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4>강화도의 고려(高麗) 이야기
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2009-07-13 14:00:56
[화도진 도서관 인천학 강좌 강의자료1]
강화도의 고려(高麗) 이야기
김 경준 (덕신고 교감)
강화도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이 강화도를 표현하는 말 중에는 이런 것들도 있다.
개국의 성지, 지붕 없는 박물관, 국난극복의 현장, 보장지처, 유배 1번지,
역사의 고장 ・ 재물의 고장 ・ 詩의 고장, 한국 역사의 축소판, 근대화의 진원지,
분단의 현장, 通시대적 역사와 문화의 고장, 역사 ・ 문화 ・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 --
孝의 고장, 忠의 고장 등 여느 고장의 그것과는 달리 이런 거창한 단어들을 사용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은 강화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지세(地勢)가 아닌가 한다.
강화도는 한강,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섬이다. 삼국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 세 나라는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을 벌였고, 그 한강 입구에는 강화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려 시대, 국제무역선이나 사신들, 그리고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선들은 수도인 개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강화 앞 바다를 통하여 예성강으로 들어가야 했다. 조선시대 후반, 이 땅을 넘보든 제국 열강들은 군함을 앞세워 염하(鹽河.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의 물길)를 지나 이 나라의 심장인 한양으로 쳐들어가고자 하였고, 강화도는 몸을 던져 이를 막아냈다. (병인・신미양요). 수도를 심장이라 하면 강화도는 심장으로 들어가기 위한 목구멍의 땅 - 인후지지 강화군기(江華郡旗)(咽喉之地)이었다.
[강화군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강화도의 지세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 강화도는 북쪽의 강기슭은 모두 암벽이고, 암벽의 아래가 곧 수렁이어서 배를 댈만한 곳이 없다. 다만 승천포와 마주 보이는 한 곳만이 배를 정박할 수 있다. 그러나 만조가 아니면 배를 사용할 수가 없다. 원래 위험한 나루라 불리며 -- 동쪽은 갑곶진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오직 갑곶진만이 배를 건널 수 있다. 나머지 기슭은 모두 북쪽과 같이 수렁이어서, 강화도의 북쪽 승천포나 갑곶진 두 길을 한꺼번에 지키면 섬 바깥은 자연적으로 된 요새가 된다.”
이와 같이 강화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땅 모양이 역사속 강화도의 모습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강화도의 고려[江都] 이야기
조선시대 관리들은 강화도를 '강도'(江都) 혹은 ‘심도’(沁都)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이는 고려시대 이곳이 임시수도였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의 궁궐이 있던 곳 '고려궁지'에는 '고려'가 없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이다. 안내자료를 간단히 옮겨 본다.
강화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 : 사적 제133호
이곳은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골군의 침략에 항거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이후 새 궁궐과 관아 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규모는 개경보다 작았으나 전체적인 모습은 비슷하게 구성되어, 뒷산 이름을 강화북산에서 송악산으로 바꾸고 궁 이름도 연경궁, 강안전, 수창궁 등 개경 궁궐의 이름을 그대로 옮겨 붙였다. 정문은 승평문(昇平門),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 있었다.
원종 11년(1270)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돌아간 뒤 몽골군에 의해 대부분은 파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행궁, 강화유수부 동헌, 이방청, 장녕전, 만녕전, 외규장각 등 여러 건물이 있었으나 병인양요(1866) 때 거의 불타버렸고 지금은 강화유수가 집무하던 동헌[명위헌]과 이방청 그리고 근래에 복원된 외규장각만이 남아있다.
