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문화지도(1997년)
인천의문화/인천문화,전시,공연
2009-06-26 15:21:45
(이 글은 1997년 가을(16)호 계간 『황해문화』에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인천의 문화지도
- 바람구두
1. 인천을 보라, 대한민국이 보인다.
인천 사람들은 인천을 단순히 인천이라고만 부르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강화군민들이 마니산을 마리산으로 부르는 것처럼 인천 사람들은 인천을 백제의 옛 도읍지 '미추홀(彌鄒笏)'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인천 사람들의 자긍심이기도 하다. 인천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결부되어 그 흥망성쇠를 함께 해온 땅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溫祚)왕조에 "주몽의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가 하남(河南)의 땅을 택하고, 비류는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고 하였다. 역시 『삼국사기』에 따르면 미추홀은 바닷가여서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사람이 잘 살 수가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문헌상에 나타난 것이 이 무렵이지, 선사 유적 등의 유물들을 살펴보면 인천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태고적부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은 역사가 깊은만큼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곳이다. 부평구 십정동과 간석동 사이에 있는 원통이 고개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은 인천의 태생이 어떤것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조선 태조가 무학(無學) 대사를 시켜 새 도읍지를 물색하게 하였는데, 무학대사가 부평땅에 이르자 들이 넓고 기름진데다 멀리 한강까지 끼고 있으므로, 조선의 도읍지가 될만하다 여기고, 근방의 골짜기 하나하나까지 세어 보았다. 예로부터 나라의 도읍지가 되려면 골짜기가 100개가 되어야 한다고 전해져 오는데, 아무리 세어보아도 99개밖에 안 되었으므로 "아, 원통하도다. 산봉우리 하나가 모자라는 구나!"라고하여 그곳이 원통이 고개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인천은 한 나라의 도읍지가 되려다 안타깝게 놓친 셈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인천이 그만큼 사람 살기 좋은 땅이라는 해석이 된다.
현재 인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쉽게 동의하고 있을까? 어째서 조선의 도읍지 물망에도 올랐던 인천이 오늘날, 문화가 척박한 곳이고, 공해에 찌든 그저그런 도시로 전락하게 된 것인가? '인천을 보라! 대한민국이 보인다'라는 말은 우리 나라가 안고 있는 고질들을 인천이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다.
우선 인천의 지리적 여건을 살펴보자. 경기도 중서부에 위치한 인천광역시는 동경 126°13-126°47, 북위 37°21-37°36에 위치해있으며, 인구 250만에 육박하는 메트로폴리스(metropolice)이다. 인천의 지세는 부평을 중심으로 호상(弧狀)으로 발달한 잔구형 산맥이 해안까지 발달해 있으며, 시가지를 중심으로 서북에서 남동방향으로 뻗어 있는 해발 300m 남짓의 잔구형 언덕들이 발달해 있다.
이 산 기슭을 따라 계양산(桂陽山, 395m).철마산(鐵馬山, 227m).장고개(長峴).거마산(距馬山, 209m) 등이 도시를 감싸고 있고, 자유공원에서 도심으로 이어지는 수봉산(壽鳳山, 104m)과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文鶴山, 213m)과 청량산(淸凉山) 등의 잔구들 사이로 교통로와 경지가 발달되어 있다. 산지는 높지 않으나 해변까지 접근하여 있으므로 평지가 발달하지 못하였고, 큰 산이 적고 지역이 협소하므로 큰 하천의 발달이 없으며,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간만의 차가 심하여 간석지가 발달되었고, 염전들이 있어왔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12시간 25분 주기로 하루 두 번씩 조수가 반복하여 보통의 경우 조석간만의 차는 8,2m에 달한다. '인천에는 바다가 없다'는 말은 전형적인 항구도시를 연상해온 외지인들에게 자주 회자되는 말이기도 한데, 위와 같은 여건들이 인천을 전형적인 대규모 항구 도시로 성장하는 데 방해요인들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인천은 공업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공업용수 공급을 위한 대형하천이 없고, 수많은 구릉과 잔구들이 너른 평지들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기에 대형공단을 유치하기엔 부적합하다. 그러나 외견상 이런 말들은 모두 틀렸다. 인천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선박들이 닻을 내리고,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고 있으며 인천 서구에 위치한 인천제3공단과 남동공단 등이 있다.
국립지리원에서 감수한 어떤 지도에 보면 인천에 수봉공원이 두 군데로 나오는 것도 있다. 그것이 바로 인천의 비극이다. 인천은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질식하고 있다.
