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제물포고등학교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10-06 22:57:35
응봉산 정상에 ‘우뚝’ 인천대표 명문
(36) 제물포고등학교
인천에 ‘제물포’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또 한 곳이 바로 제물포고등학교이다. 학교의 입지가 발밑 저 아래에 제물포 포구를 둔 응봉산 정상 분지에 자리잡은 지리적 조건으로서도 썩 온당하게 붙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인천 정명(定名)이 600년의 긴 세월에 이르지만, 개항 전후 한때 ‘제물포’라는 이름으로도 이곳이 세계에 알려졌던 바 있으니 이 명칭을 인천의 대표적인 명문 학교가 붙여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제물포고등학교가 자리잡은 응봉산 분지를 옛날에는 ‘웃터골’이라고 불렀다. 웃터골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위의 터 혹은 높은 터’라는 의미일 터인데, 그렇게 부른 것은 당시 시의 중심지로서 이곳이 시내 어디서 바라보아도 응봉산 산등성이와 그 골짜기가 우뚝 높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웃터골은 1920년에 정지(整地)가 되어서 35년까지 15년간 인천공설운동장으로 쓰였다. 이곳에서 일인에 대항해 민족 감정을 발산하던 한용단(漢勇團) 야구팀의 선전(善戰)과 단장 곽상훈(郭尙勳) 의원의 일화가 지금도 생생하다.
고일(高逸) 선생이 『인천석금』에서 “인천 청년 운동의 발원지는 웃터골이다. 인천 시민에게 민족혼의 씨를 뿌렸고 민주주의의 묘목을 심었으며, 인천의 애국 투사들이 육성된 곳이 바로 웃터골이다.”라고 썼는데 매우 상징적이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느낌이다. 바로 유명한 3·1 독립투사요, 민족 교육자인 길영희(吉瑛羲) 교장 선생이 광복 후 이 자리에 인천중학교와 이어 제물포고둥학교를 개교했기 때문이다.
인천중학교는 평준화 시책 때문에 없어졌고 지금은 제물포고등학교만 남아 있지만 고일 선생이 지적한 그런 민족혼을 이어받아 이 자리에 두 학교가 개교해 인천은 물론 전국적인 명문으로서 명성을 얻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제물포고등학교의 개교는 단순한 개교가 아니라 대한민국 교육이 나아갈 바, 방향을 제시한 개교이면서 인간 교육의 참 이념을 실현하는 혁명적 개교였다는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평가다.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구전(口傳) 문구가 교시이고, 강당의 액자 속에 ‘유한흥국(流汗興國), 위선최락(爲善最樂)’ 글귀가 교훈인 학교. 일체의 허례와 격식을 버리고 오직 양심에 따른 자율만을 존중하는 학교. 이것이 길 교장이 지향하던 교육의 최종 목표였다.
한국 초유의 무감독 시험 제도, 무규율부 제도, 학생 주관 전교생 월례 조회 제도, 전교생이 스스로 그룹을 결성하는 그룹 제도, 전문 운동부가 없이 학생 모두가 스스로 체육부원이 되는 학교, 교사의 글은 단 한 줄도 학생 교지에 실리지 않는 학교, 한국 중?고교 최초의 대규모 개가식 도서관을 가진 학교…….
많은 풍상과 변화를 겪었지만 제물포라는 지명은 또 이렇게 학교 이름으로도 남아서 문득 인천을 생각해 보게 한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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