서쪽 ‘강화부종각’ 안에 있던 강화동종은 종에 균열이 생겨 강화역사관으로 옮겼고, 지금 것은 원래 종의 모양과 크기가 같은 종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1976년 강화국방중요유적복원사업 때 정확한 고증 없이 현재의 규모로 담을 둘렀으나, 본래 고려궁궐의 영역은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담 뒤편으로는 동서 약 100m, 남북 25m의 평지가 펼쳐져 있다. 조선시대 유수부 건물 '명위헌' 현재 강화도에서 당시 고려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어 여기저기서 '강도'(江都) 관련 조각들을 모아본다
조선시대 유수부 건물 '명위헌'
1. 고려 고종(高宗)의 강화도 천도길
강화도 광성보 앞 물길 건너 김포 쪽에 뱃사공 손돌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묘가 하나 있다. 손돌은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 올 때 그를 배로 모시고 오던 뱃사공이었다. 당시 손돌이 물살이 험한 쪽으로 배를 몰고 가자 고종은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의심하여 손돌의 목을 베어 버리게 한다. 그러나 손돌은 바가지 하나를 물에 띄우며 그것이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라는 말을 남기고 순순히 죽음을 맞이한다. 바가지를 따라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한 고종은 곧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의 장례와 제사를 후하게 치루어 주도록 하였다. 음력 10월 20일, 이때만 되면 이곳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사람들은 이를 손돌의 원혼이 일으키는 바람이라고 하였다.
손돌의 묘
그러나 강화도 북쪽 송해면 당산리, 지금은 북한의 개풍군이 바라보이는 곳에 커다란 돌 비[高麗高宗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고려 고종은 김포 쪽이 아니라 이곳을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고자 수년전 강화도의 뜻있는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그리고 고종이 강화도에 첫발을 디딘 날은 음력 10월 20일이 아니고 7월 7일이라는 것 까지 밝히고 있다.
한편 손돌은 사람이 아니고 이곳의 옛지명인 착량(窄梁)의 뜻인 '좁은 (물)목'을 우리 말로 옮긴 것이란 주장도 있다. 오래전부터, 매년 음력 10월 20일 손돌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 김포 쪽으로서는 상당히 껄끄러워하는 대목이다,
2. 몽골은 물이 무서워 강화도를 침공하지 못했다?
가끔 주위 사람들이 김포와 강화도를 가르는 물길[염하, 강화해협]을 가리키며 묻는다.
“ 정말 몽골은 물이 무서워, 혹은 수전(水戰)에 약해서 강화도를 침공하지 못했는가? ”
김포 쪽과 강화도를 잇는 신강화대교는 길이 가 780m이다. 지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던 그들이 이 물길이 무서워 강화도를 침공하지 못했냐는 것이다. 나이 좀 든 사람들 은 학교에서 그렇게 배워왔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이와 관련된 논문이나 정리된 자료를 찾지 못해서 토막글들을 모아본다.
신강화대교
1238년(고종 25), 몽골이 강화 해변가에 출현하여 위협적인 시위를 하였을 때 이규보(李奎報)가 쓴 글이다.
" 오랑캐들이 아무리 완악(頑惡)한들 어떻게 이물을 건널 수 있으며, 저들도 건널 수 없음 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말하겠는가?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텐데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게나. 저들은 응 당 물러가리니 국업(國業)이 어찌 갑자기 끝나겠는가?"
우리나라 국사학계 원로의 글에 이런 글이 있다.
“몽고군은 원래 내륙에서 성장하여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에 불과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는 강화도에 대하여는 어찌하지 못하고, 기타 지역에서의 난폭, 횡행(橫行)으로써 강도정부를 굴복시키려 하여 --”
결국, 당대 최고 시인 이규보의 글과 일제시대부터 활약한 이 원로 국사학자의 말 한마디를 이후 우리나라 근대 국사교육에 종사하든 그의 제자 학자들이 별 생각없이 따른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몽골이 정복하였던 세계지도를 한번이라도 관심 있게 들여다보거나, 직접 이 물길 앞에 서보면 위 글에 동의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이에 대한 결론은, 근래 몇 학자들이 다른 주제에 곁들여서 언급한 조각 의견과 같이, 몽골은 강화도를 침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이 된다. 몽골의 주공격 목표는 동쪽으로는 금(金), 이후는 남송(南宋), 서쪽으로는 러시아 등 유럽이었고, 고려는 부차적 목표였다는 것이다. 즉, 몽골과 강도정부와의 1:1 전쟁으로 보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교과서적으로 거기에다 강도정부의 항몽 반외세 자주정신도 가미되었고. 아무래도 이 대목이 설득력이 있겠다.
