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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세창양행사택

by 형과니 2023. 5. 27.

세창양행사택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6-10 11:30:44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

 

 

한국 최초의 상업 광고를 낸 상점이 인천 중앙동에 있던 세창양행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1896년 김윤식(金允植)이 주동이 되어 폐간된 한성순보에 이어 한성주보(漢城周報)를 발간하는데, 그 제4222일자에 한문으로 된 세창양행의 광고 기사가 처음 실린다. 이것이 언론 매체를 통한 광고의 효시로 기록된다. 여기서 덕상(德商)이라는 말은 독일 상회라는 뜻으로 독일을 한자로 덕국(德國)이라 했기 때문에 덕국상회(德國商會)’ 정도를 줄여서 쓴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또 고백이라는 말은 당시 쓰이던 중국식 표현으로 광고라는 말에 해당한다. 광고라는 말은 후에 일본 신문의 영향을 받으면서 쓰이게 된다.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호랑이, 수달피, 검은담비, 흰담비, , , 여우, 개 등 각종 가죽과 사람의 머리카락, , , 돼지의 갈기털, 꼬리, , 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오배자, 옛 동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외국에서 자명종 시계, 들여다보는 풍경, 뮤직박스, 호박, 유리. 각종 램프, 서양 단추, 서양 직물, 서양 천을 비롯해 염색한 옷과 염료, 서양 바늘, 서양 실, 성냥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수입하여 물품의 구색을 갖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판매하오니 모든 귀한 손님과 선비와 상인은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세창양행의 광고 문안이었다.

 

장황하게 긴 문장으로 써 내려간 광고를 보면서 우리는 개항 초기 무역의 성격을 알 수 있게 된다. 세창양행에서는 조선으로부터 동물의 모피나 담배, 조개, 소라 따위의 농수산물을 싼값에 사가는 대신 서양의 각종 흥미로운 공산품과 직물 등을 수입했던 것이다. 당시의 경제 상황과 산업 형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거래할 때 아이나 노인이 와도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최초로 신문 광고를 낼 만큼 기민한 그들의 상술과 질 좋은 상품에 의한 경제 침탈을 우리는 막지 못했다. 기억나는 것은 독일의 물감과 바늘, 그리고 이 광고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금계랍(키니네)6.25 전쟁 후까지도 가정 상비품으로서 여인네들에게 인기가 높았다는 점이다.

 

세창양행은 75일자 제23호까지 약 6개월간에 걸쳐 광고를 계속한다. 이듬해 독립신문에는 수마트라산 수입 석유 판매 광고, 화륜선으로 평양을 다니는 화물객선 창룡호, 상해로 떠난다는 현익호 운항 광고를 내는 등 가장 많은 한글 광고를 실으면서 인천 땅 제물포를 거점으로 매우 적극적인 경영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