인천 발달사를 살펴보면, 고려 인종 때, 인천은 인주(仁州)로 승격하였고, 공양왕 2년(1390)에는 경원부로 승격하였던 것이 조선시대 태조 1년(1392)에 인주로 강등당하고, 태종13년(1413)에는 인천군으로 재강등당하게 된다. 그후 세조에 이르러 인천도호부로 승격되었고,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여, 1698년 숙종조에 이르러 도호부로 복구된다. 그후 고종 19년(1882), 화도진에서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고, 고종 20년(1883)에 치욕적인 인천 개항이 이루어진다. 혹자는 이 시기를 인천의 개항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후 인천의 역사는 과거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상륙부대 병력만 7만여명)이 감행되고, 이 시기에 인천의 주요 건축물들과 문화재들은 전쟁의 참화로 인해 소실당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작전을 주도했던 미군측의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몰이해 등으로 인해 더욱 가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던 중의 미국은 이탈리아에 상륙할 때, 해안 도시에 대한 포격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유는 미군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이탈리아의 문화유산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인천에 주둔하던 당시 북한군 전력(해병 제266독립연대 3대대, 제918포병연대 소속병력 등 400여명)을 참고할 때, 그 정도의 포격이 과연 필요불가결한 일이었던가를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인천은 전쟁의 참화를 채 추스르기도 전에, 산업화의 거점 도시 및 서울의 관문으로서의 역할만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인천은 외지인들의 대량유입이 이루어져 인천의 고유함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인천에는 아직 인천의 문화를 잊지 않고 지켜나가려는 사람들과 노력이 있다. 그런 노력과 문제들을 살펴보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이르기를 "세상은 보고자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2. 인천의 문화유적
제물포역에는 제물포 고등학교가 없다
인천 출신의 어느 시인이 말하기를 동인천역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천의 수많은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그곳이 이제는 몰개성의 지역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전철 역사와 광장은 사라지고 그곳에 백화점만이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천 사람들 혹은 인천을 내왕하는 승객들은 빈한하게도 백화점 건물 지하의 카타콤메를 이용해야만 한다. 그곳이 동인천이면 서인천은 어디이며, 남인천은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인천 사람들은 인천역을 인천역이라 부르지 않고, 하인천역이라 부른다. 그것은 인천 사람들 나름의 저항이다.
경인선의 역사(驛舍)들은 잘못된 지명이 붙어 있는 곳이 동인천 역말고도 많은 데, 그 중 하나가 제물포역이다. 제물포에 내리면 제물포 고등학교를 찾을 수가 없다. 무릇 지명이란 자연발생적이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그 지역의 역사를 반영하기 마련인데, 인천의 지명들은 각 구명(區名)만 하더라도 남구, 동구, 남동구, 서구, 중구 등등 인천의 특성이 드러나있는 이름이 아니라 허수룩하게 주어다 붙인 행정편의주의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인천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인천의 역사를 반영한 지명들도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통이 고개: 부평구의 경인국도상에 있는 고개. 앞에서도 언급되었던 지명으로 원래 이곳에는 원통사(圓通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는데, "원통하다"는 말에서 변형된 전설이 여러 가지 있다.
첫째는 수로를 못내어 원통하다는 이이야기이다.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자점(金自點)이 황해와 김포쪽의 한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파다가 이 고개에 이르러 "이 고개만 아니면 수로를 낼텐데 원통하구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실제 수로를 파다가 실패했던 이는 김안로(金安老)였지만 전설에는 김자점이 등장한다.
둘째는 조선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부평땅에 이르러 골짜기를 세어보니 꼭 100개였는데, 나중에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다시 와서 보니 이상하게도 봉우리 하나가 얕은 언덕으로 바뀌어었다는 것이다. "아, 원통한지고, 이 봉우리가 언덕으로 바뀌다니." 이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 했던 무학대사의 100개 골짜기 이야기와 맞물리는 이야기로, 실제 태조 이성계가 무학 대사와 이곳을 도읍지 물망에 올렸던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태조 1년에 경원부에서 인주로 강등당한 것에 대한 인천 사람들의 반발심리 때문에 원통이 고개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모지 고개: 남구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문학산의 고개.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들이 부평의 별리현(別離峴)을 넘고 또 이 고개를 넘어서 서해안의 능허대(凌虛臺)에서 배를 타고 떠났는데, 사신을 배웅하는 가족, 친지들이 별리현에서 이별을 나누고 거기서도 헤어지지 못한 사람들이 이 고개까지 따라와서 멀어져가는 사신들을 크게 세 번 외쳐 불렀다하여 삼호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고개만 넘어서면 울창한 숲이라 멀어져 가는 사신들의 자취가 영영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못내 그리워 사모한 고개(思慕之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장명이 고개: 서구 공촌동에서 계양구 계산동으로 넘어가는 계양산 서쪽의 고개로 일명 장맹이 고개라고도 한다. 길이가 8km나 되는 인천 지역에서 가장 길고 높은 고개이기 때문에 예로부터수많은 도적들의 은거지가 되었고, 한때 임꺽정(林巨正)이 이곳 계양산을 소굴로 삼았다고도 한다. 이 고개의 도적들은 사납기로 소문이 나서 이 고개를 천명고개라고도 했다는데, 그것은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천 명의 사람이 모여야 가능했기 때문이란다. 연해의 관문이었던 이곳에 들끓었을 도적들의 위세와 이곳을 거쳐가던 상단(商團)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게 하는 전설이다.
