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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자료]<1> 일본인 발행신문의 효시 조선신보-조선신문 [1부]

by 형과니 2023. 5. 29.

[자료]<1> 일본인 발행신문의 효시 조선신보-조선신문 [1]

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2009-07-02 11:14:46

 

[화도진 도서관 인천학 강좌 강의자료1]

일본인 발행신문의 효시 조선신보-조선신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언론사>

 

 

* 일어신문 발상지 인천

 

인천은 외국의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이었기에 일본인들이 일찍부터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한 도시다. 일본에서도 도쿄보다 먼저 요코하마(橫價)에서 신문이 발행되었기 때문에 일본 신문협회가 설립한 신문박물관(1999년 개관)을 그곳에 세운 것도 신문 발상지라는 지역적 연고가 있기 때문이었다. 인천은 요코하마와 비슷한 입지조건을 지닌 항구도시였고일본인 들이 서울보다 먼저 신문을 발행하여 한때는 몇 개 신문이 자리잡기도 했었다.

 

조선에서 일본인들이 최초로 신문을 발행한 도시는 부산이었다. 일본 거류민들의 재부 산상법회의소(山商法會議所)18811210열부터 조선선보라는 순간(句刊) 신문을 창간하여 약 6개월간 발간한 것이다(1) 조선정부가 발행한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보다 12개월 앞선 것으로인천에서 발행된 조선신보와 명칭은 같지만 별개의 신문 이었다. 재부산일본상법회의소는 일본 외무성에 신청하여 1879년 무렵에 일본에서 한글한 자일본문 활자를 구비한 인쇄기를 들여와서 교린수지(交憐須知)J (18811월 발행)라 는 조선어 교과서를 인쇄하였다. 조선신보도 이 인쇄기로 발행하였던 것이다.

 

인천에서는 1890128일에 일인들이 인천경성격주상보라는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하여 제호를 바꾸면서 1919년 말까지는 인천에 자리잡고 있다가 서울로 본사를 옮겨 1941 2월까지 발행되었다. 인천은 일본과 서양의 문물이 조선에 유입되는 첫 관문이면서 한말 부터 일제기간의 신문발달사에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우리냐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J (1883.10.31)는 정부 기구인 박문국에서 발행하였는 데 창간 다음해인 188412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타 없어져서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1886125일에 한성주보로 제호를 바꾸어 다시 발행하였으나 1888714일 경에 박문국이 폐지되면서 자연히 신문의 발행도 중단되고 말았다.

 

 

(1)부산에서 발행된 조선신보는 일본 도쿄대학에 제5(1882.3.5)부터 제12(1882.5.15)까지 모두 8호가 소장되 어 있다.

 

인천에서 일본인들이 일본어로 신문을 창간한 시기에는 한성주보가 폐간되어 조선에서 는 아무런 신문도 발행되지 않고 있던 때였다. 인천은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상업적 목적에서 신문의 필요성도 있었지만 일본의 조선 진출에 신문이 중요한 역할 을 한다는 인식도 있었다. 신문은 독자와 광고의 많고 적음이 그 존립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인천은 일본인 거주자도 늘어나는 추세였고일본에서 조선에 수출하는 상품의 광고도 다양했다. 서울과의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수입과 수출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 인천 이었다. 일인들의 신문 발행에 인천은 적절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상보-순보-신보로 제호 변경

 

1890128일 제물상보(濟物商報)사에서 창간한 인천경성격주상보(仁川京城隔週商 報)J 는 경인지역에서 일인들이 처음 발간한 신문이었다.(2) 창간 전인 1889년 가을에 제일은행 인천지점장 江南哲夫의 주도로 인천활판소라는 인쇄소를 설립하였는데상보는 이 활판소에서 인쇄하였다. 발행인은 사노 세이시(住野誠之)였다. 제호에 신문의 성격이 드러나듯이 경인지역(인천과 서울[경성])의 상업관련 소식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월 2회 격주 발행이 었다. 초기 신문은 실물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 후에 이름을 바꾸어 발간된 조선선보와 체재가 비슷했을 것이다. 조선신보는 일본 상인과 무역상들에 게 도움이 되는 기사와 광고가 질렸다.