3. 강화도와 삼별초(三別抄)
강도시대의 강화도에서는 삼별초군의 활약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1270년 원종(元宗)의 개경환도가 결정된 직후에 배중손(裵仲孫)이, ‘무릇 나라를 구하려는 자는 구정(毬庭)에 다 모여라’는 기록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천 여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강화도를 떠났다는 정도이다.
한편 강화 향토지 <강화사>에는, ‘ 배중손은 특견의 명수로 강화군 길상면 사람이고, 김통정은 교동사람이다 ’ 라 하고 있다.
현재 굳이 강화도에서 삼별초의 흔적을 찾고자 하면 두 곳이다. 배중손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는 구정은 현재 고려궁지 밑 주차장인 용흥궁공원으로 추정되고 있고, 나머지 한 곳은 배중손이 삼별초군을 이끌고 남으로 출발하였다는 외포리 바닷가이다. 이곳에는 삼별초군의 항몽정신을 기리기 위해 강화군민들이 세운 (1993) 커다란 비[三別抄護國抗蒙遺墟碑]가 바다를 향해 서있다.
그러나 삼별초군이 강화도를 떠난 지점은 이곳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반면 전라도 진도와 제주도에는 삼별초군이 고려 ・ 몽골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진도의 용장산성과 남도석성, 그리고 제주도의 항파두리성 등을 비롯해 삼별초와 관련된 유적지들이 여럿 있다. 외포리 비 앞의 진돗개, 돌하루방 조각물은 삼별초 호국항몽유허비를 매개로 자매결연을 맺은 진도군과 북제주군에서 기증한 것이다.
4. 우리나라 최초의 간척사업, 강화도에서 이루어지다.
강화도는 간척으로 이루어진 땅이다. 강도시대 초부터 시작된 간척사업이 근대까지 이어져 120개의 둑으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강화도가 된 것이다.
강화천도와 함께 강도정부는 궁궐을 마련하고 적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해 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다 급한 것은 식량의 확보였다. 당시, ‘강화에 굶어 죽는 자가 거리에 널려 있다’<고려사절요>라는 기사가 말해주듯, 갑자기 불어난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식량 조달을 위한 논과 밭의 마련이었고, 방법은 둑을 쌓는 것이었다.
현재 강화도 사람들은, '강도시대 사람들은 비가 올 때에도 기와집 처마 밑으로만 다니면 비를 맞지 않을 정도로 기와집이 이마를 맞대고 있었고, 인구는 50만 명에 달했다'고 자랑섞인 이야기를 한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왕실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을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강화도로 오기 전 개경의 인구를 나타나는 ‘京都戶之十萬’<고려사>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곳의 인구도 10만 명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강화도의 인구는 7만 명이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도 간척사업은 계속되었고, 18세기 숙종 때에는 선두포 둑이 완공되어 지금의 참성단과 전등사 그리고 동막 해수욕장이 있는 강화도 남부의 화도면이 강화 본도와 연륙되었다.
5. 팔만대장경 이야기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은 강도시대에 만들어졌고, 이제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2007) 세계인이 그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전국토가 거의 초토화되어 있던 절박한 상황에서 고려 5백년 역사 최대의 국책사업으로 일컬어지는 이 판각사업이 어떻게 가능했을까는 아직까지도 불가사의로 남아있다.
대장경 8만장을 한 장씩 위로 쌓아 올릴 경우 그 높이는 백두산보다 높고,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이는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쓴 것이다’라고 한 5천 2백 만자의 글씨, 그 외에도 16만장의 종이와 약 6백 명이 넘는 전문적인 각수(刻手), 등등 생각할수록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더구나 기록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1) 팔만대장경은 왜 만들었나?