철마산: 계양구 효성동과 서구 가정동의 경계에 있는 산. 계양산.만월산과 함께 남북 방향의 맥을 이루어 해안선에 이른다. 이 산의 본래 이름은 천마산인데 그 이유는 이 산의 서쪽 기슭에서 용마가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이 산 일대의 바위에는 말발굽처럼 팬 자국들이 남아 있으며, 이 산을 발발굽 봉우리라는 뜻으로 마제봉(馬蹄峰)이라고도 부른다. 전설에 의하면 산아래 가정동의 합천 이씨 집안에 장사 아기가 하나 태어났는데, 칠일만에 걸어다니고 어깨에는 날개가 돋아 천장을 마음대로 날아다녔다고 한다. 후환을 두려워한 문중에서 이 아기를 큰 디딤돌로 눌러 죽게 하였는데, 이 아기가 숨을 거두자 용마 한 필이 나타나 구슬프게 울다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전설이 있다.
굴포천: 계양구 산곡동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으로 길이 9,3km에 달한다. 이 하천이 굴포천으로 불리우게 된 것은 김포굴포(金浦掘浦)가 시도되었기 때문인데, 김포굴포란 인천쪽 서해안과 김포쪽 한강을 연결하려던 운하계획을 말한다. 이 계획은 고려의 최우(崔瑀) 때부터 시도되던 것으로 조선 중종조에 이르러 김안로에 의해 착공되었다가 원통이 고개에 막혀서 중단된 것이다. 원통이 고개 굴착에 실패한 것이 당시의 기술부족 때문인지 풍수지리 사상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이래 김포굴포에 집착하게 된 것은 삼남지방에서 해로로 운송되던 세곡선들이 강화의 손돌목(孫乭項)에서 자주 전복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유산은 외국에, 인천의 문화유산은 서울에
인천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공립 박물관이 설립된 곳이다. 그러나 현재 인천 박물관에는 국보급이나 보물급 유물이 단 한 점도 전시되어 있지 않다. 박물관 설립 50년의 역사가 부끄러운 실정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5,000년에 달한다지만 많은 유물들이 외국의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인천 시립박물관은 전국 지방 박물관중 최하위권에 속할만큼 규모가 작고, 인력, 예산 등 모든 것이 부족하여 현재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의 전시는 물론 기획 행사나 제대로 된 시민역사교실같은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박물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인천의 많은 유적들이 인천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거나, 시의 행정적 뒷받침이 없어 유적들의 복원은커녕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알 수 없다. 인천은 자타가 공인하는 항구도시이다. 한반도에서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항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천에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있어도 해양박물관은 없다.
인천은 개화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 곳이며, 세계 각국의 조계지가 있던 곳이기 때문에 '최초'라고 할만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충돌이 많은 곳에 문화는 자연히 발생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 철로가 가장 빨리 놓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인천역에는 작은 철도 박물관이나 소규모 기념관 하나 없이 작은 비석 하나만이 구석에 놓여 있다.
인천의 고대문화 유적들은 인천 중구 송학동 자유공원 내의 학익지석묘(鶴翼支石墓, 인천시 문화재 자료 제4호)와 남구 숭의동의 주안지석묘(朱安支石墓)가 있는데, 이것들은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다.
옛 성터로는 남구 문학동의 문학산성(인천시기념물 제1호)과 계양구 계산동의 계양산성 등이 있으며, 문학산에는 성산봉수대지(일명 문학산봉수대지)와 서구 가정동의 축곶 봉수대지(일명 봉오재봉수대지)가 있다.
