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여름밤의 꿈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9-08-01 15:10:48
잃어버린 여름밤의 꿈
들일 때문에 저녁은 으례 늦기 마련이었다. 늦은 설거지를 마친 아낙들이 지친 몸으로 동네 마당에 나올 때는 이미 초승달이 진 뒤였다. 어린것들도 덩달아 따라 나섰다. 평상이 놓이고 더러 멍석이 펴졌다. 뒤늦게 할아버지가 아시고는 멍석이 망가진다고 역정을 내 다시 말아 들여놓기도 하셨다.
어느 새 한 귀퉁이에는 모깃불이 피어져 안개가 가라앉듯 매캐한 연기가 동네 가득하고 눈이 아리면서도 냄새가 오히려 구수했었다. 헌 화로에 불씨를 담아 푸새잎을 얹고 논에서 캐어다 말린 토탄 덩이로 눌러 놓으면 오래도록 절로 피어 타는데 그래도 영악스런 모기는 틈을 비집고 덤벼들었다.
제각기 바가지와 소쿠리에 담아온 찐 감자와 옥수수를 나누어 먹으면서 아낙들의 이야기는 무르익어 갔다. 어느 댁에서 내왔는지 강낭콩을 듬성듬성 둔 햇밀 범벅도 있었다. 어린것들은 그것을 더 좋아했다. 어느 새 밤도 이슥하여 한 사람 두 사람 피곤한 몸을 일으켜 자리를 뜨면 이번엔 할머니와 어린것들의 차지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몇번씩 들어도 재미있는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도 지루해지면 공연히 어둔 구석이 섬뜩해졌다.
동구 밖으로 나가는 구석진 돌담길이 캥기고 검둥개도 그곳을 향해 싱겁게 짖어댔다. 그곳은 정신이상자 진돌어매가 흐트러진 몰골로 뛰어나오고 지난해 죽은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대낮에도 무서운 곳이었었다. 때마침 초저녁 잠에서 깨어 나오신 할아버지는 이젠 들어가라며 서두셨다.
이런 여름밤의 옛 모습은 전망차자가 어렸을 적 여름방학이면 오늘의 계산동 외갓집에서 겪은 체험담이다. 그러나 계산동의 한적했던 전원지대는 간 곳 없고 오늘날 번화한 도시가 되어 옛날 여름밤 정경을 느껴볼 수가 없다. 어디 계산동뿐일까. 다른 농촌에서조차 사라져 가고 있다. 농촌 구석구석 아파트가 들어서고 밤이 휘황찬란하다. 동네 앞마당은 주차장이 되어 어지럽다.
그러니 도시건 농촌이건 어른 아이 아파트 거실에 갇혀 텔리비전과 게임기에 매달려 무더운 여름밤을 설친다. 잃어버린 여름밤의 꿈도 정취도 여유로움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오광철의 전망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걷고 싶은 샛골길 (0) | 2023.06.02 |
---|---|
장대 들고 별 따러 (0) | 2023.06.01 |
인천의 나비부인 딸 (0) | 2023.05.31 |
동구에 하나뿐인 섬 (0) | 2023.05.30 |
수인선 자료 없나요 (0) | 2023.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