다음은 이규보(李奎報)가 쓴 대장경 판각을 위한 축원문 -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의 일부이다.
“-- 현종(顯宗)때 거란이 물러간 이유는 대장경이 하나요, 판을 새긴 일이 하나요, 임금과 신하가 함께 서원(誓願)함이 또 하나이다. -- 엎드려 빌건데 여러 성스러운 부처님께서 간절히 비는 이 심정을 받드시어 신통의 힘을 빌어 완미(頑迷)한 오랑캐와 비속(卑俗)하고 추한 무리들로 하여금 계속하여 멀리 철수시켜 우리 강토를 두 번 다시는 밟지 않게 하여 주시고--”
즉,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 달라는 바람으로 대장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느 일본 학자[池內宏]는 이렇게 말했다.
“ 몽고의 침입에 허덕이면서 국방상 아무런 능력도 보여줌이 없이 고려 군신(君臣)들의 종교상의 미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
종교적 믿음의 위력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불가사의할 정도의 이만한 대역사가 과연 ‘군신들의 종교상의 미신’ 하나만으로 가능했을까?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민영규(閔泳珪)의 글이 더 설득력이 있다.
“ -- 최우를 비롯한 집권세력이 불교세력을 회유하기 위함이었다. <고려사>에 보면 흥 왕사, 경복사, 왕륜사 승려들이 최충헌(최우父)을 살해하려다 실패하였고, 오히려 800여 명이 살해되어 시체가 산처럼 쌓여 몇 달 동안 사람이 지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따라 서 (최우 정부가) 집단저항의 유일한 조직인 불교계를 회유하기 위해 판각하였다. 이러 한 정치적 이유에다 두 아들을 승려로 만든 최우의 불심도 더해졌다. -- ”
최우의 개인적인 신앙심도 한몫을 하였지만, 정치적 적대세력을 회유하여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우선이었다는 것이다.
2) 팔만대장경 판각장소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강화도 서문 밖 판당에서 향을 올렸다(1251)거나, 조선 태종이 한강에 나아가 대장경판을 강화 선원사에서 가져오는 것을 참관하였다(1398) -- 등등의 기록을 근거로 여태까지 강화도, 그리고 남해의 분사도감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박상국(朴相國)은 대장경 판각장소는 강화도, 특히 선원사는 아니고 경남 남해에서 모두 판각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대장경에 새겨진 간기(刊記)와 각수(刻手)의 이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팔만대장경은 남해에서 판각한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거기에 판각 경비의 대부분은 최우와 그의 처남 정안(鄭晏)이 대부분을 부담하였는데, 진양군과 하동 남해 일원은 최우와 정안의 선대로부터의 식읍지였다는 점도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아울러 그는 팔만대장경의 매수도 여태까지 알려진 81,258매는 일제 때 잘못 조사된 수자이고 78,280매가 정확한 매수라고 하였다.
6. 선원사지(禪源寺址 - 사적 제259호) 이야기
사람들이 강화도 선원사(터)를 찾는 것은 이곳이 팔만대장경을 만든 옛날의 선원사가 있던 곳이라는 믿음 하나 때문이다.
현 선원사지 근처 현 선원사지 (남북 250m, 동서 170m)
옛 선원사는 고종 32년(1245) 당시 최고 실권자 최우(崔瑀)가 세운 것으로 송광사와 더불어 2대 선찰로 손꼽힐 만큼 규모 있는 사찰이었다. 그때는 5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하였을 정도로 번성하였으나 조선 태조 7년(1398) 이곳에 봉안하던 팔만대장경을 서울로 옮긴 후 허물어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 이후는 문화재청의 기록을 본다.
