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조약과 인천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09-08-17 22:12:24
제물포조약과 인천
강 옥 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19세기 서구열강의 동점(東漸)은 중국과 일본에 이어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인천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당시 전개된 여러 사건들이 인천과 관련되어 진행된 것은 인천지역이 갖는 지리적․공간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병인양요(1866),신미양요(1871),운양호사건(1875)에서부터 조미수호조약(1882.5)등 열강과의 조약 체결지로서 또 임오군란(1882.6), 갑신정변(1884),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에 이르기까지 인천 개항(1883)을 전후로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에서 인천은 그야말로 최전방에 위치한 선구지(先驅地)로서 그 역사적 시련을 감당해 왔다.
이러한 사건들 중에 특히, 인천 개항의 실질적인 단초가 된 것은 임오군란으로 야기된 제물포조약 체결이었다. 인천 개항은 강화도조약(1876) 당시에 이미 예고된 것이었지만,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정부의 자주적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무력시위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강요된 불평등조약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당초부터 조약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려는 뜻이 없었다. 일본 역시 처음부터 인천을 개항지로 염두에 두고 조선에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측의 요구에 대해 조선은 원산항 개항을 인정하는 대신 인천에 대해서는 수도에 가까운 해안의 요충지로 간주하여 처음부터 강경한 거부자세로 일관하였다.
임오군란은 이른바 신식군대(별기군)에 비해 차별을 받았던 구식군대(훈련도감) 병사들의 불만이 분출된 것으로 1882년 6월 5일 유력 대신들을 살해하고 일본공사관을 포위하였던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부사(花房義質)등 일본인들은 인천을 도주처로 하여 관교동과 숭의동․도원동을 거쳐 월미도 해안에 이르러 영국 배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므로 인천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은 당시 하나부사가 마셨던 우물인 화방우물이 북성동에 있었다고 전설처럼 이야기한다.
당시 일본인 희생자는 지금의 답동 부근에 매장되었는데, 일본인들은 훗날 갑신정변의 희생자 일부를 여기에 매장하고 탁계(坼溪)육군묘지라 불렀다. 답동 일대는 1889년 무렵 일본인 공동묘지로 선정되어 이 육군묘지 주위에는 해마다 일본 거류민의 분묘가 늘어나고 각 종파의 절이 세워졌다. 1908년 이 지역 일대를 개발하여 시가지로 조성하게 되자 공동묘지는 율목동으로 옮겨갔고 육군묘지도 같은 곳으로 이장되었다.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일 양국은 조선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하고 병력을 동원하였다. 특히 청(淸)나라는 대군을 출동시켜 적극 간섭에 나서 임오군란의 배후세력인 흥선대원군을 납치함으로써 흥선대원군 일파의 재집권 여망은 33일 만에 붕괴되었다. 일본은 피해보상과 거류민 보호를 내세워 하나부사를 다시 조선에 파견하여 군란의 책임을 묻고 사후처리의 협상을 요구하였다.
제물포조약 원문당시 조선에 와 있던 청(淸)나라 마건충(馬建忠)의 중재로 조선측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과 부관 김홍집(金弘集)이 하나부사와 1882년 7월 17일(양력 8월 30일) 이른바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인장소는 인천 중앙동에 있었던 일본 군대 임시 군영이었다. 제물포조약은 일본의 야심이 그대로 반영된 불평등조약으로 6개조의 본 조약과 2개조의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으로 구성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군란 주모자들을 처벌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일본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키고 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 등을 일본에 보내 사과의 뜻을 표하였다.
특히, 1876년에 맺은 조일수호조규를 보완한다는 명목으로 수호조규속약 체결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통해 일본은 인천․부산․원산 각항을 기점으로 100리 까지 개항장을 확장하였고 일본관원들의 조선내 통행권을 획득하였으며 용산까지 자신들의 시장으로 확보하였다. 그 결과 수호조규 체결 이래의 숙원이었던 외교관과 영사관의 조선 내 여행권과 내륙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임오군란은 제물포조약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인천은 그로부터 4개월 후에 개항이라는 큰 변화의 소용돌이에 놓였으며, 정치계는 청․일의 압력이 가중됨에 따라 친청․친일이라는 입장을 달리하는 새로운 대립과 반목이 생겨 또 한 번의 정치적 변란인 갑신정변을 초래하게 되었다.
소식지 해반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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