또한 불교 문화재로는 시립박물관 소장의 원대철제범종(元代鐵製梵鐘,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호)과 송대철제범종(宋代鐵製梵鐘,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호). 관음좌불상(觀音坐佛像,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호) 등이 있고, 남구의 동춘동 부도, 계양구 계산동의 봉일사지삼층석탑(奉日寺址三層石塔) 등이 있다.
유교 관련 문화재로는 남구 관교동의 인천 향교(인천시 문화재 자료 제1호)와 계양구 계산동의 부평향교(인천시 문화재 자료 제2호)가 있다.
고건축물로는 중구 답동의 인천 답동성당(사적 제287호), 남구 관교동의 인천도호부청사(仁川都護府廳舍,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호)가 있다. 그러나 인천 도호부 청사는 1677년 중수되었다가 1950년 현 문학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동헌과 함께 지금의 위치로 이전 개축하였기 때문에 당초 건물들의 배치 형태를 알수가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계양구 계산동의 부평도호부 청사(富平都護府廳舍,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호) 역시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동헌, 객사, 근민당, 내아 등 수많은 건물들을 헐어버리고, 현존 건물만을 교정 모퉁이로 이전하였다. 중구 중앙동에 있는 후기 르네상스양식의 일본제일은행지점(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호), 중구 항동의 인천 우체국(인천시 유형문화재 제8호), 중구 송학동의 제물포구락부회관 등이 있다.
분묘로는 서구 석남동의 조서강묘와 경서동 금산의 류사눌묘, 심곡동의 숙의문씨묘, 연수구 연수동의 이허겸묘와 동춘동의 이세주묘, 정우량묘, 남동구 도림동의 조정만묘 등이 있다.
남동구 논현동의 논현포대(인천시 유형문화재 제6호)는 고종 16년(1879)에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가 인천으로 진입하는 이양선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화도진의 관할하에 있었다. 서구 연희동의 연희진지.연희포대지, 동구 만석동의 묘도포대지, 중구 북성동의 북성동포대지와 항동의 제물포포대지 및 영종도의 영종진지, 동구 화수동의 화도진지(인천시 문화재 자료 제5호) 등이 있다. 서구 경서동의 녹청자 도요지(사적 제211호) 등이 있다.
3. 인천의 문화지도문화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千年 開港地
인천지역의 열악한 문화 환경을 사람들은 서울 탓이라고 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정말 맞는 말이다. 모든 게 서울 탓이다. 서울과 대한민국을 살리려고 인천을 죽여버린 것이다. 혹은 서울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인천의 문화가 빨려들어가버린 것이다. 과연 인천 사람들의 책임은 없을까? 그렇다면 서울 근교에 있다는 이유만이 인천의 문화가 척박했던 이유의 전부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와서 인천의 과거사를 논하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며, 되돌이켜 생각한다고 해서 잘못된 과거가 바로 잡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의는 기억을 바탕으로 세워진다'는 너무나 당연한 말 한 마디에 기대어 이야기를 해본다면, 인천은 분단과 냉전 이데올로기의 사상 최대 피해지역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정치.경제적으로 인천이 받아야 했던 피해는 막대하여 6.25 동란을 거치며 독재자 이승만의 최대 정적. 조봉암(이승엽) 선생이 인천 출신이고, 그로인해 발생한 이념적 '분서갱유'라고 할 수 있는 '진보당 사건'의 최대 피해자들 역시 대개가 인천 지식인들이었다. 그 이후 인천은 과거 역대 정권에 의해 의도적으로 멸시당해 다른 광역시에는 어디에나 있는 국립대학조차 없는 문화의 불모지대로 소외되어 나날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정치적.역사적 이유 이외에도 인천이 문화사각지대에 놓이게 된 것은 인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성이 약한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농촌 지역의 노른자위 땅은 대개 도시의 투기꾼들 소유인 것처럼 인천 지역의 많은 지도급 인사들조차 인천에 거주하지 않는다. 철새처럼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람들에게 인천은 헤게모니를 내어준 것이다. 그래서 천년 개항지로 이름 높은 인천에는 현재 각종 개발공약과 간석지 매립 등의 깃발만 나부끼고 있다.
