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모인 곳에 표구점 있다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10-22 11:26:51
예술가 모인 곳에 표구점 있다
길에서 묻다 흔적들 14
선구지길(관동3)의 한성표구, 동정의 작품을 전문 표구하던 곳
인생 삼락(三樂)은 무엇일까?
산천경계를 눈으로 보고 마음속에 새기는 여로의 즐거움을 손으로 빚어 그림으로 표현하며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술에 몸을 적시는 설명으로 대변한 촌로들의 괴변(?). 설득력은 없지만 그런대로 이해가 될 듯도 하다.
82년 3월 어느날 저녁 한잔 술을 마시며 논의하던 중 문(門)을 내고 말았었다. 소통이 아닌 구별의 도구로 냈었다. 열리면 길이 되고 닫히면 벽이 되는 것, 문은 안과 밖을 나누고 우리와 너희들을 구별짓지 말고 다같이 참여하여 유유자적하는 삼락의 문을 촌로들이 발의하여. 그렇다 문은 있으되 예술인들의 마음에 문을 만들지 말자는 말이다. 인천인으로 인천에서 예술하는 사람이면 내키는데로 발을 들여도 된다는 개방적 의식을 표방하면서…….
그 문에 달 문패는 삼락회라고 지었다. 세간의 사람들은 얼빠진 짓이라고 할지도 몰라도 좋은 뜻과 막힘없는 의사소통에서 나온 결말이 훗날 곧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두서넛의 촌로들 외에 서양화의 이종무, 백낙종, 김영일, 장주봉, 이수표, 손설향, 등등이 모여 주말이면 근교의 강산을 휘돌며 그리며, 마시며, 실경을 음미하는 나날이었다. 전시회를 열며.
한국미술사에서 빼놓을 수없는 단체를 들라면 58년에 창립되어 50년의 역사도 역사지만 국전밖에 없었던 민전의 효시를 이룬 목우회(木友會)다. 한잔 얼큰이 젖은 얼굴의 서양화가 도상봉, 이종무, 이종우 등 한국 화단의 거성 5명이 덕수궁 돌담길 벤치 나무 그늘 아래 앉아 결성한 이 목우회도 낭만과 풍류를 즐기며 만들어진 것이다. 입성은 가난해도 낭만과 멋을 품고 살기 때문에 늘 새로운 생명감에 넘치는 예술가들 이었기에 만들어진 말 그대로 회(會) 목우회.
터진개길(신포동26)사거리, 동정 박세림의 서실이 있던 터(2층)
한국 동서양 화단의 지성들로 거듭났으며 훌륭한 후진 화가들을 길러낸 단체로 초기에는 미약했으나 그 역사의 길을 걷고 있는 지금은 얼마나 위대한 목우(木友)인가.
삼락회도 꼭 목우회를 닮아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어디 있을까.
그렇게 자라지 못한 나무의 뜨거운 영혼은 식고 한낱 추억의 끄나풀 같은 세월이 참으로 아쉽다.
어느 지방이든 그 지방의 정체성을 표방하는 지킴이 예술단체들은 많건만 유독 우리고장은 왜 긴 뿌리를 가진 단체가 없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수 없이 해대는 말이지만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곳이 이곳이며 인천인 아닌 인(人)이 인천인 행세하며 심지어 항구도시 임에도 바다가 없다고 하니 무엇인들 있을까.
화가들의 쉼터이자 전시회의 초기 실행자인 화방(표구점)을 보면 또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점들이다. 빼곡히 걸린 작품중 내 땅의 화가 그림은 한 두 점에 불과하며 다 외지 사람들의 작품뿐이니 심한 말이긴 하나 내것 말고 남의 것을 걸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해방이후의 개항장 일대 예술의 흐름은 그들이 상주하는 공간을 따라 움직이게 되어 화방과 표구점도 그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함수를 가지고 있었다.
상인천(축현, 동인천) 역을 정점으로 용동을 거쳐 신포동에 자리잡고 있던 표구점은 동양화가와 서예가들의 배려속에서 공존하며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관동길에 있었던 '한성표구'점(업주, 한성주)은 동정 박세림 선생의 단골 표구점으로 인현동(옛 인천여고정문앞)의 '금성표구'점과 인천의 효시랄 수 있었고 경동 사거리로 가는 길 중앙에 (현 기업은행 앞) 있었던 '동양표구'점(업주, 이화용)과 '사임당표구'점(업주, 공근택) 역시 조금 늦게 창업했으나 60년대와 70년에 걸쳐 우초 장인식, 송석 정재흥, 그리고 소강 부달선, 무여 신경회 등 서예가의 작품을 표구하는 점포로 명성이 자자 했었다. 그 뒤로 제자들이 다니며 흥을 이루었으나 새로 생긴 표구점들에 의하여 문을 닫거나 전업을 한 상태로 후일담이 없었다.
한 집안에 화가와 서예가가 나면 그 후손은 그 업에 종사하는 경향도 있었다. 서예가 우남 이양재의 장남이 사동에 '우남'표구점을 열었고, 고 소암 이재호의 차남은 제물포에서 표구점을 경영하였으며 동양화가 황만영 화백의 차남은 신포동에서 '원미당'표구점을 운영하며 지금까지 한 우물을 파고 있다.
중구 신포에서 사동길 한 블록의 100m 길에 생겨난 표구점들 손익분기점의 벽이 허물어지며 사라져 간 한 시대의 흔적은 다가올 겨울의 모진 바람에 날라 갔는가.
아! 쓸쓸하다. 흘러간 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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