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밥과 배다리 문화선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9-04-28 11:08:35
언덕밥과 배다리 문화선언
우리는 밥 없이 살 수 없다. 밥이 곧 생명이고,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미사여구를 사용한다 한들 밥의 원천과 의미를 이보다 더 근사하게 포장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밥을 짓는 행위와 밥을 어떻게 먹어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기억의 족적을 뚜렷이 남겨주신 분이 계시다. 어머니이다. 너와 나의 개별적 어머니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어머니, 지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성성을 대표하는 총체적 이름으로 '어머니'이시다.
어릴 때, 큰 아버지께서 오셨다 하면 대문 앞에서부터 큰 절을 올리라고 어머니는 성화를 부리셨다. 마지못해 절을 올렸을 법한 나이가 지나고부터 큰 아버지를 뵈었다하면 절 올리는 것은 당연시 되었다. 신작로이건 저자거리든 간에 부끄러워할 틈도 없이 그러한 행위는 15년 전까지도 지속되었음은 물론이다.
어머니는 백부의 방문 때마다 언덕밥을 지어 아침상으로 내오셨다. 차지고 윤기 흐르는 가운데 밥은 백부께 먼저 드리고 솥단지의 가장자리 밥은 누룽지와 뒤섞어 우리 육형제에게 나눠 주셨던 것이다. 밥을 나눔에도 순서가 있다는 말씀을 전해주시지는 않았지만 웃어른을 공경하는 데에 있어서 소리 없는 가르침으로 친히 알려주셨음을 진작부터 인지하게 되었다.
배다리는 인천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유사 이래로 문학산이 인천의 아버지 역할을 했다면, 시공을 넘어 명실상부하게 근현대를 아우르는 어머니의 역할을 해왔던 공간이 배다리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길목을 텄던 개항장 인천이 일본인을 필두로 중국인, 구미 열강의 세권에 쥐락펴락했던 공간이었음을 염두에 뒀을 때, 뒷전으로 밀리고 밀려 개척해낸 벼랑 같은 땅이 곧 배다리였다.
근대의 흔적들이 즐비한 개항장 일대가 요즘 각광을 받아 리모델링이다, 인천의 역사적 의미를 재고한다는 등 일련의 재조명 작업들이 발 빠르게 진행되는 반면, 그나마 살던 땅에서 쫓겨나 배다리, 송현동, 송림동 일대로 정착해 오늘날 구도심의 낙제 꼬리표를 단 이 지역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새 것을 맹종하는 이 시대의 문화 양식도 문제지만, 현재의 인천이 어떻게 해서 태동한 것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시 행정부의 무지와 무례함에 더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다.
필자의 언덕밥 이야기가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들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요상한 진술 같지만 조부의 당숙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였고 그 맏손 됨의 객쩍은 프리미엄이 적잖이 작용해 말 끝머리마다 '치명자 자손'으로서의 정체감을 상기시켰던 분이 바로 백부셨기 때문이다. 백부의 방문은 늘 당당하셨고 세 살 터울인 아버지는 존중 그 이상의 예를 갖춰 맞이해 하셨음이 아직도 아삼아삼 떠오른다.
배다리로 터전을 옮긴 선배 어르신들이 학교를 세우고 야학을 열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절벽 같은 민족 자존의 끄나풀이라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공간성에 대한 갈구였다. 이러한 장소성이 인천의 '어머니'로서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부활 주간에 '배다리 문화 선언'이 선포되었다. 창영초등학교 교정을 빌어 지역 주민들과 시민 사회단체들이 조촐하게 모임을 가졌다.
공교롭게도 인천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 시발지라는 역사성이 공통 분모로 자리 잡는다. 배다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환과 구태의연하고 명분조차 어이없는 신자본주의 마구잡이 논리에 대응하는 시민적 다짐을 만방에 선포했던 순간이었다.
기독교의 최고 교리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 존중의 사상과 오랜 삶의 터전을 평화롭게 가꾸어 가자는 주민의 강령이 '배다리 문화선언'인 것이다. 이와 한 맥락으로 밥상머리와 띠앗머리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언덕밥'을 나누는 행위이다. 그 한 가운데에 배다리가 존재한다.
/이종복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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