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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부평미군부대를 찾아서(상)

by 형과니 2023. 5. 15.

부평미군부대를 찾아서()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10-27 22:49:14

 

에스컴의 해체와 부평의 도시계획

 

공원이냐? 병원이냐?” 부평미군부대 부지활용 방안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반세기 이상 치외법권이었던 곳이 머잖아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니 만큼 당연한 터일 것이다.

 

(미군부대전경를 둘러싸고 있는 부평지역의 고층아파트(부평구청 사진제공))

 

많은 전문가들은 이 곳의 활용방안에 따라 부평이 군사도시회색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부평미군부대의 역사와 이 땅이 부평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이었는지 두 차례에 걸쳐 점검한다.

 

작전명 베이커 포티(Baker Forty)’. 이는 부평과 미군의 만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45년 일본의 항복 후 미 제24군단장 하지는 주한미군점령군사령관의 직책으로 남한점령 임무를 시작한다.

 

24군단 예하부대 가운데 인천을 점령하도록 지시받은 부대는 제24군수지원사령부(Army Service Command24). 약칭 애스컴(ASCOM24)으로 불린다. 이 해 910일 애스컴은 일본의 주요 보급창이었던 부평 조병창을 접수한다.

 

조병창 시절부터 애스컴까지 한 평생을 근무했던 최모(82·부평구 산곡동)씨는 부평평야는 안개가 많이 끼었기 때문에 미군은 이 일대가 폭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회상한다.

 

애스컴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틀 만에 철수했지만 1951년 재주둔에 성공한다. 병참기지와 121후송병원으로 재구성한 애스컴은 196355보급창·6의무보급창, 565공병자재창·19병기창, 4통신대, 512정비대대, 55항공대, 8057보충대, 37공병대·76공병대 등 7개 구역으로 나뉘게 된다.

 

당시 종합보급창 역할을 한 55보급창은 종업원 1200명을 고용, 한국 내 단일 부대 중 최고의 인력을 자랑했다. 1970년대 들어 애스컴은 일대 전기를 맞는다. 미국 닉슨 대통령이 추진한 데탕트(detente), 즉 해빙정책의 분위기가 한국에까지 이어져 주한미군 7사단 철수가 전격 이뤄진 것.

 

김현석 부평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은 “1972년 동서독 간 기본조약 체결에 이어 남한과 북한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국민들 사이에 금방 통일이 되는 분위기가 퍼지게 됐다고 말했다.

 

애스컴이 공식적으로 업무를 마감한 것은 1973630. 각 부대들이 전국적으로 분산되면서 캠프마켓이 대신하게 됐다.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애스컴의 정확한 면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지만 현재 캠프마켓(615)45배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방부에 넘겨진 옛 애스컴 부지들은 부평의 도시지형을 새롭게 바꿔놓았다. ‘인천의 도시계획 연혁집에 따르면 1978년 건설부는 산곡동 310 일원 125를 아파트지구로 결정했고 시는 198433730로 확대 지정고시한다.

 

이렇게 해서 1985년경 산곡지구현대아파트가 탄생했다. 부평에서는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들어가는 고층아파트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어 우성과 동아, 대림, 경남아파트 등이 줄지어 들어섰다.

 

캠프마켓 정면에 자리잡은 신촌(부평3) 지역도 이 대열에 합류할 기세다. 이렇게 되면 반환되는 미군부대부지 주변을 고층 아파트가 빙 둘러싸게 되는 셈이다.

 

김현석 연구원은 미군부대 덕분에 부평이 한 때 경제적 전성기를 누릴 수는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우리 땅안에서 철저한 방외인일 수밖에 없었다이 부지 이용계획은 시민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방향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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