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장 일대 문화 아이콘 '다방'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12-22 14:06:54
개항장 일대 문화 아이콘 '다방'
-길에서 묻다 흔적들 24
자동차는 도시의 풍광을 긋고 지나가지만 걷는 사람은 도시의 풍경안에서 움직인다. 그 도시의 풍경안에서 자신과 지인 그리고 자연을 천천히 둘러보며 눈(目)안으로 저장한다. 그리고 언제도 멈출 수 있는 게 걷기 여(旅)의 매력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 걷는 순례가 남긴 가장 큰 선물이라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생활을 길로 가져오진 않지만 길에서 만남의 교감을 이루는 일상으로 밖과 안이고, 안과 밖이자, 일상을 꾸는 꿈이자, 꿈이 꾸는 일상이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여행을 꿈꾸고 여행에서 일상을 설계한다. 다소 미련한 짓이기는 하나 이 뫼비우스의 굴레를 깨려면 안(內)을 박차고 바깥으로 나가야만 할 것이다.
인천 사진의 창시를 이룬 '은영회' 주관 '임해촬영대회'의 집결지 '해무청'. 인천 중구 항동(하인천 주변)의 터.
노동의 탈출, 재생산을 위한 활력을 생성시키며 돌아오는 왕복운동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우리의 습관은 길에서 문화를 낳는 산고를 치루었다.
수 많은 문화의 단체가 탄생되며 소멸해가는 순환의 현상이 이 길에서 만남으로 비롯된 현상, 그리고 구체적인 이야기의 몸통을 펼쳐보일라치면 다가가는 길 섶의 다방, 언젠가 "흐르고 싶은 인천"의 다방의 역(歷)이 피력됐지만 다방은 역시 개항장 일대의 문화 아이콘으로 손색이 없었다.
대도시의 사라져 감의 속도는 엄청 빠르게 없어졌지만 어중간한 도시의 다방은 아직도 꼬리를 감추지 않은채 살아 초대하지 않았는데도 투쟁과 개혁의 틈바구니에서 혹은 행복에 대한 강박에서 비켜나 연명하고 있다.
지워진 주소와 없어진 조형지물이 수두룩해도 그 자리 혹은 옆자리엔 아직도 얼굴 내밀고 있는 다방, 그곳엔 다방이 있다.
예술분야에 있어서 대구격인 예술장르를 크게 나눈다면 사진과 미술, 그리고 연예와 연극, 무용 등으로 전자는 전시공간을 필요로 하며 후자는 공연공간을 필요로 하는 예술이다. 공간예술은 일정한 건물공간에서 행하여지는 반면 전시는 그리 크지 않아도 출입이 용이하며 다중집합 지역의 다방에서 가능했던 것을 보면 미술과 마찬가지로 사진분야 역시 다방을 선택한 이유는 자명한 일이었다. 물론 시대상황이 말하는 것이겠지만.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그 시절의 다방들…….
해방과 더불어 한국인들로만 조직, 사진의 질적향상을 위하여 탄생된(46년 5월) '제물포 사진동지회'는 '파로마' 다방이며 인천에서 가장 먼저 천연색을 썼으며 생소한 '슬라이드'전을 열었던 '제1회 이종화 칼라 슬라이드 전'이 '락희'다방, 2회전은 '항도'다방 3회전은 '은성'다방이었으며 인천의 사진계를 가장 먼저 전국에 알린 '임해촬영대회'(ㄴ제7회, 93년) 전시를 '은성' 다방에서 열었으니, 다방! 정녕 문화일굼이 아닌가.
길은 걷다 우연히 만난 어느날의 무속인 "먼 데를 나가야 해, 되도록 집에 있지 말고" 다른 것은 몰라도 '집에 있지 말고'는 용케도 맞히는 구나 했던 역마살 낀 내 행동거지와 습관, 땅거미 질 무렵 어둑어둑한 '개와 늑대 시간'이 좋아선지 길, 길이 좋다. 지나가며 느낌은 시처럼 좋다.
고은의 한줄 시 <지나가며>를 또 읊조린다. "절하고 싶다 저녁연기 자욱한 먼 마을"
그냥 지나다 길 위에서 만나는 저녁 어스름, 합장하고 경배하고 싶어진다.