 

인천경성격주상보1891815얻 제44호까지 발행된 후 91일부터논 조선 순보(朝蘇句報)J 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하였다. ‘순보는 열홀에 13회로 발행의 간격이 약간 빨라졌다. ‘상보창간 당시 인천에는 일본인 거주자가 165호에 1361명이었고 무역액은 연간 229만엔 내외였다. 그러나 순보로 제호를 바꾸던 때의 인구는 326호에 2446명이 거주 하였으며 무역액은 450만엔을 돌파할 정도로 개항이래 성장세에 가속이 붙고 있었다3)

 

조선순보는 189245일까지 22호를 발행한 후 열흘 뒤인 415월부터는 제호를조선선보(朝蘇新報)J 로 또 한번 바꾸었다. 발행 간격을 제호로 삼는 신문은 간격이 달라 지면 제호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조선정부의 박문국이 발행하던 한성순보가 주간 으로 발전하면서 한성주보로 제호를 바꾸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조선신보인천경성격주상보에서 시작하여 조선순보를 거쳐온 신문이므로 앞의 두 제호로 발행된 지령 44(상보)22(순보)를 합하여 67호부터 지령을 매기기 시작했다. 이는 앞에서 인 용한 조선선보의 본사의 소연혁에 분명히 적혀 있다.4) 그런데 후에 발간된

 

인천부사(仁川府史)j (1933)에는 조선신보가 지령 제66호부터 출발하였다고 썼지만 어떤 착오가 아닌 가 한다

 

2) 本社6J 조선신보지령 3000호 특집1908.1.9; 仁川府IF仁川府史J] 1933p.1390.

 

3) [仁川府史J] p.1390.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415일부터제호를 바꾸면서 지령을 67에서 시작했다는 조선신보 기사가 사실인가 하는 문제다. 조선신보의 실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지면은 동경대학 메이지신문잡지문고(明治新聞雜誌文)에 소장된 1892515일자지령은 제66호이다. 아직 순간 발행 시기지만 제호는 조선신보로 바뀐 후였다.4 15일에 67호를 발행했다는 주장(조선신보, 「本社η小治黃J 1908.1.9.)이나 66호부터 시작했다논 인천부사j (1933)의 서술은 이 실물 지면을 보면 모두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히 한 달 후인 515일에 발행된 신문에 지령이 66호로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리 하자면 조선신보로 제호가 바뀐 날자는 415일이지만지령 66호가 발행된 날은 515일 이 확실하기 때문에67호가 발행된 날짜는 10일 후인 525일이 되어야 한다. 역시 동경대 학이 소장하고 있는 189265일자 지면의 실물을 보면 지령이 제68호로 되어 있다.

 

상보가 창간된지 1년 후인 1891년 무렵의 인천은 일인 거주자도 늘고무역액도 두 배 로 늘어나고 있었으므로6) 이에 힘입어 조선기신보는 18927월 제71호부터 주간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발행일은 매주 토요일이었다. 그러나 18947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지령 제 181호로서 휴간했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181호와 723읽에 발행한 호외는 동 시에 발매가 금지되고이미 우편으로 우송한 것도 염중히 단속하였다고 오사카아사히신문(大吸朝B新聞)j 189482일자가 보도했는데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경영의 어려움 때문에 신문 발행이 중단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7)

 

18951025일 아오야마 요시에(山好惠)가 격일 발행으로 조선신보를 복간했다. 아오야마는 앞에서 말한 인천활판소가 창립될 때에 9명의 주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오사카 아사히의 통신원이기도 했는데이 동서의 국면이 다사(多事)한 때에 조선반도 유일의 신문은 그 암혹을 비추는 한 가닥 광명으로서 원컨대 일한(日韓) 양국의 이익을 위 해 진력한다는 거창한 목적을 내세웠다.8) 아오야마는 조선신보사가 발행한 조선사정(발행일 18921015)의 서문에서 자신이 조선신보에 근무하는 여가에 책을 썼으며 일 본인이 조선에 관한 책을 처음으로 발행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아오야마는 18961123 25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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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신보지령 3000호 특집1908.1.9.