현재 인천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인천을 거쳐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목민들에게는 문화가 없다. 그들은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녀야 하기 때문에 문화를 성숙시킬 여력이 없다. 그런 이들에게 인천에 대해 애정을 가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인천이 절망스럽다
인천이 서울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화랑이나 미술관이 별로 필요없다고 말할 이들이 혹 있을 지도 모르겠다. 덕수궁 돌담길이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도 있는데 인천에까지 그런 시설이 필요할까라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는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인천시 당국에서 그럴 계획이 없다는 데, 얼마전 인천 시민들을 황망하게 만든 시에 기증된 그림들의 행방은 물어 더 무엇하리.
인천에는 미술관이 필요하다. 적당한 녹지공간에 조성된 야외 조각공원과 현대 미술과 국내외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을 인천시민들도 편하게 보고 향유할 권리가 있다. 물론 모든 것을 시 당국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예진흥기금이나 걷고, 일과성 대규모 행사 몇 번에 문화가 발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문화선진국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문제는 몇 차례의 세계명작감상에 있지 않다. 인천의 주요인사들이 오색 테이프나 자르고 돌아간 뒤의 행사장을 구경해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천 출신의 화가들은 외롭다. 그들의 작품을 감상해줄 사람도, 그럴만한 공간도, 그들의 작품을 정당한 가격에 구입해줄 시장도 인천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천에는 공신력있는 미술 시장이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다. 몇몇 화랑에서 의미있는 작업들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의 무관심 속에서 인천의 미술대중화운동은 허덕이고 있다.
의식의 발상이 필요할 때이다. 인천을 지키며 고군분투하는 예술가들을 위해 비어있는 창고들을 개조하여 저렴한 가격에 아뜰리에나 소구모 공연장, 전시실 혹은 예술촌으로 임대해주는 것도 한 방편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인천시에 필요한 것은 대규모의 전시행사, 화려한 오색 테이프가 아니라 인천 시민이 손쉽게 찾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작지만 알차고 아담한 화랑과 미술관이 필요하다. 시의 재정을 생색내기 일과성 행사에 쏟아붓기 보다는 작지만 지속적인 지원에 돌려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참고로 남구 학익동 동양화학 유수지변에 자리잡은 송암미술관은 1만2천여평의 대지에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의 미술관이며, 인천에서 미술관이라고 불릴만한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국보급 문화재등 각종 문화재 1만2천여점이 소장되어있고, 특히 4천여점에 달하는 고서화와 2천여점에 달하는 도자기류, 그리고 만주 통구의 것과 동일한 규모로 재현된 광개토대왕비 등은 송암미술관의 자랑거리이다. (단, 송암미술관은 금.토.일에만 개관한다.)
불편하면 서울로 가라
인천에는 꽤 많은 극장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애관은 우리나라 신극사에도 기록될만치 그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곳이다. 1895년 현'애관극장'의 전신(前身)인 신식 공연장 '협률사(協律舍)'는 우리의 힘으로 세운 최초의 신식 공연장이었다. 그러나 현재 인천의 영화관은 답보상태이며 돗데기 시장도 그런 난장(亂場)이 없다. 문화란 삶의 여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데, 인천의 극장가를 순례하다보면 얌전하게 줄서있던 사람들도 영화관의 문이 열리자마자 우르르 쏟아져 들어가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좌석에 가방을 집어던지고, 몸싸움을 벌이고 그나마 간신히 자리에 앉으면 앞 사람의 머리통에 가려 한 사람이 움직이면 나머지도 덩달아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꼴은 영화만큼 볼만한 광경이다. 인천의 영화관들은 좌석제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난리가 주말마다 반복되는 것이다.
거기에 시설의 낙후성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영화관들의 영세성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스크린이 너무 작아 화면의 상당부분은 천장에 비춰지고, 디지털 돌비 스테레오 시스템까지 바랄 수는 없겠지만 영화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음향 설비조차 무시되어 가령 액션 영화의 폭발음이나 음악이 중요한 영화의 경우에도 배경음악이나 효과음이 뭉개져 귓청을 찢는다. 좌석 역시 초등학교 저학년생에게 맞춘 것처럼 작아서 의자에 앉았다기 보다는 걸쳤다는 표현이 적합할 지경이다. 관객들은 팔꿈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시종일관 몸을 구겨야 하기 때문에 영화를 다 보고나서는 허리가 뻗뻗하게 굳어있음을 느끼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엔드 크레딧과 함께 영화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이 나온다. 제작에 참여했던 여러 스탭들과 제작에 협조한 사람들의 이름과 회사명이 올라가는 것이다. 영화에 애착을 갖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에 대한 예의라면 이 여운을 느낄 수 있도록 영화관측에서 배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본영화가 끝나자마자 조명이 환하게 들어온다. 빨리 자리를 비워달라는 것이다. 관객들은 영화를 음미하기도 전에 밖으로 쫓겨난다. 이것이 인천 영화관들의 실태이다.
