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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자연품에서 은둔하던 예술가 '고여'

by 형과니 2023. 5. 15.

자연품에서 은둔하던 예술가 '고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10-22 11:25:26

 

자연품에서 은둔하던 예술가 '고여'

길에서 묻다 흔적들 13

 

청량산 기슭 박물관 길(동춘동 277)에 있었던 고여(古如) 우문국 선생의 1960년대 거락처(居樂處).

 

가을, 가을의 여행길은 어디라도 좋다. 청명한 하늘과 어우러진 산야의 단풍은 이미 순치되어 버린 도시인의 심약한 감상에도 문득 잃어버린 방랑의 야성을 일깨워주게 마련이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며 나그네의 시간이다.

 

강을 따라 길을 떠나고 산을 찾아 방향을 잡는 가을 나그네의 행보는 절로 사색과 사념을 동반하게 된다. 꽃이 피고 꽃이 진다. 피는 것은 무엇이고 지는 것은 또 무엇인가? 올해 핀 꽃은 지나간 해의 그것과 사뭇 닮아 있지만 사람은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니 어찌 무상함을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끊임없이 순환하고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가을나그네는 절로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순례자가 된다.

 

유난히 가을 그리고 갈()길을 좋아했던 촌로들은 마음속에 비(心碑)를 세우고 (마음속의 믿음의 표상) 천천히 느리게 산천경계를 음미하며 갔었다. 더욱이 물의 경계를 건너 육지로 다시 발을 내디딜 때는 일종의 의식과 같은 경건함을 가지고 땅을 노크하듯 내려선다.

 

치안(峙岸)과 피안(彼岸), 현실과 이상, 삶과 죽음과 같은 상대적인 절대 가치는 이러한 물을 통하여 경계를 구분한다는 논리의 지평을 열었던 고여(古如)는 왜 붉은 색깔을 좋아했을까. 항시 그림 속에는 색을 넣지 않고 묵()만을 고집했던 그의 눈으로 보고 마음속에 간직한 색은 화를 물리치고 척화(斥禍)의 뜻을 따르고 불과 같이 번창할 수 있는 그 의미의 소산이 남도의 배롱나무까지를 모종한 것이었다.

 

청량산 기슭의 흥륜사 입구 판잣집 한 채는 '신 새한도'의 그림처럼 닮은 꼴의 집으로 공터마다 철따라 피는 붉은 꽃을 심은 이유도 그러했으리라 생각되나 왜 꼭 이리 혼자 거()해야만 했을까. 팔자소관으로 넘기기에는 좀 이해가 되지않는 숨은 이야기는 풀길이 없으니 막연한 생각으로 예술가의 길은 꼭 그런것인가. 즐거울 락()은 거()와 상생하며 거락(居樂)이다.

 

60년대 초 하루 일과 중 저녁에 '백병원' (백항아리의 별칭)에서 주사를 맞고 귀갓길의 고여는 짧은 정류장(답동)길까지 장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꽁치', '갈치'등 유독 생선을 좋아했던 님은 보따리 꾸러미를 손에 달고 수봉공원 쪽으로 발을 놓았었다. 복숭아밭이 수봉산을 덮었던 그 시절 중턱쯤의 움막집, 허리를 굽히며 들어가는 반지하 같은, 어쩜 토굴이라 불려야 될 집이 거처였었다.

 

한시도 게으름없이 식사를 끓이는 청승(?) 같은 모습이 참으로 낯설었지만 남이 알면 안되는, 은둔의 생활이어야만 될 사연, 지금까지도 답이 없다. 검여, 그리고 이경성, 인천을 지킨 선대들과의 지기를 하면서 늘 주인공 아닌 조연으로 더욱 빛나게 산 고여는 또 왜라는 의문을 남긴 채 강화로 들어갔을까. 남곡 김인홍과 같이.

 

화점면 이강리 고인돌 촌락으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긴 하나 끌림도 없이 어느 한 날 정녕 자의에 의해서 유배지(?)를 선택했단 말인가방문하여 후일담을 듣자하니 은행나무 묘목이나 심어 놓고 세월 보낼 양이라 했었지만 심중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영원한 숙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인생을 당겨오지 않고 천천히 다가가는 여로의 즐거움 일까. 아니면 시쳇말로 역마살(?)이 덕지덕지 괜 살이 일까.

 

삼시삼때를 챙기는 님은 절대 간이식의 식사는 없었다. 몇 첩의 밥상은 못되더라도 밑반찬에 국, 찌개는 물론 후식까지 챙겨드시는 조리솜씨는 남자치고는 왠만한 여자 뺨치셨다. 절기마다 해야 할 음식은 물론 장담그기에부터 김장담그기, 그것뿐일까 무말랭이까지 만들기 위하여 고춧잎 따다 말리시는 모습이 시골 아낙의 영락없는 몸놀림이었다. 단단한 가을 억새의 마디를 칼로 잘라서 이쑤시개로 사용하는 고여는 정말 자연속에 묻혀 산 분이었다.

 

산문적 리듬이 살아있는 시()의 백미라면 백석(百石)의 편지형식의 고백시가 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를 읽어내려가면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 한다는 직유, 직설 그리고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다"는 역설 등 사무치지 않은 구절이 없다. 그래서 월북시인 해금 뒤 "백석 붐"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유독 이 시를 보면 시속에서 고여를 찾게 됐었다.

 

모든 직과 영화를 작파하고 예술가의 길에서 의연히 세상과 맞서 살아왔던 굳고 정한 과정이 유장한 리듬과 어울어진 인생서사의 먹그림 같은 님.

 

궂긴소식 뒤로 가신 곳 그 곳에서도 유랑하십니까. 인생 삼락(三樂)을 누리고 가신 길이 그 곳에서도 있습니까.

/ 김학균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