현 선원사지 (남북 250m, 동서 170m)
“ -- 강화선원사지는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강화도 일원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 1977년에 사적 제259호 강화선원사지로 지정되었다. -- 1996년부터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 축대 유구와 연화문기와, 금동탄생불 -- 등이 출토되어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규명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는 고려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이에 대하여는 장기적인 조사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 ”
이곳이 절이 있던 곳이긴 하나 반드시 선원사가 있던 곳이라고 확정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내용이다. 즉, 1977년에 사적 제259호 강화선원사지로 지정한 것은 현재까지의 발굴결과로서는 문제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한편 강화도의 향토사가들 중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현재의 (선원면 지산리) 선원사터는 당시의 (신니동) 가궐(假闕)터이고 옛 선원사는 선원면 선행리 충렬사 인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금년 초까지 이에 관해 수차례의 세미나 등이 있었지만 아직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7. 단군이 강화도로 온 까닭은?
단군의 주활동무대는 북한으로 관련 유적도 대부분 북한에 있다. 남한에서는 강화도에만 두 곳 - 삼랑성(사적 제130호)과 마리산의 참성단(사적 제136호)이 있다.
"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에게 각각 한 봉우리씩 맡아서 성을 쌓게 했기 때문에 삼 랑성(三郞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 <여지도서 강도부지>
“ -- 마리산은 (강화)부의 남쪽에 있고, 산꼭대기에는 참성단이 있는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 던 단이라 전한다. ” <고려사>
“ 1264년 왕(원종)이 묘지사로 거처를 옮기고, 친히 마리산 참성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고려사>
참성단(사적 제136호)
정사(正史)인 <고려사>에서 굳이 단군을, 더구나 강 화도에 출현시켜서 이야기하고자 한 의도는 무엇이 참성단(사적 제136호) 었을까? 그러나 단군이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무 게에 비해서 이와 관련하여 정리된 자료는 거의 찾을 수 없어 강도시대의 정치 ・ 사회적 상황에 따른 개연성과 개인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몇 자 소설을 만들어 본다.
강화도로 피난을 가기 전 정부는 백성들에게, 몽골에 항복하지 말고 섬이나 산으로 들어가서 끝까지 싸우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귀족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왕을 따라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후 몽골의 수차례에 걸친 침략으로 전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심지어 왕이 있는 강화도 조차 굶어 죽은 자가 거리에 널려 있을 정도로 나라는 피폐해졌다. 또한 몽골의 6차 침입 때 포로로 끌려 간 사람이 20만 명을 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포로와 전사자, 부상자의 가족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강도정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반면에 최고 권력자 최우의 강화도 집은 사방 10리에 달하였고, 그의 집에서 큰 잔치를 벌인 후, 여기에 동원되었던 악공 1천 3백 여 명 모두에게는 황금과 비단을 수고비로 주었다고 한다. 강도시대 귀족들의 생활은 사치 그 자체였던 것이다.
자연히 백성들의 강도정부에 대한 원망은 커져갔고, 몽골 침략 마지막 단계에는 방호별감이나 농민군 지도자들이 몽골에게 투항, 협조하는 사태로 까지 발전하였으며, 백성들은 '오히려 몽골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반겼다'고 까지 한다.
정부의 담당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을 희석시키고, 아울러 그들의 강화도 천도의 당위성을 백성들이 받아들이게 할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고자 하였다. 그 대책으로 '단군과 강화도 이야기'를 선택하였다.
여태까지 민간에 전해오던 단군 관련 이야기를 더욱 구체화시킨다. 결과, 이 민족의 시조가 되신 단군께서는 예로부터 강화도를 성스러운 곳으로 생각하였으며, 이곳에 몸소 행차하시어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빌었다는 '믿음'을 백성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믿음의 힘'의 크기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천도의 당위성과 현재의 생활 자체를 연장시켜 나가고자 한 것이 아니었던가?
내친 김에 한걸음 더 나가 본다. 강도시절, 일연(一然, 1206 ~ 1281)은 <삼국유사>를 편찬하기 전에 원종(元宗)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 선월사에서 3년간 주석하였다 한다. 혹시 일연도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2008년 7월, 최초로 발행된 단군 우표
덕신고 교감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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