참고로 인천의 개봉관과 서울의 개봉관 사이의 입장료 차이는 1,000원이다. 서울에 영화관이 밀집해 있는 종로까지의 지하철 왕복요금은 대략 1,300원 내외이고 거기에 입장료 차액 1,000원을 보태면 인천 시민들은 제대로 시설이 갖춰진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타지역 시민에 비해 2,000원 이상의 추가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천에서 빠져나가는 돈인 셈이다. 지방 자치 성공의 첫 번째 계명은 외부로 빠져나가는 돈을 잡고, 외부의 돈을 안으로 끌어들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있을 것이다.
국민 일인당 보유 장서수 0.3권
다윈에게 그리고 마르크스에게 대영 도서관이 없었다면 『종의 기원』과『자본론』이라는 그토록 엄청난 저서가 나올 수 있었을까?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우리나라 국민이 일인당 보유하고 있는 공공장서수는 0.3권에 불과하며, 국가가 국민들의 독서를 위해 지불하고 있는 비용은 일인당 1백원 정도이다. 그런 결과이니 한 도서관을 책임져야 하는 도서관장이 공무원의 인사적체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해서 열받을 필요는 애시당초 없을 것이다.
인천에는 시립도서관 말고 꼭 6개의 도서관이 있다. 인천광역시가 8구 2군이니까, 한 구에 도서관 하나씩의 비율도 되지 않는 셈이다. 도서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장서 보유수로 따져본다면 장서수 십만권 이상의 도서관은 중앙도서관 한 곳뿐이고, 나머지 부평.화도진.주안 도서관의 장서수는 7만권 정도, 서구와 북구 도서관의 경우에는 4만권 내외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인천광역시에 있는 모든 공공도서관의 장서수를 다 합쳐도 사십오만권이 채 안 된다.(95. 12. 31일 현재)
95년 한 해 동안 도서관을 이용한 인천 시민수는 이백삼십만명 정도이고, 그중 자료 열람을 한 사람은 백칠십만 정도이니 인천 시민 거의 대부분이 한 번쯤은 도서관을 이용했다는 이야기이다. 인천 시민들의 도서관 이용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관외대출도 활성화되어 있는 편이다. 참고로 관외대출은 인천시내 거주자로 관외대출증 소지자에 한하며, (관외대출증 제작은 주민등록등본 1통과 사진 2매, 본인 도장 지참) 누구든지 5권이내 15일간 가능하다.
인천의 도서관과 문화원들은 자체 사업으로 어린이 백일장(화도진 도서관)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교실(미술반, 생활도예반, 외국어회화반 등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각 도서관 나름의 특성화 계획을 수립.운영하고 있다. 중앙도서관은 구 공산권 자료와 북한 자료를 특수자료실, 행정관련 자료를 행정자료실에서 운영하고 있고, 부평도서관은 산업재산권 자료실을, 서구와 부평도서관은 취업정보자료실, 화도진 도서관은 향토자료 코너와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도서와 녹음도서를 자체 제작하여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있다. 주안도서관은 학위 취득을 위한 독학자료실을 운영하고, 노인층을 위한 노인관람실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그외에도 도서관들은 유아교실과 어린이 예절교실, 외국어 단체학습, 상담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도서관이 안고 있는 문제는 인천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그 이유는 지방자치가 완전하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으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전국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현재 재정과 행정이 모두 이원화 되어 있다.
가령 재정 문제는 교육부의 교육 재정과 시예산(시의회)에서 배정되기 때문에 장서구입비 등의 인상이 어려운 편이고, 또 장서를 구입한다고 해서 그것이 일반 서적을 구입할 것인지, 전문 서적을 구입할 것인지 하는 도서관의 전문화 내지는 특성화가 힘들다.
행정은 교육부와 문화부로 분리되어 있다. 같은 인천지역의 도서관이라 할지라도 대학 도서관이나 기타 도서관과의 협력망 구축이 미비한 상태여서 체계적인 장서관리 및 사업 수립이 어려운 편이다. 전문직인 사서와 행정 보조 인력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사서비율이 낮은 편이고, 3년마다 의무적으로 인사이동이 행해져서 한 도서관에 뿌리내린 전문 사서를 만나기 어렵다.
