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과 부평 그리고 부천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08-06-08 00:43:10
인천과 부평 그리고 부천
▲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바다도시 인천은 지금 동북아시아의 중심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항만·상업도시를 이루어 온 (원)인천에다가 농·공업도시 부평을 아우르고, 이어 농·수산과 문화·관광의 보고(寶庫) 강화와 옹진 등을 합하면서 동북아시아의 허브(Hub) 공항을 더해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거대한 관문이자 국제적 물류중심지, 산업·정보단지, 관광·휴양단지로 비약적인 성장을 기하고 있다.
인천지역사회(인천·부평·강화·옹진·김포 일부)가 이같이 성장·변모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가 근래에 이룩한 경제적 정치적 성장과 뒤이어 이루어진 환(環)황해권의 개방화가 인천지역의 지정학적 특성과 맞물린 때문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난날 오랜 세월에 걸쳐 인천지역사회가 쌓아 온 역사적 토양에 기반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역사 속에서 인천과 부평은 인접하기 때문에 경쟁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지만, 각기 도호부(都護府)를 두고 토지의 면적이나 인구수에 비례하는 부세(府勢)의 강약은 있었어도 오랫동안 지역의 특성을 살리면서 존속해왔다. 전근대의 행정이란 향촌사회의 효과적인 통제와 안정 그리고 이를 통한 국가재정의 확보가 우선의 과제였다. 여기에 지방행정은 속성상 전통적 보수적 성향을 지니고, 각 지역의 뿌리 깊은 전통과 강렬한 귀속감으로 결합돼 있어 군현(郡縣)의 승강(昇降)은 있었지만 통·폐합되기란 쉽지 않았다.
일제 강점 후인 1914년 일제는 인천부역(府域)을 크게 축소했는데, 이것은 일본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 투자해 일본인 중심의 도시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해 인천부역에서 제외시킨 지역과 부평을 새로 신설된 부천군에 편입시켜 버렸다. 부천(富川)은 그 지명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부평(富平)의 ‘부(富)’와 인천(仁川)의 ‘천(川)’이 합해져 탄생한 지명으로 그야말로 일제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신도시였다.
이 같은 일본인 중심의 행정구역 개편은 일본의 식민지 경영이 강화되고 대륙침략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더욱 확대됐다. 인천사회에 일본인 이주자가 크게 증가하자 부역(府域)의 확장이 요구되어 1936년에는 부천군에 편입시켰던 문학면의 학익·옥련·관교리와 다주면의 도화·용정(용현동)·사충(주안동)·장의(숭의동)·간석리를 다시 인천부에 편입시켰다. 이를 통한 세원(稅源)의 확보는 물론이었다.
이어 중·일전쟁(1937)을 계기로 경인시가지계획이 마련되자(1940) 부천군의 4개 면 즉, 서곶·문학·남동·부내면(富內,부평)을 인천부에 더 편입시켜 갔는데, 공장과 거주지 및 식량공급기지로 묶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 인천부는 1910년의 부역, 곧 옛 인천도호부의 부역에다가 부평까지 차지하는 넓은 부역을 갖게 됐다.
인천지역사회의 본격적인 성장은 1960·7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거듭 추진되면서 이루어졌다.인천의 임해공단들과 부평공단(경인공단)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수출 위주로 전개되면서 이를 위한 각종 기간(基幹)시설의 확충과 편의시설의 확대가 우선적으로 마련됐다. 그리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으로 인천의 산업과 사회는 더욱 성장하면서 인구 100만 명의 인천직할시로 승격하게 했다(1981).
여기에 1990년대 중반에 들어 도시와 촌락이란 이분법적 개발전략으로, 도농(都農)을 통합해 유기적인 정주공간체계를 도모하려는 새로운 국토개발전략이 진행되면서 광역시(廣域市) 개념이 도입됐다. 이에 따라 1995년 강화·김포 검단·옹진군이 인천에 편입됐다. 인천시가 영종·용유도와 강화군을 편입해 광역화된 것은 장래 인천의 도시구조 및 형태에 중요한 의미를 제시한 것이며, 이로써 인천은 각종 기능의 입지공간을 확보했고 세계로 웅비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마련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인천은 도시의 원핵이 항만기능에 바탕해 서쪽은 생활 공간화 할 수 없는 바다가 놓여 있고, 동쪽은 시역(市域) 확대를 위해 경쟁관계에 있는 부천이 있어 지리적 특성상 동서방향의 성장은 한계를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이따금씩 지역사회에 회자되고 있는 행정구역의 ‘환원’이나 ‘독립’이라는 얘기도 중요한 화두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보다 인천과 부평 그리고 부천이 본래 하나의 몸체이었듯이 가까운 장래에 하나된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꿈도 꾸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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