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선사와 위암 장지연이 편지로 나눈 글
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2009-06-23 21:53:20
경봉선사(鏡峰禪師)와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 이 편지로 나눈 글
글쓴이: 張翼昌(익창)
조회수 : 67
05.11.2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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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선사와 위암 장지연이 편지로 나눈 글
(鏡峰禪師) (韋庵 張志淵)
굴절된 시대에 만난 두 선지식의 세대를 넘은 우정
기차는 재촉한다만 나 홀로 어이가리
보은의 탑 많은 사람 정성으로 이루어
천추만대 기념하는 그 뜻 감격 하네
관수의 구름도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
기차는 재촉한다만 나 홀로 어이 가리
올 때는 봄바람이 좋더니
떠난 뒤 바다의 달처럼 서로 생각 하네
불법에 공덕 심으면 음덕 쌓이는 것
서로 전하는 입비석에 그 이름들 영원 하라
(報恩一塔衆人誠 記念千秋感此情
關樹留雲同贈別 汽車催路獨堪行
來時初對春風好 去後相思海月明
佛地樹功多蔭德 相傳口碣不朽名)
1919년 7월 경봉(鏡峰, 1892~1982)은 마산포교당(현 정법사)을 뒤로 하고 산문을 나섰다. 그가 첫 주지로 부임한 지 꼭 2년 6개월만이었다. 이곳 생활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지라도 경봉에게 마산포교당은 참으로 각별했다. 민초들과 부딪히며 대중포교에 눈을 뜨고 ‘나는 선재동자처럼 도를 구하고 보현보살의 행원(行願)으로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평생의 서원을 굳건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필봉으로 구국운동을 펼쳤던 선각자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을 만난 것도 이곳이기 때문이었다.
1917년 이른 봄, 스물여덟의 경봉이 이곳에 부임한지 오래지 않았을 때였다. 포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중 하루는 두루마기를 입은 단아한 중년 남성이 포교당을 찾아왔다. 경봉은 순간 그가 위암임을 직감했다. 명성황후 시해 때 항일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짓고, 이상재 등과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던 우국지자, 특히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란 사설을 써서 일제와 매국노의 흉계를 통렬히 비판하고 그 사실을 알려 서울 장안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언론인. 하기야 일제의 침탈 앞에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조선인 치고 그 누군들 위암을 모를 수 있을까만….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대가로 치러야 했던 혹독한 수감생활과 그 후 구국결사운동을 재개하며 겪었던 온갖 고초들…. 이런 상황에서 위암은 블라디보스톡, 상해, 남경 등을 구름처럼 떠돌다 총상을 입은 채 귀국해 큰아들이 있는 마산에 칩거하고 있었다. 경봉에게 위암의 첫 느낌은 생각과 달리 강인함보다 늙고 지친 모습으로 와 닿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당시 위암은 자신의 무능과 이로 인한 분노를 그저 술과 시로 하루하루를 달랬다. 그러던 중 마산포교당이문을 열고 젊은 승려 경봉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계를 철저히 지키고 설법도 잘 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것, 이곳에 오기 전에 6개월간 토굴 속에서 지독하게 정진했다는 것, 석장을 쥐고 요령을 흔들며 사람들을 불러 모아 법문을 했다는 것, 졸음을 쫓기 위해 기둥에 머리를 박고 얼음을 입에 물었다는 등 그에 대한 소문이 마산시내에 자자했다.
열두 살 어린나이에 어머니와 할머니를 잇 따라 잃고 봉화 청량사에서 풍경과 독경소리를 들으며 2년간 지냈던 위암으로써는 불교가 아련한 추억으로 와 닿았다. 그러나 위암이 경봉을 만난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젊은 사문이 시문에도 대단히 밝다는 점이었다. 그 무렵 옛 스님들의 시를 정리하고 있던 위암에게 경봉은 이래저래 여간 흥미 있는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위암은 첫 눈에 경봉이 기품 있는 수행자임을 알아보았다. 180센티의 훤칠한 키에 단아한 입술, 거기에 한없이 맑은 눈은 26년의 나이 차이를 떠나 경봉을 흠모하도록 했다.
