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제물포역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09-22 02:53:53
‘제물포’는 제물량 설치된 포구
(35) 제물포역
우리 인천의 도시 이름이 ‘인천(仁川)’으로 불리기 시작한 지가 600년이나 됐다. 지면이 짧아 이곳이 그런 지명을 얻게 된 연유를 여기에 다 쓸 수는 없으나, 삼국시대에 미추홀(彌鄒忽), 매소홀(買召忽), 소성(邵城) 등으로 불리다가 다시 고려 때 경원부(慶源府), 인주(仁州)에서 조선 초기에 인천이 되는 변천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이 이름은 본시 지금의 관교동 인천도호부가 있었던 곳을 이르는 지명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인천의 옛 이름을 제물포(濟物浦)로 알고 있다. 전혀 틀렸다고도 할 수 없지만 옳다고도 말할 수가 없다. 제물포는 인천항 주변 중앙동, 항동 일대에 있던 자그마한 나루·포구를 가리키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개항 후 부치(府治)가 관교동 쪽에서 중구로 이전되면서 제물포가 인천의 중심이 되자 이 이름이 인천의 대표 지명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제물포는 지명이 아니라 제물량(濟物梁)이 설치된 포구를 뜻한다. 제물량은 해안 방비와 더불어 조운선(漕運船)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은 수군(水軍) 진지였다. 이런 제물량영(濟物梁營)이 조선 초 태종 때 설치되면서 그 때부터 여기가 제물포라는 지명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인천군 서쪽 15리에 제물량이 있다. 성창포(城倉浦)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어 지킨다’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구절이나 ‘제물량영은 인천부 서쪽 19리 되는 곳에 있으며 수군만호 1인이 있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성창포는 바로 제물포 포구의 원이름이었다.
1883년 개항이 되면서 밀어닥친 서양인들은 이곳을 제물포로 부르거나 기록한 데 반해 일인들은 그들이 제작한 엽서 따위의 인쇄물 등에 제물포라는 지명보다 인천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사용했다. 따지고 보면 서양인들이 더 정확했다고 할 수 있겠다. 지난주에 이야기한 제물포구락부(濟物浦俱樂部)의 그 명칭도 실상은 어울리는 작명이라고 하겠다.
물론 인천을 정식으로 제물포시라 명명했던 때도 있기는 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10일 미군정청은 일제 때 행정명 인천부(仁川府)를 제물포시로 바꾸었다가 불과 18일 만인 10월27일 다시 인천부로 환원한다. 무슨 연유로 이런 개칭과 환원이 반복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일시나마 인천은 역사상 처음으로 제물포시라는 명칭을 갖기도 했었다.
이런 ‘제물포’가 아직 남아 쓰이고 있는 데가 지난주 이야기의 주제가 되었던 제물포구락부와 웃터골에 자리잡은 제물포고등학교(근자에 설립된 제물포중학이나 제물포여중은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그리고 제물포역(濟物浦驛)이다. 제물포구락부는 앞서 지적한 대로 제 위치에 제대로 된 작명을 가졌다고 할 수 있고, 제물포고등학교 역시 위치로 보나 그 명칭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제물포역만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다. 차라리 원래의 제물포 포구에 인접해 있는 지금의 인천역에 그 이름을 주었어야 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역명이 엉뚱하게 정해진 것은 1958년 당시 김정렬 인천시장의 주장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철도청은 ‘숭의역’을 생각했었는데 김 시장이 인천을 상징하는 지명 ‘제물포’를 기념하기 위해 철도청에 제물포역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의도는 썩 좋았으나 조금만 더 세심히 신경을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어느 젊은 인천 시인의 시 가운데서 지금 제물포역 일대가 작은 포구였을 거라는 구절을 보면서는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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