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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성의 미추홀

해양대·해사 

by 형과니 2023. 5. 23.

해양대·해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9-04-10 11:35:31

 

해양대·해사 

조우성의 미추홀

 

'인천해양대'가 문을 연 것은 광복 직후인 19461220일이었다. 그 이듬해 41일에는 '경기수산고등학교'를 설립해 인천은 한시가 급했던 해양·수산 인력의 배출을 위한 교육 인프라를 겨우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7년 당시 정부는 중앙방송을 통해 '인천해양대' 학생들에게 425일까지 군산에 집결할 것을 명하고, 다음달 5일 대학의 군산 이전을 확정했다. 1953년에는 군산에서 다시 부산으로 옮기는 난맥을 보였다.

 

그로 인해 해양·수산 관련 교육기관은 영호남에만 몰려 있는 기현상을 빚게 되었고 더불어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인력 수급에 큰 차질을 빚어 왔던 게 그간의 실정이었다. 이것이 인천해양대 신설 구상의 배경이다.

 

그런데 목포와 부산에서 이를 쌍수로 반대한다니 어이가 없다. 이 대목에서 최근 안병태 전 해군참모총장이 "해군 3함대사령부 목포 이전과 작전사령부 부산 이전은 미친 짓"이라고 한 모 월간지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국가 보위를 생각한다면, 국민과 정부는 두 부대를 원위치로 돌려놓아야 한다"'격정 토로'에 공감치 않을 수 없다. 비상식적 정치 논리의 농단이 대학 설립, 공항 건설에 이어 급기야 군부대 설치에까지 이른 것이다.

 

() 전 해군참모총장의 '원위치론(元位置論)'이 사자후로 들리는 오늘, 차제에 진해에 가 있는 해사(海士)도 인천으로 이전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조선수사해방학당', '양무호', '인천상륙작전' 등 해군의 뿌리는 인천에 있는 것이다. 일제가 만든 군항을 줄곧 해군의 요람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다.

 

/객원논설위원

 

 

인천과 해군 

조우성의 미추홀

 

북한의 로켓 발사가 초읽기에 들어간 금주, 동해상에는 한··3국의 이지스 함들이 집결해 있는 양상이다. 대포동 2호를 추적하기 위한 배치인데, 그 중 미 7함대 소속 채피 함과 매케인 함의 함장이 한국인이어서 화제다.

 

한국계 최초로 이지스 함(채피)의 함장이 된 최희동 중령은 인천 출신으로 중3 때 이민을 가 일리노이대에서 역사학을 전공, 1990년 해군 소위에 임관한 후 미 해군에서 미사일 요격 전문가로 손꼽히고 있다는 보도다.

 

그 소식을 들으니 그 같은 인적 자원의 배출이 두루 역사에 뿌리를 대고 있는 듯싶다. 조선 정부가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을 지금의 인천 강화군 갑곶진에 세운 것이 1893년이었다.

 

또 근대식 해군의 창설을 꿈꾸었던 고종황제가 1903년에 들여온 최초의 군함 양무호(揚武號)의 모항이 바로 인천항이요, 양무호의 신순성(愼順晟) 함장이 인천에 정착해 후진 양성에 힘썼다는 것 역시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 맥을 이어 월미도에 있던 제2함대 사령관을 거쳐 해군 총수인 참모총장에 오른 이가 인천고 출신의 안병태 제독이고, 그의 실제인 안병구 제독이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함 함장에 취임했던 것은 다 예삿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인 해양국이요, 그 중심부인 인천은 예로부터 '도성의 인후(咽喉)'이자, '해방(海防)의 요로'였다. 인천이 "양서(兩西ㆍ황해도와 평안도)와 삼남(三南)을 호령하고 있는 형상"이라 했던 숙종 때 민치대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인천과 해군의 인연을 기릴 사적 방안이 강구되었으면 한다.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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