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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인천이야기

(24) 팔미도 등대

by 형과니 2023. 5. 29.

(24) 팔미도 등대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07-05 22:18:47

 

인천상륙작전 결정적 길잡이

(24) 팔미도 등대

 

11일 일반에 개방된 팔미도를 찾은 관광객 수가 623일 현재 85천여 명이라는 기사가 본보 어제 일자 지면에 실렸다.

 

인천지방해양항만청 발표 자료에 의하면 대략 평일 500여 명, 주말 2천여 명의 관광객이 팔미도를 방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숫자는 한 마디로 팔미도가 인천 지역 어느 관광지보다도 인기가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사를 쓴 본보 이은경 기자는 관광지로서 팔미도가 가지고 있는 강점을 이렇게 쓰고 있다.

 

군사보호구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금단 구역이 개방된 점, 팔미도 등대가 19036월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라는 점, 더불어 우리나라 등대 변천사를 설명해 주는 등대홍보관과 인천대교, 인천국제공항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옥상전망대등을 꼽았다. 거기에 최근 인기 속에 방영됐던 TV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촬영지여서 특히 젊은 층의 관심을 끌고 있는 점도 들었다.

 

105년 전, 비록 외세에 의한 등대 건설이기는 했지만 이것이 오늘에 와서는 등대 본연의 구실 뿐만이 아니라 관광자원으로서도 내외에 인천의 성가를 올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면 때문이었는지 이 기자의 기사 속에는 팔미도와 팔미도 등대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한 증인으로서도 크나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내용은 볼 수 없었다. 해발 71m, 해안선 길이 1.4의 작은 섬, 그 꼭대기에 세워진 높이 7.9m의 작은 등대가 격동 한국의 한 세기를 말없이 지켜보아 온 증인이라는 말은 없었던 것이다.

 

팔미도 해상은 구한국의 종말을 재촉하는 러일해전의 마당이기도 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5년 전인 190429, 팔미도 앞 바다에서 러시아의 순양함 코레에츠 호와 바리아크 호가 일본 해군 선단의 기습을 받아 해전을 벌인 러일해전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 뿐이었던가. 1950, 9·15 인천상륙작전 당시 팔미도 등대가 결정적인 길잡이 역할을 했었던 기록도 있다. 비밀부대 KLO의 클라크 미군 대위를 비롯한 우리 한국군 부대원들이 팔미도 등대를 탈환해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등대 옆에는 KLO 8240부대의 작전을 기념하는 비석이 서있다.

 

문득 2004년 정년퇴직을 앞둔 등대지기의 삶을 르포하기 위해 이 작은 섬을 방문했을 때 쓴 글 구절이 생각난다.

 

“‘대 선배는 저기 물러서 있고 새카만 후배인 나는 육지로 가고. 이를테면 둘이 다 퇴역한 노병이 되는 거지요작년(2003) 12월 우리나라 등대 설치 100주년에 맞춰 현대식으로 웅장한 등대가 세워졌고, 그 동안 불을 밝히던 작은 옛 등대는 임무를 새 등대에 맡긴 채 그 옆에 말없이 서있다. 그가 대 선배라고 부른 것은 바로 19036월 이 자리에 서서 처음으로 불을 밝혔던 그 옛 등대를 말한다. 그렇게 허 씨가 낮밤으로 오르내리며 말을 걸고 함께 비바람에 쓸리던 대 선배는 한 발 앞서 퇴역해 해양 문화유산으로 영구히 남게 됐고 그는 이제 33년에서 꼭 2개월이 모자라는, 짧지 않은 등대원으로서의 세월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영원한 등불! 그 등명기(燈明機)의 불빛이 오늘에는 인천의 관광자원이 되기도 한 것이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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