 

5)'仁川府史J 1933p.1390.

 

6) 조선신보, 「本社η小治章J .

 

7) 樓井義之, 『明治εJJ 동경龍漢書舍1995p.180.

 

8) 樓井義之p.179.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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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보와 서울의 한성신보

 

조선신보가 휴간 상태에 있었던 1895216일에는 서울에서 일인들이 한성신보(漢 城新報)J 를 창간했다. 국한문 혼용지면과 일어 전용으로 편집한

 

2개국어 신문이었다. 1년 후인 189647일 서울에서는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한글전용으로 발간한 최초의 민간신문이었다9)

 

인천의 조선신보는 일어전용이었으나서울의 한성신보는 국한문 혼용과 일어 전용의 2개국어 편집이었고서재필의 독립신문은 한글전용과 영어신문의 2개국어 편집이었 다. 인천과 서울에논 3개 신문이 각기 다른 언어의 격일간으로 발행되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어

 

일어

 

영어

 

독립신문(1896.4.7)

 

한글전용(3)

 

 

 

영문(1)

 

조선신문(1890.1.28)

 

 

 

일어전용

 

 

 

한성신보(1895.2.17)

 

국한문(1)

 

일어(3)

 

 

1896년 서울과 인전에서 발행되딘 신문

 

2년 후인 1898년에는 서울에서 한국인들이 발행하는 일간지 몇 개가 더 나타났다. 매일 신문데국신문황성신문이 창간된 것이다. 18973월부터는 인천상업회의소 이사였던 냐카무라 타다요시(中村忠吉)가 조선신보의 경영을 맡았다. 냐카무라가 조선신보를 경영하던 시기에 이 신문 발간에 관계했던 사람 가운데 하기야 차즈오(較谷壽夫) 아리후 주로(購生十 郞)오가와 유우조(JfI雄三)는 후에 조선의 일본어 신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인물 들이다. 하기야는 인천에서 한국어 신문 대한일보J (1904.3.10)를 창간했다가 1907년에논 다시 조선신문으로 돌아와서 사장을 맡는 사람이다. 아리후는 하기야가 창간했던 대한일보를 인수 경영하였고오가와는 1908년에 군산에서 발행된 군산일보의 주필을 맡았다가 1910 년에는 전주신보의 공동경영자로 참여하였다. 조선신문의 주필이였던 有馬純吉1921 년에 인천신보를 창간하였다가 1921년에는 경성일일신문을 인수 경영하였다.

 

나카무라는 원래 무역상으로 조선에 왔기 때문에 신문을 경영하면서 수출입 업무도 겸 하고 있었다. 규장각 문서에는 나카무라가 아리후 주로와 공동으로 1903년에 대한제국 정부 에 연당 25원 가격으로 종이 1만연()을 납품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19046월까지 지급 받지 못한 대금 232,125원과 해관세(海關輪)창고 보관료방습간수 등의 비용 8,795을 지출해달라고 요구한 문서가 남아았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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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정진석, 『언론조선총독부』 , 커뮤니케이션북스2005pp.27 - 33.

