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학 강좌> 세번째 이야기 제물포 공문서를 통해 본 인천세관, 세관 ?
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2009-07-03 16:51:11
1885년 화재로 해관원 대거 징계
화도진도서관과 함께하는 인천학 강좌> 세번째 이야기 < 제물포 공문서를 통해 본 인천세관, 세관 ?
지난 1970년 영문으로 된 문서 하나가 관세청에 기증됐다. 20년 동안 인천세관 박물관에 일반 전시돼오던 그 문서는 지난 2007년 비로소 세상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문서번역과 영인화가 추진되면서 오늘날 세관이라 불리던 인천해관 그리고 해관원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개항지였던 인천 제물포 해관원들의 업무 등 활동을 담은 이 문서는 세관의 시작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Despatches from chemulpo’는 제목에서처럼 1883년 2월부터 1885년 9월까지 조선해관 초창기에 발생한 사건들을 기록한 유일한 영문서다. 한글도 한자도 아닌 왜 영문일까.
당시 세관시스템이 생소했던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경험자 파견을 요청했고 외국인들에게 세관운영을 맡겼던 청국이 책임자로 독일인을 추천하면서 외국인들이 조선해관 근무를 시작하게 됐기 때문이다. 드디어 1883년 6월16일 인천해관은 조선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열게 된다.
김성수 관세평가분류원 팀장은 “현재 세관 역사의 시작은 1878년 설립된 판찰소에서 찾고 있지만 이는 세관이기보다 일본인에게 외국물품을 사고파는 조선인에게 세금을 물리는 곳에 불과했다”며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세관의 시작은 인천해관이 시작된 1883년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인천해관 업무는 중국 상하이, 톈진 등에서 모여든 8명의 외국인들이 수행했다. 현재의 세관장급인 인천해관세무사는 상하이에서 경찰로 재직한 경험이 있는 영국인 알프레드 버트 스트리플링이 맡았다.
이외에도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중국 등 외국인들이 해관원을 희망하며 조선을 찾았다. 이후 미국, 오스트리아 등에서 찾아온 많은 외국인들이 함께 해관업무를 수행하며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만들어 나갔다.
이들 중 화물분석관인 이탈리아인 보리오니는 조선에 자전거를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로 한 자료에 소개되고 있다.
문헌에는 당시 해관원들의 업무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천해관이 군산, 법성포, 목포 등 불개항지를 조사한 내용에서부터 해관원입사지원서, 해관원들의 청국상인 폭행, 무단상경 징계, 최초의 조선인 해관원 홍우관의 임명 등 다양하다. 또 해관원을 그만둔 이들의 행적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도록 기록했다. 하지만 1885년 7월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해관 본관이 모두 타버리면서 외국인 해관원들이 대거 징계를 받고 인천해관원을 떠나기도 했다. 현재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는 해관원이던 중국인 우리탕, 독일인 라다기 등이 묻혀 있다.
김 팀장은 “인천해관은 부산 등 다른 지역에 걸려 있는 태극기가 없고 해관건물 양식도 일본식이 아닌 조선기와를 이용하는 등 독특한 점이 상당히 많다”며 “인천해관에 대한 다양한 의문점들은 앞으로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강조했다.이은경기자 lotto@i-today.co.kr
▲김성수 팀장 = 1986년 국립세무대 관세학과 졸업. 대구세관, 인천공항세관, 서울본부세관 등을 거쳐 현재 대전 관세평가분류원 분류과팀장. 2007년 서울세관에서 발간한 ‘Despatches from chemulpo’ 영인본을 기획 편집. 2008년 ‘사진으로 보는 한국세관 130년사’ 발간 참여. 인천 청학동 외국인 묘지 내 세관 관련 인물들을 발굴해 관세청장이 묘지를 찾아 참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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