인천의 문화는 인천 사람의 힘으로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인천은 역사적.지정학적 요인 등으로 인해 문화가 밑바닥부터 조직적으로 파괴된 지역이다. 1883년 개항을 시작으로 각기 독립적인 행정단위였던 인천과 부평은 급격한 변모를 겪게 된다.
그중 하나는 토종 인천이 일제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서울역이 서울의 본바닥 상권인 종로를 외면하고 일본의 이주민을 위해 현재의 위치에 건립된 것처럼, 제물포에 개항장을 두고 여기에 감리서(監理署)를 설치하여 감리가 부사(副使)를 겸하게 함으로써 문학산을 중심으로 했던 토종 인천과 계양산을 중심으로 했던 부평은 쇠락하게 되었다. 그후 1899년 경인선의 개통으로 토종 인천의 맥이 완전히 단절되고, 제물포 일대의 신흥인천이 번성하면서 인천의 토착 세력은 완전히 와해된다.
이것은 일본이 지방토착세력을 분쇄하여 식민지배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던 고등술책이었다. 그후 인천은 6.25를 거쳐 개항 이후, 한반도의 상해였던 근대 도시사(都市史)와도 완전히 단절되어 서울에 종속된 졸속도시로 급조된다. 그후 인천이 광역시로 승격되었지만 이때 끊긴 명맥들은 부활하지 못하고, 아직도 인천 사람들은 인천은 인천이고, 부평은 부평이고, 강화는 강화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인천 시민들의 저변으로부터 인천을 지켜내려는 노력이 80년대를 기점으로 일기 시작했다.
인천 시민의 노력으로 인천에는 문화재단이 설립되고, 각종 문화단체들이 기지개를 켜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관(官)주도 일변의 타시도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성과이다. 열악한 재정 문제와 장소 미비, 혹은 기획력 부족 등이 문제가 되고 있으나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각종 시민교양강좌를 비롯하여 행사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횟수가 거듭될수록 시민들의 참여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4. 삶의 공동체, 인천 복원을 꿈구며
인천 팔경과 신인천 팔경
옛 인천의 경치를 노래한 <인천팔경>이라는 노래의 내용을 살펴보면, "에이 아니노지 못하리라/ 게양산하 부평들에/ 황금고도 주안으로/ 약사암에 돌아들어/수봉무덕 한량만나/ 문학산 약수터로 청양 송도 능허대에/ ....얼시구 절시구 지화자 좋은데/ 인천 팔경이 여기 있소"이다. 그 중 제대로 건사하여 우리 후손에게도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생가해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이제 신인천의 팔경은 혹여 이런 것은 아닌지 읊조려 본다. 풍료로운 개펄을 메운 매립지, 살인적인 속도로 달리는 대형 트럭, 인천 항만에 쌓인 고철과 곡물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 비오는 날 인천대 옥상에서 바라본 공단의 굴뚝 연기, 언덕 꼭대기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음울한 SF소설에 나옴직한 회색빛 영세가옥, 외지인들을 위해 마련된 대규모 러브호텔촌과 사창가, 인천의 자랑일 수 없는 각종 기념물들(치욕스런 개항 100주년 기념탑과 인천의 하늘을 위협하듯 날카롭게 치솟아오른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미국에 대한 우리의 짝사랑을 증명하는 자유의 여신상, 맥아더 장군상 등), 그리고 월미도에서 바라본 -공해에 찌들어 더욱더 붉게 물든- 황해의 낙조일 것이다.
과연 이것이 인천의 전부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답은 아니다. 인천의 참모습은 이것이 전부일 수 없다. 인천에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인천의 아름다움에 눈이 절어 있기 때문에 인천의 참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천을 그저 스쳐가는 야영지로 생각하는 유목민들도 인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없을 것이다. 인천의 아름다움은 살아숨쉬는 골목과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는 개항 직후의 근대 건축물과 생활양식들에서 찾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모든 생명체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바다와 개펄에서 찾을 수 있다.
백령도 두무진의 기암괴석과 전세계에 단 두곳밖에 없다는(이탈리아 나폴리) 천연비행장, 콩돌 해안 그리고 대청도의 모래사막이 있고, 인천의 경주(慶州)라고 불리울만한 강화도의 많은 유적들이 있다. 이제는 매립으로 많이 사라져버렸지만 강화도 남동해안은 세스랑게와 칠게, 농게들의 천국이며, 강화도 남안에서 펼쳐지는 도요새 무리(중부리도요, 쇠청다리도요사촌, 개꿩, 민물도요, 알락꼬리마도요, 노랑발도요 등)의 장관들 역시 인천이 지켜나가야 할 것들이다.
