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2>일본인 발행신문의 효시 조선신보-조선신문[2부]
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2009-07-02 11:16:09
[화도진 도서관 인천학 강좌 강의자료2]
일본인 발행신문의 효시 조선신보-조선신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언론사>
서울로 본사 이전
1919년12월18일 조선신문은 인천을 떠나 서울로 본사를 옮겼다. 인천시민에 사의를 표하면서 사옥을 서울로 옮기기로 하였다는 "사고"를 내면서,발상지였던 인천에는 지사를 남기고 본사를 서울로 이전한 것이다. 공장 정리를 위해 19일자 조석간을 휴간하고 20일자부터 서울에서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마키야마 코우조우 가 하기야 로부터 신문사를 매수했다.
조선신문이 본사를 서울로 옮긴 가장 큰 이유는 "상보"가 창간되던 때와 비교하면 신문 발행의 환경이 크게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간 무렵의 인천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상업적인 전진기지 성격을 띄고 있었고,일본인 거주자가 서울보다 많았지만 신문사를 서울로 옮기던 1919년말에는 서울이 식민통치의 확고한 중심이 되어 있었다. 신문의 본사가 인천에 있다는 것은 입지조건상 불리한 상황이었다. 신문의 성격도 "상업"에서 정치,경제,사회를모두 아우르는 종합지로 바뀌어 있었다. 신문사를 인수한 새 사장의 입장에서도 신문사를 서울로 옮기지 않을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새 사장 마키야마 코우조우 [1882,1,20]는 언론인이자 정치가였으며, 실업인이었다. 서울과 동경,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나가사키를 활동무대로 삼았던 마키야마가 인천에 있는 신문에 만족 할 수 없었을 것이다.마키야마는 1906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에 건너와 언론분야에 종사하였다. 같은 해 7월 창간 준비중이던 경성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 생활을 하였다. 친일파 송 병준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대한제국 정부의 고관들을 전화로 불러서 취재하는 솜씨가 뛰어 났다. 1909년 5월 1일에는 일본전보통신 서울지국 주간[지국장]이 되었다. 지국장 재직중에는 [조선신사명감-朝鮮紳士名鑑](일본전보통신 경성지국,1911)이라는 인명럭을 만들고 1913년 4월1일에는 [조선공론]을 창간하여 일본 전보통신과 제휴했다. 1915년에는 충청남도 청양군 소재의 텅스텐 광산[청양광산]을 경영 하여 크게 재산을 모았다. 정계로 진출하여 고향 나가사키에서 1917년 이후 여섯차례나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이같은 경력을 쌓아가고 있던 마키야마는 1920년 1월에 하기야 토시오가 운영하던 [조선신문]을 인수하여 사장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에서 발행되는 일본 언론의 개척자로 불리는 인물이면서, 정치가로도 성공 하여 1931년에는 해군정무차관에 임명되었으며,경성거류민단의원,경성학교조합 의원등으로도 활동했다. 조선신문은 경성일보와는 경쟁적인 입장이었다. 사옥을 서울 태평로의 남대문 바로 옆에 신축하고 전국에 걸쳐 지국,지사를 두고 영업을 하였으며 동경과 오사카에도 지국이 있었다. 경성일보,부산일보와 함께 당시 조선에서 발행되던 3대 일본어신문 중 하나로 조선 거주 일본인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다. "일본인의 대륙에 대한 진취,발전에 공헌하는 것을 사명으로 " 한다는 목적을 표방하여 일본의 대륙 진출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논조를 취하였던 것이다.
마키야마가 경영권을 인수한 후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신문에 관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1937년 11월 마키야마는 회장이 되고,사장에는 김 갑순이 취임했다. 김 갑순은 공주에 근거를 둔 조선인 자산가였다. 그는 한 말에 충청남도 봉세관,부여군수 등을 지낸 후 개간 사업에 손을 대었으며,이후 시장경영,자동차 운수등의 사업을 벌였고,도회의원,중추원참의등을 지냈다.
조선신문은 대표에 김 갑순이 취임하는등의 기구개편 사실을 경쟁관계였던 경성일보에 "기구 개혁이 당하여 본지의 사명을 선포 하노라" 라는 제목으로 거의 한 페이지 전면을 차지하는 전 7 단 광고를 게재하며,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 광고에는 경성일보가 1888년 4월 2일에 창간되었다고 썼지만,무슨 근거로 이렇게 썼는지 알 수 없다. 기구 개편에 앞서 마키야마는 이 해 1월5일부터 12월16일까지 43회에 걸쳐 [조선신보와 나]라는 글을 연재 하면서 자기선전과 흥미본위의 풍문을 게재하는 일도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전연 없었던 일을 늘어 놓기도 할 뿐 아니라 "위정당국 또는 군부를 비난 공격하고 후방의 결속을 문란시키고 조선의 민족의식을 고양하도록 선동하는 일도 있어서" 총독부 정무국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이리하여 5 회의 발매 반포 금지와 차압처분을 받다가 12 월 초순에 이르러 사법당국의 취조를 받기에 이르렀다.{ "조선출판경찰개요" , 1937년, p131~151},조선신문은 경성일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부수를 발행하였는데, 1929년 18,437부, 1933년 20,717부, 1935년 20795부, 1939년 24,783부였던 것으로 일본 경찰조사에 나타난다.
