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관주도 해운업의 태동과 인천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09-08-17 22:02:20
근대 관주도 해운업의 태동과 인천
강 덕 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은 서울에 이르는 최단거리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항만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천 개항 이후 출입하는 외국 선박이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인천항은 조선을 왕래하는 외국인 출입처뿐만 아니라 연해와 내륙지방에서 이입된 국산품을 외국으로 수출하거나 이곳에 실려 온 수입품을 산포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1881년 1월 통상과 외국문물의 수용을 담당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 이래 군사 분야와 상공업제도 등 각 분야에서 근대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청나라에서 추천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고문 및 정권사 당상(征權司 堂上)으로 위촉하여 조곡의 징수와 수송 문제, 그리고 관세에 관한 사항을 담당토록 하였다.
그러나 재정난에 처해 있던 정부의 형편으로는 철도부설이나 기선 해운업을 착수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외국의 기선회사와 계약을 맺어 조선 해역에 기선을 정기운항토록 유도하고 세곡을 운송하고자 하였다. 마침 인천 개항 후 청에 진출한 영국과 독일 상사들은 인천 거류 청국상인들의 지원을 받아 인천과 청·일을 연결하는 정기항로를 개설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에 정부는 1883년 4월 영국계 상사인 이화양행과 기선 운항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여 8월부터 월 2회, 660톤 급의 상해 초상국 소속의 기선 남승호를 나가사키(長崎)-부산-인천-상해를 연결하는 정기 항로에 배치하였다. 또 남승호의 항해 적자시 해관세(海關稅)에서 그 반을 보전한다는 조건으로 이 해 11월부터 1년간 세미(稅米) 수송 특권과 광산개발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1년간의 운항 결과 누적된 운항 결손으로 더 이상 배선할 수 없었다(1891년에 이르러 부산해관 세수금으로 연체 이자까지 합쳐 변상하였다).
1885년 조선 정부는 다시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조선 정부가 용선주가 되고 고용한 선박을 세창양행에 위탁하는 형태로 전라도 지역의 세미를 인천까지 수송하도록 하였다. 쌀 5,000 석을 실을 수 있는 300톤 급 규모의 희화선(希化船)이라는 이름의 기선을 6개월 기한으로 빌려 조곡을 운송토록 한 것이었다.
이 무렵 조선 정부는 1884년 갑신정변의 결과로 일본 정부와 굴욕적인 한성조약을 체결하고, 일본 측에 13만원의 배상금을 지급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이에 세창양행에 2만 파운드의 차관을 요청했고, 세창양행은 차관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자기네 기선에 3만석의 적재 물량을 보장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소정량의 조곡을 적재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관세 수입금으로 위약금을 지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광제호 1885년 말 묄렌도르프가 해고됨에 따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관장해 오던 일체의 해운 관계 업무도 전운국(轉運局)이 맡게 되었다. 전운국은 1886년 7월 일본제일은행과 미국계 상사인 타운센드사의 차관으로 해룡호(海龍號, 215톤)를 일본에서 사들이고, 1887년 세창양행의 주선으로 독일에서 조양호(朝陽號, 294톤. 1899년 매각 후 제강호(濟江號) 구입)와 광제호(廣濟號, 536톤. 1888년 창룡호로 개칭)를 구매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전운국이 구매한 대부분의 선박이 거의 모두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중고선이어서, 속력이 느리고 낡은 선박이라는 점이었다. 여기에다 기선 승무에 필요한 해기사는 물론, 일반 선원들까지도 외국인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월급이 몇 개월씩 체불되는 일이 예사여서 선원들의 원성이 자자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이후 1890년경부터는 대판상선회사와 일본우선회사의 기선을 고용하여 삼남지방의 세미를 운송하였으나, 연간 30여만 석에 달하는 세곡을 다 수송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전운국으로서는 선박 도입에 따른 차관의 원리금을 상환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결국 청나라의 정치적인 배려로 두 차례에 걸쳐 20만 냥이라는 거액의 차관을 도입해서 선박 대금 등을 지급하기는 하였지만 근본적인 대책 수립에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전운국이 관선에 의해 해운을 직영한 1866년부터 1892년까지는 조선에 있어서의 청·일 세력이 균형된 가장 평온한 시기로 독자적 해운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여건이었으나, 고가의 고이자로 구매된 기선을 운항하면서도 제요건에 대한 대책이 없었기에 너무나 비싼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93년 우리나라 최초의 해운 기업인 이운사(利運社)가 인천에 설립되기에 이르렀으나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 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일방적 의도에 의해 일본의 소유(?)가 되어 갔음은 예정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겠다.
소식지 해반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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