내친김에 지나며 흔적을 찾아보자. 고여의 설득력 많은 이야기와 전란 직전 창립된 은영회(銀影會)의 멤버중 한 사람 '박태희'(필자의 처삼촌)말을 더듬으며…….
사진 촬영이 처음 있었던 곳이 인천(1871년 함상에서) 앞 바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필두로, 한국 최근의 사진인은 김규진 이었으며 그가 차린 서울 소공동의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이 최초라고 문헌으로 간직하고 있으나 인천의 사진계의 태동은 1904년 일본인에 의한 사진관이 생기며 시작 되었다. 서울에 비하여 한참 늦었으나 정작 사진창작활동은 1941년으로 조망된다.
중구 송학동 2가 홍예문 언저리에 있었던 '모던'사진관을 경영하던 일인에 의하여 생긴 '광영회'가 그 효시로 36년 조선일보 주최의 '하계사진공모전'에 입상한 내동의 이경우가 인천 최초의 공모전 입상을 초시로 보며, 한국인으로서 사진관(DP점)을 차린 것은 1941년 중구 경동(구 상업은행앞) 김진근에 의하여 개점된 것을 인천 최초로 본다.
'인천사진문화사'의 절대 값은 역시 은영회의 탄생 (신포동의 청구사진관)이며 은영회의 시도로 실시된 '임해촬영대회'(57년)가 큰 넓이를 가진 강이다.
9년의 격차를 두고 탄생된 '인천사우회'가 은영회와 통합(61년, 9월)을 이루어 오늘날의 '인천사진작가회'를 탄생하게 되는 숨은 공로의 인물은 인천신문사장 허합, 그리고 공립병원 이종화, 시조시인 최성연, 변길선, 김명철, 김용해 등 천상의 부름을 받은 분들.
'전국임해촬영대회'(51년 지속)를 낳고. 작약도, 팔미도 송도 등에서 숱한 수난의 역사를 낳던 분들의 넋은 내 안에 머금고 있으나 산야는 모두가 젖어 있구나.
/김학균 시인
# 아래의 글은 다음카페 "중구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이신 사진가 김 석배 님께서 위의 글에 대하여 올리신 글입니다.
Re:[인천일보] 개항장 일대 문화 아이콘 '다방'의 글이 잘못되여 바로잡습니다.
글쓴이: 김석배 레오 08.12.21 23:26
http://cafe.daum.net/inchonjunggu/6d3Y/230주소 복사
이기사는 잘못된것이 있어서 당시의 사정을 바로 잡습니다.
일본인이 경영한 사진관은 홍예문을 나와 당시 공회당에서 길건너 앞에 櫓谷(가지다니)가 운영하던 魚住(우오스미)사진관있었는데 그리고 인천의 유일한 사진기점으로 카메라와 필림 인화지등을 판매를 겸하고 있었고. 후일 櫓谷(가지다니)사진관으로 상호를 바꾼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인천의 한국인 최초의 DP점은 경동에서 金桭復(김진복)이가 경영하였읍니나,
해방전 일본인들의 사진클럽인 光影會(광영회)는 魚住(우오스미)사진관에 있었고 한국인 회원은 정용복, 김진복(DP점이며 카메라점은 않임), 태영호(타렌트 태현실의 숙부), 신현호의 4명이였며 나는 학생신분이여서 나이가 어려 가입을 못했읍니다. 해방후 정용복이 銀影會(은영회)라는 사진 클럽을 조직을 하였읍니다. 이기사의 필자의 처삼촌인 박태희는 나와는 초등하교/중학교 동창이며 해방후 한참 있다가 사진을 시작한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사진관은 율목동과 유동 사이에 사꾸라사진관이 있었읍니다.
1942년경 일왕이 출제한 勅題(칙제) 응모작품 "連峰雲(연봉운)"에 태영호가 특선을 하여 일본인 사진가들의 부러움과 붕통을 터트렸읍니다. 태영호는 등산을 좋와해서 백운대에 올라갔는데 주변 산봉오리에 구름이 잠뜩 끼어있는 광경을 찰영하였는데 얼마 안되여서 출품 공고가 나왔읍니다. 딴 일본인들은 이 행운을 맛볼 수가 없어 거의 출품을 못하였읍니다.
그리고 인천에는 해방전 사진을 한 산증인이 나를 빼놓고 생존을 하지않어 해방전 인천사진사가 많이 외곡 되여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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