 

10) 규장각문서, 『各部請議書存案26請議書 84.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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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보에는 당시 한국인이 발행하던 신문과 비교하면 광고가 훨씬 많았다. 1890년대에는 일본의 은행광고를 비롯하여 놀랍게도 아사히 비루(맥주)포도주일본의 청주 같은 광고가 실렸고상세한 물가시세도 중요한 뉴스로 편집되었다. 그 후로도 조선신보에는 다양 한 광고가 실렸다. 조선신보의 1890년대 광고는 인천을 통해 일본과 서양에서 어떤 상품이 들어왔는지 실물을 보여주는 박물관과 같다. 서울에서 발행되던 한성신보는 정치적인 기사 를 다루는 종합지였지만 조선신보는 상업목적의 경제지 성격이 지면에서도 확연히 나타난다. 때로는 신문의 1면 머리에 광고를 싣기도 하고1면 전체에 광고를 게재하는 때도 있었 다.

 

조선신보는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매월 50엔의 보조금을 받았다. 사주 겸 주필이었던 나카무라가인천주재 일본영사관에 제출한 1898년도 조선신보사 수지결산서에 따르면 한 해 수입금은 2,43351전이었는데외무성으로부터 지급 받은 600(매월 50)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출은 2,12660전으로 30691전의 이익이 났다11) 같은 기간에 일본 외무성은 서 울에서 1895216일에 창간된 한성신보에도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었다. 한성신보에는 18953윌부터 매월 130엔을 지급하다가 7윌부터는 170엔으로 인상했고18967윌부터는 300엔으로 대폭 인상했다.12) 한성신보에 비하면 조선신보의 보조금은 휠씬 적은 액수였는데조선신보는 상업목적의 경제지로서 자체적으로도 거의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영사관이 신문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이유는 신문의 내용을 조종하는 동시에 신문 을 보호 육성한다는 목적이었다.13) 일본의 조선침략에 신문을 활용한다는 전략도 있었다. 한성신보는 조선어 페이지가 있었으므로 조선인 독자도 있었으며 일본의 조선 침략을 선전 홍보하는 역할이 컸던 반면에 조선신보는 주로 상업적인 내용으로 발간되는 일본어 신문이기 때문에 주로 일본인이 독자였으므로 보조금 액수에 차이를 두었을 것이다. 한성신보는 외무성의 보조금을 받아 기관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로는 구마모토(熊本) 국권당의 거점으로 운영되다가 1906831일 통감부에 매수되어 경성일보가 되었다.

 

조선신보는 경성일보가 창간된 뒤에도 계속해서 보조금을 받았다. 190766일 통감부 인천 이사청 이사관 시노부 윤빼이(信夫淳平)가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하라(廳原定吉)에 게 보고한 내용 가운데 지금까지 조선신보사에 보조금 100엔을 지급하여 사주가 전액을 수령해 왔기 때문에 효과가 적다고 판단하여 신문사에 50주필과 다른 기자에게 각각 50엔을 지급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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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仁川府史J pp.1385~ 1386. 이익금은 307.91엔으로 되어 있으나계산상

 

306.91엔이라야 맞 다.

 

12) 住住博雄熊本國權ε朝蘇lζ't6新聞事業J.國士館大學文學部人文學會紀要J 91977.1pp.22-23.

 

13)仁川 府史J pp.1387.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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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일의 연중무휴 신문

 

격일간이었던 조선신보가 언제 일간으로 발전했는지 남아 있는 지면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날짜를 알 수는 없다. 1902년에 일간제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지만15) 19031214일 자 황성신문은 조선신보가 21일부터매일 발간하고 또한 일간으로 한국어 신문도 발간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19042월부터 일간지로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310일 인천에서 국한문 혼용 한국어 일간신문 대한 일보가 창간되었다. 주소는 인천항 각국조계거류지(各國租界居留地) 19호 조선신보사였 고발행 겸 편집인은 하기야 카즈오(壽夫)였다. 하기야는 조선신보에 관계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조선신보는 한국어 신문 대한일보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대한연보는 인천에서 창간되었으나 12월부터 본사를 서울로 옮겨 발행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조선신보에는 광고가 많았다. 대한제국 경제의 일본 예속화가 심화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식민지의 토대가 구축되던 시기에는 조선신보의 광고도 양적으로 늘 어나고 있었다. 190811일자(2731)는 무려 50여 페이지의 신년특집을 발행했다. 특집 에는 기사도 있었지만 광고가 충당되지 않으면 이처렴 많은 지면을 발행하는 편집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다. 서울에서 한국어로 발행되는 신문은 겨우 4 페이지를 발행하고 있던 시 기에 일시적이고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많은 지면을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광 고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담배그리고 여러 종류의 수입상품을 전면광고 로 채울 수 있었다.

