖고 타이르고 눈물로 설득해보았지만 이미 틈새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양 진영은 어느 쪽도 고집을 꺾으려 하려 않았다.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위례성에 분립해 스스로 임금을 자처한 온조는 다시는 어머니와 형의 밑으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마침내 소서노는 최후의 비장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작은아들 온조를 강제로 끌고서라도 미추홀로 데려와 두 형제를 화해시켜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기습을 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야음을 틈타 소리 없이 재빨리 침입하여 온조를 감싸고도는 강경파 몇 놈만 죽여 없앤다면 나머지는 모두 항복을 하고 온조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오리라….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 정확히는 서기 6년 음력 2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소서노는 다섯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위례성을 공격했으나 난전 중에 전멸당하고 말았다. 그것이 한국고대사의 으뜸가는 여걸 소서노, 그러나 비극적 운명의 여인 소서노의 최후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조의 다음과 같은 짧은 기록은 국모를 시해한 이 참극을 은폐한 기록으로 추측된다.

 

‘왕도에서 늙은 여자가 사내로 변하고 다섯 호랑이가 입성하니 61세의 왕모가 사망했다 (春二月 王都老?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또한 비극의 해 서기 6년인 온조왕 13년이란 실은 비류왕의 재위 연대인 동시에 온조가 분립한 첫 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옳을 듯하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온조왕 13년은 곧 소서노 여왕의 치세 마지막 해요, 그 이듬해가 온조왕의 원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미추홀의 비류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재야사학자 김성호(金聖昊)씨 등의 연구에 따르면 ‘비류백제’는 그때 다시 해로로 남하하여 고마나루(熊津:공주)의 마한을 공략하여 근거지로 삼은 뒤, 서기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413년간 사직을 유지했다고 한다. 또 한편 ‘온조백제’도 비류백제가 망한 80년 뒤인 475년 장수대왕(長壽大王)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웅진으로 남천했다가 다시 부여로 천도해 의자왕(義慈王) 때에 망했다는 것이다.    

 

(황원갑의여걸열전)
 

'인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詩:유왕산에 올라 召西弩(소서노)를 그리워하다  (0) 2023.03.11
킹 메이커, 소서노  (0) 2023.03.11
홍어고개  (0) 2023.03.11
인천 구석구석, 신나는 탐사여행  (0) 2023.03.11
강화 빙어낚시  (3) 2023.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