“경봉선사는 통도사의 큰스님이다. 그의 성품은 단아하고 학식은 해박하여 시를 잘 짓고 글씨도 잘 쓴다. 마산포교당에 와 머물면서 설법하고 계행을 지니니 모든 선남선녀 신도들이 신앙하고 귀의하여 계를 받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 또한 스님의 오묘한 견해와 정진 그리고 원만하면서도 맑고 담박함을 좋아해서 법석에 임하여 법문을 들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훗날 위암이 밝히고 있듯 경봉과의 교유는 그의 지친 삶에 청량제 역할을 했고, 특히 서신으로 시를 주고받던 일은 위암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우담화 꽃 핀지 그 몇 해인가
창생을 제도하며 세상을 경계 하네
사자후 토하는 바위 앞에 푸른 뫼 우뚝하고
용트림 하는 바다 위에 흰 구름 떴네
보배 칼날 찬란하니 두려움 없고
지혜 달 영롱하니 흥이 겨워라
하늘같이 높은 파도 뉘라서 헤쳐 나오나
야삼경 금까마귀 강가에 내려오네
(優曇花發幾春秋 晩度蒼生警世樓
獅吼巖前靑嶂立 龍吟海上白雲浮
寶鋒璨爛心無怖 慧月玲瓏興未收
誰在滔天浪裡返 金烏夜半下長洲)
칠언시가 담긴 경봉의 편지에 위암은 ‘(시를 보니) 마치 하늘 꽃이 어지러이 내리는 듯하여 입에 향기가 나도록 읊조리고 외웠다’며 경봉의 운에 맞춰 쓴 칠언시를 한편 보냈다.
합포성 서편 학령엔 가을이 물들고
포교당 높은 곳 선정이 깊네
숲 사이로 돛단배는 연기 속에 아물아물
하늘가 산봉우리는 물위에 비치네
등불 깜빡이고 향 연기 어리는데 스님은 선정삼매
범종소리 그치자 꿈에서 깨어났네
둥글고 둥근 동방의 밝은 달
우담화 피듯 오대주 두루 비추소서
(合浦城西鶴嶺秋 敎堂高處敞禪樓
樹稍遠舶煙中出 天際群峰水上浮
燈邃香殘僧獨定 梵淸鍾歇夢初收
也知滿滿東方月 遍照曇花五大洲)
나이와 사상의 차이를 뛰어 넘어 두 사람의 우정은 계속됐다. 특히 경봉이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는 보은탑을 건립할 때 위암이 적극 나서 이를 도왔고, 「조선불교총보」(1919)에 ‘마산신조불석탑(馬山新造佛石塔)’이란 글을 기고해 경봉의 갸륵한 뜻을 기리기도 했다.
1919년 7월 경봉이 내원사의 주지로 임명돼 길을 나서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게 탑과 위암이었다. 그리고 아쉬움과 함께 위암이 불법에 계속 관심을 갖기를 은근히 당부하는 위의 시를 보낸 것이다.
이에 위암은 ‘내가 알기로는 산승의 병과 발우는 뜬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 같아서 머무름도 집착함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는데 어찌 서글픈 정이 없으랴. 더구나 스님께서 먼저 서신을 주었음에 그 운으로써 화증(和贈)하노라’며 한 편의 시를 써 인편에 전했다.
높고 높은 공덕탑은 정성을 표현했고
석면에 장경새김 믿음의 뜻이 있네
염화설법 늘 즐거워 법회에 임했는데
뜻밖에도 석장 날려 산으로 들어가네
재 넘어 구름은 멀리 영축산까지 어두운데
바다 달은 뜻이 있어 보배 거울처럼 비추네
내년에 숲 속에 딸기 익으면
예 놀던 바위 위에 다시 이름 써보세
(峨峨功塔表精誠 石面卍書信有情
每喜拈花臨法會 不期飛錫入山行
嶺雲遠逗靈峰黯 海月長留寶鏡明
來藏林間朱苺熱 舊遊岩上更題名)
그렇게 세월은 흘러 저술작업에 전념하던 위대한 문사 위암은 1921년 10월 2일 ‘내가 죽으면 묘비에 숭양산인(嵩陽山人)이라고만 쓰면 족하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고단한 삶을 마무리했다. 반면 경봉은 그 뒤 불같은 구도심으로 정진에 힘써 큰 깨달음을 얻고 중생교화에 매진하다가 1982년 7월 17일 “스님 가시고 난 뒤에도 스님을 뵙고 싶습니다. 스님의 모습이 어떠합니까?”라고 묻는 제자의 눈물 섞인 질문에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아라.”란 말을 남기고 이승과의 인연을 접었다.
무사의 생애는 한 자루의 칼이요, 문사의 생애는 한 자루의 붓이요, 선승의 생애는 한 자루의 주장자라고 했다. 붓과 주장자로 길을 보이고 시대를 이끌었던 두 사람은 세월의 무게 앞에 비록 세연(世緣)을 접었지만 그들이 나누었던 문자향(文字香)만은 아직도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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