 

1908418(2813)에는 월요일 휴간을 없애고 연중무휴 발행을 선언했다. 지면도 개혁하여 424(2818)부터 오른 쪽 상단에 세로로 서 있던 제호의 위치를 위로 올려서 가로로 눕혀 통단(通段)으로 매치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신문이 가로 쓰기로 바꾸면서 일반 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제호 옆에 의론공평(議論公平) 기사정확(記事正確)"이라는 구호 를 넣었다가 67(2857)부터는 재한유일(在韓唯一) 연중무휴(年中無休)"로 구호를 바꾸 었다. 일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발행하는 한국에서 단 하나의 일간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신보라는 제호는 언론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11 9일에는 지령 3000호까지 발행하고 특집호를 내기도 하였으나 겨우 9호를 더 발간한 다음인 11203009호로 종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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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仁川府史Jp.1388.

 

15)仁川府史Jp.1391. 한편 樓井義之명치 33[1897]3월 추곡수부의 생삽랑 등도 더하 여종래 격일발행을 일간으로 바꾸어 양양한 전도가 기대되었으나 ... " (앞의 책p.18l)라고 썼 지만 그때 벌써 일간으로 발행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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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木據常三의 이름으로 종간사를 내면서 다 년간의 분규가 있었다고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사장 나카무라(中村忠吉)1905120일에 사망했고16) 19075월에는 조선신보 기자였던 今井忠雄가 인천에서조선타임스J (朝蘇-1 AA)를 창간했기 때문에 조선신보와의 주도권을 둘러싼 분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써 조선신보라는 제호의 신문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종간사 와 함께 사원들은 조선신보를 보내며라는 글을 실어서 19년 역사가 종언을 고하는 아쉬움 음 표했다.

 

조선신문으로 재출발

 

그러나 조선신보는 여기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5일 후인 121일에는 제호를 조선신문 으로 바꾸고 제1호부터 다시 시작하여 발행되었다. 조선타임스를 인수 합병하여 새로운 제 호와 지령으로 창간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창간이래 제호가 바뀌면서도 지령은 이어왔으 나 이때부터는 새로운 제호로 재출발하였다. 사장 하기야 카즈오(壽夫)를 사주(社主)로 하여 주필 木據常三영업부장 오니시 요타로(尾西要太郞)경성지사장 오바타 토라타로(I播 虎太郞) 등으로 진용을 정비하여17) 인천지역의 유력 신문의 위치를 확고히 했고서울의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와 쌍벽을 이루었다. 1912~ 1913년 무렵에는 국한문판 신문도 부록으 로 발행하였는데 실물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국한문판 신문에 기자로 근무했던 최원식 (崔援植)1920년에 조선일보 창간 사회부장을 지낸 뒤 1924년에는 최남선의 시대일보정리부장을 거쳐 광복 후인 1945년에는 대동신문(大東新聞)J 의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최 원식은 한말에 발행된 친일지 국민신문의 사장으로 역시 친일파였던 최영년(崔永年)의 아들이다.

