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윤식의 인천이야기

(25) 인천의 호텔

by 형과니 2023. 5. 29.

(25) 인천의 호텔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07-05 22:24:07

 

제물포 도착 아펜젤러, 大佛에 짐 풀어

(25) 인천의 호텔

 

인천에 호텔이 생기게 된 원인(遠因)이 개항이었다면 한양과 인천 사이에 철도 같은 교통수단의 부재가 근인(近因)일 것이다. 개항은 곧 사람의 국내외로의 여행을 의미하는 것이니 필연적으로 여행객을 위한 숙박 시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한양을 목적지로 해서 제물포항에 도착하는 서양인을 위한 호텔의 탄생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천의 호텔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아펜젤러 목사가 처음인 듯하다. 개항 두 해 뒤인 188545, 제물포항에 도착한 그는 그날 인천에 여장을 푸는데, 그는 그가 묵은 호텔에 대한 첫 인상을 그의 메모에 이렇게 적고 있다.

 

다이부츠(大佛) 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 선상 예배에서 버나도씨를 만났는데, 그는 한국에 대해서 좋게 말했다. 잠은 잘 잤다. 비록 미국 호텔 만큼 원기를 회복시켜 주지는 않았지만 기선보다는 한결 나았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인천에는 이미 188545일 이전에 호텔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인천 뿐만이 아니라 한국 호텔사상 최초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흔히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1902)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꼽고 있으나 혹 규모는 뒤졌을지 몰라도 제물포의 대불호텔이 최초임은 이렇게 아펜젤러의 기록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최성연(崔聖淵)개항과 양관 역정의 기록에는 대불호텔의 낙성(落成) 연도가 아펜젤러의 메모와는 약 3년의 차이가 나는 1888년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라 해도 역시 개업 연도는 서울에 앞서고 있는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호텔 음식에 대해 식탁에 앉았을 때는 잘 요리되어 입에 맞는 외국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는 아펜젤러의 기록과, 불란서 외교관이었던 이뽀리트 프랑뎅(Hippolyte Frandin) 등이 쓴 ‘En Cor´ee’에서는 요리에 대해서 차마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다라는 정반대의 평을 볼 수가 있다.

 

프랑뎅 등은 대략 1890년대 중반 무렵에 제물포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상반된 품평이 나온 이유가 한 10년 사이에 호텔 경영이 퇴보했던 것인지 아니면 미국 목사와 불란서 외교관의 입맛이나 성품의 차이였는지는 단언할 수가 없다.

 

아무튼 대불호텔이 성업을 이루자 길 건너 청국지계 끝 쪽에 청국인 이태(怡泰)가 스튜어드호텔을 연다. 이 호텔에 대해서는 1894년 제물포를 방문한 영국 여류 지리학자 비숍(Isabella Bird Bishop)이 자신의 저서에서 나는 스튜어드호텔로 알려진 중국식 여관에 묵게 되었다. 이 여관은 중국인 구역의 중심가 끝에 위치해 일본인 거주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호텔들은 경인 철도 개통과 함께 일시에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조랑말과 가마 외에 다른 교통수단이 없어 서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루 이틀 인천에 묵어야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중구 중앙동의 대불호텔은 훗날 요릿집 중화루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다가 오늘날은 그 터만 남아 주차장이 되어 있고 선린동 스튜어드호텔 자리에는 얼마 전 본토라는 중국집이 새 건물을 지었다.

 

오늘 중구 항동에 새로 하버 파크호텔이 개업한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문득 초창기 인천의 호텔에 대한 기록을 들추어 본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김윤식의 인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7) 인천의 여름(中) - 염전지대와 소금  (0) 2023.05.30
(26) 인천의 여름(상) - 어물  (0) 2023.05.30
(24) 팔미도 등대  (0) 2023.05.29
(23) 꽃게  (0) 2023.05.28
(22) 여배우 도금봉  (0) 2023.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