옹진 신도에는 전세계적으로 2천마리 정도밖에 없는 희귀조인 노랑부리 백로(천연기념물 제361호)가 1,000여 마리 정도 둥지를 트고 있다. 그러나 영종도 개펄 매립으로 이들의 먹이터가 사라지고 있으며, 이들이 과연 비행기 소음을 견뎌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동백나무 최북단의 순수자생지인 옹진군 백아도와 덕적군도는 섬을 동서편으로 휩싸고 올라오는 난류의 영향으로 북방계와 남방계 수종이 만나는 특이한 식물 생태계를 이루어 학술적으로도 귀중한 곳이다. 한 번 사라지고 말면 그뿐인 우리의 소중한 자연 또한 복원되어야 할 인천의 문화유산들과 함께 앞으로 인천이 지켜나가야 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도시로서의 인천을 꿈꾸며
어떤 평론가는 '詩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개인의 창조물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라고 말한다. 그 말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한 도시를 이해한다는 것 역시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문화적 스펙트럼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문화 발전의 역사 역시 사회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으며, 사회가 병들면 그 사회의 문화는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역으로 인천의 문화를 살펴보면 인천이란 도시가 보일지 모른다는 관점에서 이 글을 시작해보았다.
인천은 현재 포화 상태이다. 인천 시민은 누구도 자신이 현재 서 있는 곳으로부터 10분 이내에 녹지 공간에 도달할 수가 없다. 산업화의 거점 도시 및 서울의 관문으로서의 역할만을 강요당한 결과이다. 인천에는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곳곳의 잔구형 언덕들까지 집과 공장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찼고, 대형 하천과 평야가 없지만 이 나라의 산업화를 위해 희생당한 결과로 인천 시민들은 누구도 마음놓고 수돗물을 마시지 못하고 있으며, 환경 정화의 역할을 하던 아름답고 풍요로운 개펄들은 공장 부지로, 주택 부지로 나날이 메워지고 있다.인천이란 도시의 패러다임, 혹 이 나라의 패러다임은 '인간적인 속도'를 가지고 발전해나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의 역할은 국가 이미지를 고양시키고, 안정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주고, 교육은 탄력을 얻게 되고, 산업은 상상력을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경제논리에 밀려 문화는 언제나 뒷전이었고, 그 결과 상상력 없는 산업은 신기술 개발에서 도태되고, 탄력을 잃은 교육은 도구적 이성들을 양산하고 있으며, 사회는 여유를 잃게 되었다. 한국의 국가적 이미지는 그간 얼마나 실추되었는가? 우리가 과연 서양인들에게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으로 비추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일이다.
인천 역시 이와 다를 바없다. 아니,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인천은 더 심각한 처지에 몰려 있다. 문화 역시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시장의 논리에 따른다. 인구 250만이라면 충분한 수요일 수 있지만 시장의 입장에서는 그리 먹음직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천의 수요자들은 잠정적으로 서울의 좀 더 세련되고 풍요로운 상품들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천의 수요자들이 끊임없이 서울지역 시장의 유혹에 빠질 즈음, 인천지역의 문화상품 생산자들은 더욱더 배타적인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얼마전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는 대형서점의 인천 진출 저지, 인천지역 영화관들의 좌석제 미도입, 시설투자 미비 등과 같은 예들은 인천지역의 문화계 운영자들이 시장의 논리에 따라 수지타산이 맞지않는다면 언제라도 인천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비와 수요의 악순환이지만 시장의 논리로만 보자면 이들을 탓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인천을 서울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면 역으로 서울 시장을 공략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갈 곳 없어 하는 서울 사람들을 인천으로 역류시킬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U-TURN 인천이 가능한 길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어쩔 수 없는 결론을 말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뻔한 결론이지만 문제는 실천이다. 인천은 더 이상의 발전을 포기해야 한다. 양적인 발전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질적인 발전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천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인천 시민이 다 죽고나서, 컨벤션 센터, 국제공항, 미디어 밸리만 있는 메갈로폴리스가 되어서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삶의 공동체로서의 인천을 복원시키려면 하나의 문화권역으로 묶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필요할 것이며, 인천시, 인천 시민, 그리고 인천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인천을, 인천의 문화를 지키고 살려내야 한다. 비오는 날, 주변의 높은 곳에서 인천을 돌아보라. 그래도 이 땅이 불쌍하지 않다면, 그대는 진정으로 인천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가 병들면 문화는 다만 상처를 받겠지만 문화가 죽으면 그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인천의 문화는 인천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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