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인천의관광/인천의섬
2009-06-03 11:40:19
옹진반도 요충지…외세 주목
(20) 백령도
또 다시 서해에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특히 “서해 5도 일대 수역에서 행동하는 미제 침략군과 괴뢰 해군 함선, 일반 선박의 안전 행해를 담보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북측의 경고 성명이 불안감을 한층 증폭시키고 있다. 두 차례의 무력 충돌 등 남북한이 끝없이 첨예한 갈등을 보이고 있는 서해 5도, 여기 섬들은 어장으로서의 중요성도 크지만 옹진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요충지로서도 일찍부터 외세의 주목을 받아 왔다.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서세동점의 시기에 특히 서해 5도와 옹진반도 일대를 중시한 나라가 해양국가인 영국이었다. 동인도회사에 근무하던 해군 장교 홀(Basil Hall)로 하여금 ‘수많은 임무’를 주어 우리 해안을 탐사하게 하고 백령도에 상륙토록 한 사실이 그런 영국의 의중을 보여주는 실례다.
그 당시 주 중국 대사였던 맥스웰(Murry Maxwell) 대령과 홀의 주요 임무는 백령도 해안과 동경 124˚ 46´, 북위 37˚ 50′ 일대의 섬들에 대한 측량이었다. 측량을 하면서 그들은 이 조선의 아름답고 낯선 섬들을 ‘써 제임스 홀 군도(Sir James Hall‘s Group)’라고 명명했다. 제임스 홀경은 지리학자로서 에딘버러왕립학사원 원장이었는데 바로 백령도를 탐사한 홀의 아버지였다. 이렇게 그들이 작성한 해도에 따라 서해 5도는 홀 군도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진다.
홀이 백령도를 비롯한 조선의 서해를 탐사한 기록은 ‘조선서해탐사기(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에 남아 있는데, 첫 상륙지인 백령도에 대한 인상기가 아주 흥미롭다.
1816년 9월1일 오전 9시 백령도의 한 만(彎)에 정박한 뒤 섬에 상륙한 홀 일행은 “갈대에 진흙을 발라 대강 엮은 듯한 40채의 집들과, 얼굴이 구릿빛으로 탄 험상궂고 약간 야만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을 보았다”고 첫 인상기를 적는다. 홀은 특히 조선인도 전족(纏足)을 하는지가 궁금했던지 “이곳 여인들의 발이 중국에서처럼 죄이지 않은 보통 크기였다”는 기록도 남긴다.
홀은 또 낯선 이방인 일행을 처음 접한 백령도 주민들이 크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으면서도 그들이 어서 빨리 떠나 주기만을 바랐다고 쓰면서, 개중에는 돛배 모양의 종이를 바람 부는 방향으로 흔들어 떠나라는 의사를 표시하는 ‘순진한’ 사람도 있었다고 적는다.
그 후 영국으로 귀환하던 홀이 유배지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을 만나 극동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조선은 그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선량한 나라’라고 말하자 나폴레옹이 ‘그런 민족이 이 세상에 있는가? 내가 다시 천하를 통일한 다음 반드시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보리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런 작은 역사 기록을 찾아내는 것도 인천재발견의 한 재미일 것이다. 백령도가 우리나라 대표적인 관광지로서, 어장으로서, 항구적이고도 온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고대한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인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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