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운센드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09-08-17 21:59:15
타운센드
강 옥 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아마 인천사람들이라면 최초의 스팀 정미소, ‘담손이 방앗간’을 운영했던 타운선(陀雲仙)을 기억할 것이다. 타운센드의 이름은 여러 사료에서 한국명뿐만 아니라 영어 이름까지도 매우 다양하게 나온다. 한자로 보면 타운선(他雲仙)이 가장 자주 쓰이고 있다. 그 외에 陀雲仙, 佗雲仙, 陁雲孫, 它雲仙, 淡順, 淡于孫, 淡于仙, 淡生 등이 있다. 영어로는 Townsend가 정확한데, 종종 Townsent, Townsand, Tounsend로 쓰인 것도 보인다. 한글명은 타운센드, 타운션, 타운션트, 다운젼도, 담슌, 담순, 담손 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타운센드는 1856년 2월 9일 미국 보스톤 캠브리지(Boston Cambridge) 8가에서 내과의사 윌리암 에드워드 타운센드(William Edward Townsend)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타운센드의 큰형 에드워드 브리튼 타운센드(Edward Briton Townsend)는 보스톤의 설탕 중개인이었던 삼촌 토마스 데이비드 타운센드(Thomas David Townsend, 1826-1880)에게서 조수 수업을 받고 보스톤에서 석탄도매업자로 성공했다. 그러나 월터 데이비스 타운센드의 10세 이후의 행적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며, 그가 언제 미국무역상사의 사장 모오스에게 고용되었는지도 자세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타운센드는 정식으로 결혼한 적은 없으나 일본 여성과 1882년부터 1886년까지 살았고, 그 여자가 사망한 후 조선에 완전히 정착하면서 다시 일본 여성과 동거하였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구미인들은 일본인 첩을 두거나 일본 여성과 결혼하는 일이 잦았는데 알렌은 이를 비난하기도 했다. 타운센드의 동업자이자 이민을 주선했던 데슐러 역시 일본 여성과 결혼한 미국인이었다.
개항 직후 조선에 가장 먼저 진출한 구미계 상회사는 영국계 이화양행(怡和洋行, Messers Jardin Matheson & Co. 1883~1884)이었지만, 비교적 장기간 상권을 확대하고 지속적으로 영업을 한 구미계 상회사는 독일계 세창양행과 미국계 타운센드 상회 정도가 대표적이다. 이후 영국계 상회사로 홈링거 상회(咸陵加商會, Homle Ringer & Co.)나 베넷 상회(廣昌洋行, Bennet & Co.)가 진출하여 영업을 하기는 하나 여전히 세창과 타운센드 상회에 미치지 못하였다.
타운센드는 19세기 말 23세의 나이로 도일(渡日)하여 모오스의 미국무역상사에 고용된 지 불과 1년 만에 고베지점 설치 및 운영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낸 타고난 상인이었다. 그리고 1884년 조선지점인 모오스 & 타운센드 상회의 설치 이후 광산이권 획득 작업으로서 직접 조선내지(內地)를 탐사하고, 또 미곡무역을 위해 내지행상까지 하던 모험가 기질도 갖춘 상인이었다. 타운센드 상회(1884~1930)는 바로 이 타운센드 한 사람의 사업적 수완으로 영업이 이루어진 개인의 상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진출 직후 상회 가옥은 경성의 교동(校洞)에 있었다. 그 후 1885년 초 타운센드는 인천에 순신창(順信昌)이라는 가옥을 서상옥(徐相鈺)과 함께 건축하였고, 곧이어 서상옥으로부터 이것을 매입했다. 순신창 상회는 민응식(閔應植)이 사장, 신기선(申箕善)이 부사장, 서상집(徐相集(潗)), 서상옥(徐相鈺)이 직원으로 되어 있는 일반 상회사였다. 주업종은 국산품의 수출과 조선주재 구미인들을 위한 수입 무역업이었고, 여관업도 함께 겸했다. 순신창 상회는 1884년 궁궐에서 쓸 종이를 모오스 & 타운센드 상회에서 구입, 상납하기도 하였다.
타운센드 상회는 한동안 중개무역과 석유독점 공급, 건설용 폭약의 거래 등을 통해 사세를 확장해 갔으나, 1912년 1월 스탠다드회사와 결별하면서 사세가 크게 축소되었다. 타운센드는 보험업 등 금융업을 통해 이를 만회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큰 성과를 보지 못한 채 1918년 3월 10일 제물포에서 사망하여 북성동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타운센드 사망 후 사위인 아트킨슨(James D Atkinson)이 경영하였지만 이듬해 영국인 맥코넬(William MacConnell)과 미국인 비들(A C Biddle)에게 매각되어 회사명은 그대로 유지한 채 1930년까지 운영되었다. 그러나 커머셜 유니언 보험회사와 홍콩 & 상하이은행의 인천지점 정도로 그 영업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중구 송학동 3가 7번지 일대에는 순신창 및 타운센드 상회건물과 정미소, 타운센드 상회 대리인이었던 맥코넬의 저택 등이 있었지만, 오래전 철거되어 현재는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외국인들이 방문할 수 있는 매력 있는 관광도시 인천을 기획한다면 100년 전 이미 국제도시로서의 역사적 경험을 가진 인천 역사의 궤적을 깊이 통찰하고 개발과 보존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소식지 해반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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