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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킹 메이커, 소서노

by 형과니 2023. 3. 11.

킹 메이커, 소서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9 00:19:23


킹 메이커, 소서노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 서라벌의 자궁 남산에서 박혁거세가 알껍데기를 박차고 나온 바로 그 무렵, 만주의 랴오닝성에선 소서노라는 계집아이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조용하게 태어났다. 큰일을 도모할 준비였던지 청상과부 신세로 비류라는 사내애를 데리고 쓸쓸히 살아갈 적에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난 고주몽은 겨우 신하 세명 끌고 이웃나라로 도망쳐온 주제에 자기는 천제의 아들과 물의 신 하백의 딸 사이에서 태어나신 귀하신 몸이라고 떠벌리며 백발백중 만주 벌판 최고의 궁사로 이름을 날려, 열살 남짓 누나였던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토착 세력가의 딸이었던 소서노는 주몽과 커플이 돼 별 볼일 없던 왕을 없애고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바꾼 뒤 일대의 부족들을 정복하며 점점 세력을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소서노는 토착 세력의 분열을 잠재우고 주몽에게 힘을 집결시키는 킹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는 주몽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온조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 굳게 믿었지만, 주몽이 도망쳐올 무렵 엄마 뱃속에 있다가 나중에 이웃나라 왕이 된 아버지를 찾아온 첫아들 유리에게 그만 자리를 뺏기고 만다.

 

하필 그 무렵 주몽이 세상을 뜨니 원망하며 자초지종을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 땅을 떠나 현재 서울 송파구 지하철 8호선이 닿는 몽촌에 흙으로 성을 쌓고 ‘십제’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우는데 이 나라가 점차 융성해져서 ‘백제’가 되고, 장남인 비류는 뭔가 마땅치 않아 미추홀로 훌쩍 떠나 다른 나라를 세우지만 땅에 소금기가 많아 오래가지 못했다 하니, 이렇게 또 사이가 틀어진 아비 다른 두 아들을 지켜보는 어머니 소서노의 마음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을 거다.

 

남편을 고구려 시조로, 아들을 백제 시조를 만든 이 놀라운 여성 소서노의 이름은 여태껏 주몽과 온조에 가려져 있었으나,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리며 주목할 만한 우리 여성사의 인물로 새삼 부각됐다. 지난 세계여성학대회 참석자들이 초청된 충북 음성의 큰바위얼굴 조각 공원에서 그녀의 동상 제막식이 열리며 새로운 여신의 존재로 멋진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행적은 그 이름을 풀어 가라사대, 열두 거리 굿 가운데 사냥 굿을 하던 무당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작두거리에 들어가 칼을 입에 무는 형상을 보여주는 소(召)자에 멀리 서(西)쪽에서 온 큰 활을 쏘던 노(弩)자가 그녀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얘기로, 종교와 정치가 딴집 살림을 차리기 이전 공동체의 지도자다운 기상이 담긴 이름이다.

 

한반도 지킴이가 된 소서노 여신이시여, 큰 칼 입에 물고 큰 활의 시위를 힘껏 당기어 이 땅에 공연한 피 흘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모든 재앙을 거둬가소서. 당신의 후손들이 다시는 그 따위 땅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부디 천년만년 지켜주소서.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