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학강좌>두번째이야기 인천의 조선신보와 한국언론사 ②
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2009-06-25 15:56:48
3대 일본어 신문…서울서도 인용보도
화도진도서관과 함께하는 인천학 강좌 > 두번째 이야기 < 인천의 조선신보와 한국언론사 ②
인천 언론의 과거를 돌아볼 때 많은 사람은 해방기 때 나온 ‘대중일보’에 주목했다. 어떨 때는 대중일보야말로 진정한 인천 언론의 시작이라며 높이기도 했다.
대중일보는 해방기 좌우대립이 극심할 당시 좌파신문으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우수한 문인들이 모여 만들었다. 하지만 대중일보가 다는 아니었다.
정진석 교수는 “일본인이 인천에서 발행했던 신문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며 “씁쓸한 역사이긴 하지만 조선신보를 비롯해 인천에서 발행됐던 신문을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004년 ‘인천부사’가 번역·출간될 당시 논란이 제기된 바 있다. 1883~1933년까지 인천의 50년을 기록한 책인데 식민사관이 담겨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친일파를 미화하자는 게 아니라 진작에 번역됐어야 하는 책이었다. 물론 엄정한 주석 작업이 동반돼야 하지만 말이다.
조선신보도 마찬가지다. 한국언론사를 꿰고 있는 정 교수는 인천의 초창기 언론사를 주목하자고 했다. 1890년 제일은행 인천지점장은 ‘인천활판소’라는 인쇄소를 설립했다. 이 인쇄소 덕분에 경인지역에서 일본인들이 처음 신문을 발간할 수 있었다.
바로 제물상보에서 창간한 ‘인천경성격주상보’(1890년 1월28일 창간)가 바로 그것. 이후 ‘조선순보’를 거쳐 ‘조선신보’가 1892년 선보였다. 조선신보는 1919년 12월18일 인천을 떠나 서울로 본사를 옮겼고 1942년 2월28일까지 지령 1만4천666호를 내고 폐간됐다.
정 교수는 “인천을 떠났지만 경제적으로 인천이 중요한 곳이었던 만큼 지사는 인천에 남겨두었다”고 말했다. 그 사이 제호가 ‘조선신문’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이 신문은 경성일보, 부산일보와 함께 당시 조선에서 발행되던 3대 일본어 신문 중 하나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다.
“군산의 시장 ○○○이란 사람이 탐학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뜯는다. 한인 가옥 건축해도 세금을 받았다.”
독립신문 1899년 9월23일자는 조선신보를 인용해 보도했다. 3일 후에는 조선신보에 실린 반론까지 인용·보도했다.
이밖에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서울에서 나온 신문들이 조선신보라는 출처를 밝히며 인용, 지면을 채우기도 했다. 황성신문은 조선신보를 비판하는 논설을 6일 동안 쓰기도 했다. 조선신보의 관점 여부를 떠나 그 만큼 주목받았던 신문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다.
“왜 우리나라 신문에는 근사한 광고가 없느냐?” 황성신문 독자투고에 실린 내용이라고 정 교수는 소개했다. 기껏해야 ‘도장을 잃어버렸다’거나 ‘조카가 땅 문서를 팔아먹었다’는 등의 광고만 실렸을 뿐있다.
이에 비해 조선신보의 광고를 보면 인천 경제의 단면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다양한 광고가 게재됐고 전면, 양면광고까지 있었다. 평양에 있는 기업체는 물론 용산에 있던 벽돌공장도 조선신보에 광고를 냈을 정도다. 근대 경제사 연구 뿐만 아니라 광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1907년 1월1일자 조선신보의 신년특집호가 50여 페이지가 발행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신보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없었다. 지면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 치하에서 즐거운 기억은 아니지만 나쁜 것도 역사다.” 정 교수는 식민관점 등을 의식하기 보다 우선 사실을 밝히는 게 더 중요하다며 강의를 마쳤다. 김창문기자 asyou218@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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