조선신문은 1942년 2월28일까지 지령 제 14,666호를 발행한 후 총독부의 1道 1紙 정책에 따라 폐간하였다. 이에 앞서 한국어 신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 8월10일에 폐간 되었으므로 서울(경기도)에서는 경성일보 , 매일신보 , 조선상공신문만 남게 되었고, 조선신문 , 조선일일신문 , 조선매일신문은 2월28일자로 폐간한 것이다. 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는 이로써 조선에서의 "신문통제"가 완료되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숨어 있던 초기 지면
조선신문은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신문 가운데는 52년이라는 가장 긴 연륜을 쌓았다. 이 신문의 역사는 인천에서 발간되던 시기와 서울에서 발간되던 시기의 2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제 1 기는 1890년 1월에 창간되어, 격주 , 순간 , 주간 , 격일간 , 일간으로 발전하던 1919년 12월 18일까지 19년에 걸친 기간이다. 제 2 기는 서울로 본사를 옮겨 사세를 확장하면서조선의 일본어 신문 가운데 경성일보와 쌍벽을 이루다가 폐간된 1941년 2월말까지이다.
제호와 발행 기간도 여러 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인천격주상보 - [월 2 회] 에서 조선순보 - [월 3 회] -- 조선신보 -[주간] --조선신문--[격일간에서 일간] 으로 바뀌고 연중무휴 발횅에 조석간 발행으로 발전했다. 반세기가 넘는 긴 발행기간의 지면이 모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교적 많은 지면이 보존 되어 있기 때문에 신문이 발간된 기간의 역사와 일제의 침략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번에 제작하는 지면은 인천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인천학에 국한되는것이 아니라, 개항이래 일제 식민지 시기의 포괄적인 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1차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영인되는 지면은 일본 도쿄대학이 소장중인 조선신문 11호를 앞에 넣고, 1906년 9월부터 1921년 3월까지 인천에서 발행 되다가 서울로 이전한 직후까지의 기간에 한정되고 있는데, 기왕 시작한 사업이니 앞으로 그 이후의 지면까지 모두 입수 제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도쿄대학의 "메이지신문잡지문고" 에는 1890년대에 발행된 초기의 지면 12호이다. 기간은 짧지만 이 신문의 성격과 당시 인천을 거쳐서 국내에 들어오던 수입물품의 현황, 한일관계등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892년도
5월15일 [66호] 5월25일 [67호] 6월5일 [68호] 9월2일 [80호]
1896년도
8월17일 [325호] 8월27일 [330호] 11월6일[364호]
11월22일 [371호] 11월28일 [374]호 12월2일 [376호]
12월4일 [377호] 12월18일[384호]
위의 조선신보 가운데는 마키노 [牧野富太郞]라는 식물학자가 식물표본을 채집하는 과정에 흡습지[吸濕紙]로 사용했던 지면이 포함되어 있는데 마키노 신문에 관해서는 필자가 [관훈저널] <98호, 2006년봄, pp177-190>과 월간조선 <2006.5 pp540-550> 에 발표한 글이 있으므로 참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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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진석 [한국 외국어대 명예교수: 언론사 전공]
최종학력
1976 서울대학교 대학원 신문학과 석사
1987 런던대 정경대학 [School df Economics & Political Science] qkrtk.
경력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중견언론단체 관훈클럽 사무국장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방송위원회 방송위원
한국외국어대 사회과학대학장
한국외국어대 정책과학대학원장
일본 천리대 조선학과 교환교수 역임.
저서
대한매일신보와 배 설 (나남)
한국언론사 (나남)
기자 최 병우 평전 (관훈클럽)
인물한국 언론사 (나남)
한국근대언론의 재조명 (민음사 : 정 진석-이 정식- 이 만열 - 김 봉진 - V,찬드라 5인공저)
언론유사 (커뮤니케이션북스)
역사와 언론인 ( 커뮤니케이션북스)
언론과 한국현대사 (커뮤니케이션북스)
신문학 이론 (박영사 : 4인공저)
한국영어신문사 (커뮤니케이션북스 : 3인공저)
영인 및 해제 작성
대한매일신보 국한문관 1904-1910 [전6권], 한국신문연구소.
대한매일신보 한글판 1907-1910 [전4권],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한성순보-한성주보 1883-1888 [전3권],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매일신문 1898-1910, 한국신문연구소.
한국언론전문지총서 [철필,호외,저널리즘,신문평론,회지](전3권)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독립신문 1896-1899 [전6권] LG상남언론재단
문자보급운동교재 1929-1936 LG상남언론재단.
해방공간 [1945-1959년] 4대신문[경향신문,동아일보,서울신문,조선일보] 영인본 17권
6.25전쟁 기간 [1950-1953년] 4대신문 [경향신문,동아일보,서울신문,조선일보] 영인본 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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