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제의 유배지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9-09-22 02:36:51
순제의 유배지
<內洞地邊高峰地前有零碎瓦礫谷元順帝舊址云 其下卽玉子浦>-<내동은 북쪽의 높은 산 봉우리 아래 지역으로 지금도 기와 조각이 나오는데 원 순제의 구지라고 한다. 그 아래는 ‘옥자포’이다> 1996년 옹진군청이 간행한 ‘옹진군향리지’에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에 실린 대목이며 옥자포는 옥죽포의 옛지명이라고 한다.
궁궐 내 파벌싸움으로 원나라 순제가 태자이던 시절 우리땅의 고도 대청도에 유배되어 왔다. 1332년의 일이라고 한다. 황해를 건너온 그는 옥자포에 상륙해 궁궐터인 지금의 내동초등학교까지 10리길을 걸어갔다고 전한다. 당시 태자가 거느린 식솔은 100여호였다고 하니 큰 마을을 형성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때 태자는 자신이 머물던 곳을 장안이라고 칭하는 등 도읍지의 이름을 붙였다. 이를테면 식량 창고가 있었던 곳은 곡간이 있는 곳이라하여 庫舍洞(고사동)으로 하는 따위이다.
유배중이던 태자는 이듬해 황제의 죽음으로 돌아가 순제가 되었다. 처음엔 선정을 펴 원대의 문화 최성기를 이루기도 했으나 말년에 실정과 천재지변과 명태조 주원장의 북벌로 원래의 대륙으로 쫓겨갔다. 그가 원의 11대 마지막 황제이며 그의 제2황후가 고려 여인 기황후이다. 때문에 원을 배경으로 기씨 일족이 세도를 펴느라 고려사회는 문란해지고 급기야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태자가 고려땅에 이르러 처음으로 육지땅을 밟았던 옥자포-곧 옥죽포 해안에 보기 드문 은빛 백사장이 자리하고 있다. 수만년에 걸쳐 바닷바람에 날려와 쌓이고 쌓여 형성된 길이가 1.6㎞ 폭이 600m에 이르는 66만㎡의 모래산이다. 바다를 건너온 모래, 모래의 고향은 중국 산동반도라고 한다. 푸른 산줄기 급경사에 위치하여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 말고도 대청도에는 사탄동해변도 있다. 특히 이곳에는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여 ‘녹색보고’로 불릴 정도라고 한다.
국립환경과학원의 조사결과 생태 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할 만큼 가치가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다고 한다. 옛날 비운의 태자도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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