 

서울에서는 190691엘 통감 이등박문의 후원으로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가 창간되었다. 1895년부터 발행되던 한성신보와 러일전쟁 직후에 창간된 대동신보(大東 新報) J (1904.4.18)를 매수 통합하고 제호를 경성일보로 명명한 것이다. 이로부터 인천의 조선신문과 서울의 경성일보는 한말 일본인 발행 신문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19108윌 한일합방이 강제로 체결되자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다케(內正殺) 는 조선의 언론계를 식민지 통치에 유리하도록 개편하기 위해 신문통일정책을 강행했다.18) 조선인들이 발행하던 신문은 매일신보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없애는 동시에 일본인 발행 신문도 경성일보에 통합한다는 방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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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大韓日報1905.1.21.

 

17) 조선신보1908.12.1"本社員姓名""新聞總寶" 1911년판

 

p.392 : 仁川府앞의 책p.1391 :統藍府公報801908.12.12.

 

18) 時事新報1910.10.2" 寺內總督6新聞統一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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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의 신문통일정책을 추진한 실질적 인물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였다. 아카시는 데라우치를 대리하여 한말부터 발행되던 조선어 신문의 처리를 강행했다.

 

합방과 함께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없애고 대한황성제국등 독립을- 상징하는단어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신문의 제호도 수난을 겪였다. 통감부가 매수한 대한매일신보

 

는 제호에서 대한이라는 단어를 없애고 <매일신보(每日申報l>로 이름을 바꾸어 어용지로 존속하도록 했다19) 황성신문(皇城新聞) 은 한성신문<j成新聞l>으르, 대한민보(大韓民報lj <민보>(民報)로 각각 바뀌었다. 친일지대한신문(大韓新間)한양신문 (漢陽新閒] 으로 바뀌었고일진회의 기관지국민신문[國民新聞] 은 매일신보에 통합되었다. 황성신문은 한양신문(漢靖新聞)으로 제호를 바꾸었지만 914일자 지령3470호 문을 닫고 말았다.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도 폐간대상이였다. 일본어신문 조선일보(朝蘇日報) 는경성일보에 흡수 통합되었다. 조선일보의 원래 제호는대한일보(大韓日報)였다. 러일전쟁 1개월후인1904310일 인천에서 창간 되었는데1210일에는서울로 발행소를 옮겼고. 19104윌경에 제호를 조선일보로 바꾸어 발행하다가 경성일보에 통합된것이다 20)

 

그러나 조선신문[朝靜新聞] 은 폐간에 불응하고 발행을 계속했다 1937114일자경성일보에 실린 조선신문의 광고에 의하면 1906년 이등박문이 경성일보를 창간 할때에 조선신문을 매수하려했고합방후 총독 데라우치도 통합을강요하였으나 통합에 반대했다는 것이다1912년 신년호는 무려 92 페이지의 특집을 발간 할 정도로 경영도 안정되였다.

 

한일합방 후 총독부는매일신보 외에는조선어 신문을 모두 폐간 시켰으나 조선신문은 조선어판을 발행하였다. 조선어판이 언제부터 발행되였든지 확실하지 않지만합병후에 서울에서 매일신보 외에는 조선어판 신문이 모두폐간된 상황에서 1912년 무렵에조선어신문을 발행한것으로보인다.

 

조선신문은 조선왕실로부터 여러차례 하사금을 받았다. 순종실록부록에 나타나는기록에 의하면191381일 순종이 조선신문사의 조선문발전기념호 발행을 격려하여 특별금200원을 하사했고. 191449일에는 조선신문이 제3회기차박람회(汽車博賢會)를개최했을때에도300원을하사했다19161013일에는낙성식을 올린경성일보사에 1천원조선선문사에500원을하사했다. 1922327일에는 조선명승풍속사진첩 의 출판 장려를 위해 일금 150원을 하사했다. 조선신문은 일본인이 발행한 신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컷으며, 경성일보에 버금가는 사세를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지원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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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酒田正敏외편 < 德富蘇[IJ關係文書>근대일본사료총서7-2 山川出版社. 1985. p.23.

 

20) 德富蘇峰記念館所藏 民友社關係資料集J 民友社사상문학총서 별권. 1985. 三一書房

 

pp.356-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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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