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교과서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9-06-15 16:25:33
살아 있는 교과서
“천년 봄 가을 지나도 귀한 피 향내로 오히려 소매를 적시게 하는 그 사람 여기 서 있다. 몸은 부서져도 외로움을 놓지 않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사람에 얽매이어 장하고 매운 정신 보아라. 높은 슬기와 총명 뿜어낸 힘으로 온겨레 가슴을 밝혔으니 때는 바뀌어도 그 모습 새시대 맥박 뛰는 이 하늘 아래 살고 싶은 내력 되리라.”
인천창영초등학교 옛 본관 앞 화단에 세워진 강재구 소령의 흉상 비문이다. 강소령은 이 학교 제40회 졸업생이다. 졸업 연월일이 1950년5월6일이었으니 6·25가 발발하기 바로 50일 전의 일이다. 그는 1937년 동구 금곡동에서 출생해 창영과 인천중학교에 다니고 서울고교로 진학해 육사를 졸업했다. 1965년 월남전 참가를 지원하여 중대원을 이끌고 수류탄투척 훈련 중 부하사병이 놓친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수십명을 구하고 산화해 살신성인의 표상이 되었다. 그때 나이 28세-평소 “짧고 굵게 살겠다”던 다짐 그대로였다.
나라는 그의 고귀한 군인정신을 기려 소령으로 특진해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고 소속했던 부대를 재구대대라 명명해 부대 내에 동상을 건립, 그를 기리도록 했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당시 부대 인근이던 강원도 홍천군 북방사거리에는 강재구 소령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모교 창영에 그의 흉상이 제막된 것은 그보다 앞서 그가 산화한 이듬해 개교기념일이던 1966년 5월6일 기념식에서였다.
2005년 전쟁기념관에서는 강재구 소령을 그해 3월의 ‘호국인물’로 정했으며 인천보훈지청도 그해 6월 보훈의 달에 국가유공자로 선정했었다. 그의 몇몇 초등학교 동기생들은 근래까지도 해마다 그를 추모하여 부대를 방문했었다.
자신도 어려서 뛰어 놀았을 자리-그러나 4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 옛 교사는 문화재라는 화려한 이름을 남기고 노후하여 사용하지 않고 있으니 한적한 곳이 되었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 몇명이나 그의 장한 뜻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러나 지난주 그의 후배들이 흉상에 헌화하며 넋을 위로했다고 한다. 실로 ‘살아 있는 교과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