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창양행사택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6-10 11:30:44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
한국 최초의 상업 광고를 낸 상점이 인천 중앙동에 있던 세창양행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1896년 김윤식(金允植)이 주동이 되어 폐간된 한성순보에 이어 한성주보(漢城周報)를 발간하는데, 그 제4호 2월22일자에 한문으로 된 세창양행의 광고 기사가 처음 실린다. 이것이 언론 매체를 통한 광고의 효시로 기록된다. 여기서 덕상(德商)이라는 말은 독일 상회라는 뜻으로 독일을 한자로 덕국(德國)이라 했기 때문에 ‘덕국상회(德國商會)’ 정도를 줄여서 쓴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또 고백이라는 말은 당시 쓰이던 중국식 표현으로 광고라는 말에 해당한다. 광고라는 말은 후에 일본 신문의 영향을 받으면서 쓰이게 된다.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호랑이, 수달피, 검은담비, 흰담비, 소, 말, 여우, 개 등 각종 가죽과 사람의 머리카락, 소, 말, 돼지의 갈기털, 꼬리, 뿔, 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오배자, 옛 동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또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외국에서 자명종 시계, 들여다보는 풍경, 뮤직박스, 호박, 유리. 각종 램프, 서양 단추, 서양 직물, 서양 천을 비롯해 염색한 옷과 염료, 서양 바늘, 서양 실, 성냥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수입하여 물품의 구색을 갖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판매하오니 모든 귀한 손님과 선비와 상인은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세창양행의 광고 문안이었다.
장황하게 긴 문장으로 써 내려간 광고를 보면서 우리는 개항 초기 무역의 성격을 알 수 있게 된다. 세창양행에서는 조선으로부터 동물의 모피나 담배, 조개, 소라 따위의 농수산물을 싼값에 사가는 대신 서양의 각종 흥미로운 공산품과 직물 등을 수입했던 것이다. 당시의 경제 상황과 산업 형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거래할 때 아이나 노인이 와도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최초로 신문 광고를 낼 만큼 기민한 그들의 상술과 질 좋은 상품에 의한 경제 침탈을 우리는 막지 못했다. 기억나는 것은 독일의 물감과 바늘, 그리고 이 광고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금계랍(키니네)이 6.25 전쟁 후까지도 가정 상비품으로서 여인네들에게 인기가 높았다는 점이다.
세창양행은 7월5일자 제23호까지 약 6개월간에 걸쳐 광고를 계속한다. 이듬해 독립신문에는 수마트라산 수입 석유 판매 광고, 화륜선으로 평양을 다니는 화물객선 창룡호, 상해로 떠난다는 현익호 운항 광고를 내는 등 가장 많은 한글 광고를 실으면서 인천 땅 제물포를 거점으로 매우 적극적인 경영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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