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률(協律), 협률사(協律舍), 협률사(協律社)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09-08-17 21:50:41
협률(協律), 협률사(協律舍), 협률사(協律社)
강 덕 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의 연극을 논함에 있어 그간 지역 문화계에서는 1895년 정치국(丁致國)이 개관한 인천 경동의 협률사(協律舍, 애관의 전신)를 한국 최초의 극장으로 간주하여 왔다. 이는 1902년 서울 정동에 문을 연 협률사(協律社)보다 7년, 이인직(李人稙)이 1908년 7월 종로 새문안교회터에 창설했던 원각사(圓覺寺)보다 14년이나 빠른 것이다. 또 서울 협률사와 원각사가 관주도로 황실과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것과는 달리 개인에 의해 설립된 첫 사설극장이 되는 셈이다. 인천 협률사의 존재는 인천 문화예술의 선구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한국 최초의 의미로 인용되어 왔던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1902년의 서울 협률사를 한국 최초의 공연장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반해, 인천 협률사를 한국 최초라고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역 문화계가 이와 같은 해석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고일(高逸)의 『인천석금』(1957)과 최성연(崔聖淵)의『개항과 양관 역정』(1959)에 근거하는데, 공연장 설립자로 정치국을 모두 지목하고 있지만, 개관 연대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다.
고일에 의하면 ‘인천의 부호 정치국은…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해와 성공한 재산가이다…그는 용동(龍洞)에 창고 같은 집을 지었다. 이것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극장 협률사(協律舍)이다’라고 하였다. 최성연 역시 ‘그 당대 인천의 부호 정치국(丁致國) 씨가 운영하던 협률사(協律舍)라는 연극장이 있었다. 협률사는 오늘의 애관의 전신으로서, 일청전쟁중(1894-95) 지었던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하였다’라고 할 뿐이었다.
1895년 창립설은 최성연의 ‘일청전쟁중(1894-95) 지었던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하였다’에서 확대 해석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심정적으로 한국 최고, 최초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측면이 강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설립자 정치국 역시 1899년 2월까지 부산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신문기사가 있어, 인천에서 1895년 창립하였다는 것에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협률(協律)’은 한자 그대로 ‘음악의 조화를 이루는 것’ 정도의 해석으로, 이미 조선 초기 이래 장악원(掌樂院,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 소속의 협률랑(協律郞)이라는 직책이 존재하고 있었고, 구한말 협률과(協律課)가 교방사(敎坊司)로 승격되는 기사도 보이고 있다. 협률과 관련하여 협률창희(協律唱戱), 협률사(協律司), 협률원(協律院), 협률회사(協律會社) 등도 나타나고 있어, 1895년의 인천 協律舍와 1902년의 서울 協律社를 굳이 동일선 상에서 취급할 이유는 없다. 더욱이 협률사라는 것이 부서의 이름인지, 공연장의 이름인지, 공연단체의 이름인지에 대한 판단도 애매모호한 상태로 유보된 상태다.
1883년 이후의 인천은 개항과 동시에 국제적 도시로 변모하였고, 전통과 신문명이 공존하는 요람이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인천에서의 우위를 더욱 확고히 하였는데 그간 100석 규모로 인천 일본인 거류민을 위해 만든 극장 규모를 확대하여 1897년 한국내 최초의 일본인 전용극장인 인천좌(仁川座)를 신축하였다.
이런 정황을 바탕으로 한다면 개항장 인천에서 1895년 조선인 연극장의 출현을 부정적으로 볼 근거는 없다. 인천 협률사에 대한 연대자료가 부족하다고 해서 작위적 해석을 가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지역의 전승 자료를 무시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조선의 전통적인 공연과 관련하여 협률이라는 명칭을 달고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공연무대가 일찍이 인천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유일한 사례일 수도 있다.
협률사는 1911년 축항사(築港舍)라 고명칭이 바뀌게 되는데, 부지 48평을 가진 2층 건물의 조선인 극장으로 정원 500명의 규모였다가, 1920년대 애관으로 명칭을 또 다시 변경하여 신축하였다. 여기에서 극작가 진우촌, 함세덕, 연기자 정암, 무대장치가 원우전(元雨田) 등 기라성 같은 인천 문화계 인물들이 배출되고 활동하였던 것이다.
한국 최초든 아니든 개항장 인천에서 공연장이 선구적으로 설립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인천의 문화활동이 왕성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협률사는 개항 이래 격동의 그 긴 시간만큼 인천 문화예술의 큰 축으로 자리매김하여 온 문화예술인들의 혼이 담겨 있는 산실이었다.
소식지 해반 73호 2008.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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