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인천의 여름(中) - 염전지대와 소금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07-21 15:52:27
수차 돌리던 鹽夫 눈에 선한데
(27) 인천의 여름(中) - 염전지대와 소금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인천 하면 곧장 ‘염전과 소금’을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 최초로 염전을 축조해 천일염을 제조한 소금의 고장이었던 까닭에 특히 소금이라는 단어가 곧장 인천을 지칭하는 대명사처럼 쓰이던 때였다.
1907년 일본인들이 주안에 염전을 만들어 시험 제조에 성공한 뒤 남동, 소래, 군자 등지에 방대한 넓이의 염전을 축조했으니 인천 하면 자동으로 염전과 소금이 연상될 만도 한 것이었다.
물론 ‘인천 짠물’ 운운하는 듣기에 썩 유쾌하지 않은 이름은, 개항과 광복, 6·25사변 등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을 때마다 인천 땅에 밀어닥친 외지 유입 인구와 함께 각박해지는 인심을 빗대던 칭호라고 하겠는데 그것이 공교롭게도 인천의 염전과 소금에 결합돼 ‘짠물’이라는 별칭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인천이 전국 최대의 염전 지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기후 조건과 함께 잘 발달한 개펄 때문이었다. 소금을 인천 지역 토산물의 하나로 꼽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소금 생산 장소인 염소(鹽所)가 인천 6곳, 부평 7곳, 강화 11곳, 교동 3곳 등 총 27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숫자는 당시 경기도 전체의 30%, 전국적으로는 약 10%에 해당하는 높은 수치였다. 이것만으로도 인천 일대의 개펄이 해수를 끌어들여 소금을 만드는 데 얼마나 좋은 조건을 가졌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18년 주안염전, 21년 남동염전, 25년 군자염전이 차례로 증설되면서 1932년에는 총 면적이 1천115정보에 달해 전국 생산량의 절반인 15만t의 소금을 인천 일대에서 생산해냈다.
인천 서곶(西串) 지방에만 염세(鹽稅)를 바치는 업자가 100명에 가까웠다는 전설로도 인천의 소금 생산량이 실로 대단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안이 191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그리고 남동과 소래가 2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금을 생산했다. 이 세월 동안 인천에서 나는 굵은소금, 고운소금이 전 국민의 뇌리에 각인됐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제 ‘인천 소금’ 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염전이라는 염전은 모조리 매립을 해 인천은 애초부터 전혀 소금과 상관이 없는 도시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비록 일제에 의해서였지만 최초로 염전이 축조되고, 최초로 근대식 천일염을 제조해낸 한국 천일염의 발상지가 그만 허명(虛名)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사실은 슬프기까지 하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소금 제조의 원조요, 명당이었던 인천에는 그 기념표지(紀念標識) 하나가 제대로 서 있지 않은데 전남 신안군 증도면의 태평염전은 어엿하게 국가 지정 등록문화재가 되어 소금박물관까지 갖추고 있으니 어찌 열불이 나지 않을 수가 있으랴.
어릴 때 여름이면 낙섬 염전 긴 둑길을 걸어 저수지에서 미역을 감거나 주안 염전, 가좌동 염전 저수지에서 망둥이 낚시를 하던 생각이 난다. 수차를 돌리던 염부의 모습과 오지항아리 조각이 깔려 있는 증발지(蒸發池) 풍경이며, 그 옆의 노을빛 함초 무리들, 결정지(結晶池)에 쌓인 백설처럼 눈부신 소금 결정들, ‘소금기차’라고 불리던 수레가 소금 가마니를 녹슨 함석 소금창고에 가득 실어 나르던 광경이며….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그 옛날 인천 사람들은 염전지대 저수지에서 여름 한 철을 나곤 했는데….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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